콘텐츠를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왜 나영석PD(나PD)의 예능에 열광하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PD의 대표작이자 지금까지 제작한 모든 방송의 큰 맥락은 KBS에서 기획했던 ‘인간의 조건’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2012년 방영했던 이 프로그램의 포맷은 단순합니다. 일주일 동안 남자개그맨 6명이 한 집에서 ‘스마트폰 없이 살기’를 시작으로 ‘쓰레기 없이 살기’, ‘플라스틱 사용하지 않기’, ‘물 없이 살아보기’, ‘대중교통만 이용하기’, 등 미션을 받아 당연하게 누렸던 문명의 혜택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인간다움은 무엇인가?
<인간의 조건>
2012년 ‘인간의 조건’ 방영 당시 대학가는 인문학 열풍이었습니다. 지금껏 우리 사회를 지배한 경쟁과 성장 패러다임에 대한 회의와 지성의 전당이었던 대학의 실용학문 위주 학과개편, 인문대학 통폐합이 그 시작점이었습니다. 인문학은 기계적인 기능을 배우기 이전에 ‘인간다운 삶은 무엇인가?’, ‘나의 존재’에 대한 고민이 먼저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능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를 묻다
‘인간의 조건’이 좋았던 이유가 있습니다. 예능에서 “나는 누구인가?”, “인간다운 삶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인간이란 ‘생각하고’, ‘창조하고’, ‘실행하는’ 존재임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6명의 출연자는 미션이 주어진 첫날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고, 짜증 내고, 힘들어합니다. 3일째부터는 편리함에 잊고 있던 삶의 방식을 하나씩 떠올리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마지막 날 조금만 부지런하면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충분히 인간답게 살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당연하게 여겼던 문명의 혜택에서 잠시 떨어져 보니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소감을 밝히는데요. 그렇게 미션이 끝나고 다시 문명의 편리함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의 조건’은 예능에서 “나는 누구인가?”, “인간다운 삶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생각하고’, ‘창조하고’, ‘실행하는’ 존재임을 직접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스마트폰 등 문명의 편리함 덕분에 스스로 문제의 답을 찾는 근육이 약해지고 감각과 감성의 폭이 좁아지고 있는데, 이 시점에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 의미있는 콘텐츠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행복’은 무엇인가요?
<삼시세끼>
나PD가 KBS를 퇴사하고, tvN으로 이직하면서 제작한 ‘꽃보다 할배’, ‘삼시세끼’, ‘윤식당’, ‘신혼일기’는 수많은 정보와 말초적 자극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벗어난 공간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정보과잉에 밤낮없이 돌아가는 도시에서 개인을 돌아볼 여유도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바삐 돌아가는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지친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곳, 잠시 현실과 동떨어져 힐링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합니다.
만약 나에게 10일간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나PD가 말한 삼시세끼의 기획 일화입니다. 점심을 먹다 일이 많아 힘들어하는 작가에게 “너에게 지금 당장 휴가가 주어진다면 뭘 하고 싶니?” 물어봤는데, ‘저는 전파도 안 터지는 시골에서 비 오는 날 빗물 떨어지는 처마에 앉아 부침개 먹고 만화책 실컷 보고 싶어요’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 나도 너무 하고 싶은데, 이런 생각을 나만 하는게 아니구나, 대중들도 그렇게 생각하겠구나’ 그렇다면 대신 이뤄줘야겠다라는 생각에서 삼시세끼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럭셔리가 행복의 전부는 아니다
삼시세끼는 아끼는 사람들과 아침, 점심, 저녁을 차리고 먹고, 커피를 맷돌에 갈고, 화덕을 만들어 빵을 굽고, 수다 떨다가 계곡에서 가만히 발 담그고 있는 것도 행복임을 보여주었습니다. TV로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쉽지 않죠.
나PD는 칸 라이언즈 세미나에서 삼시세끼를 “평범한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판타지 (Affordable Fantasy)”라고 표현했습니다. 경쟁, 미션, 일등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즐겁게 일하고 맛있게 먹는 ‘무위도식’의 삶을 대리만족 할 수 있도록 만든것이죠. 돈과 명예를 얻고 고급호텔 스위트룸에 럭셔리한 파티를 하면 행복이다라는 패러다임을 바꾼, 변화하는 시대상과 맞아떨어진 콘텐츠입니다.
잊고 있었던 감성을 깨우다
삼시세끼의 매력은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고 도시에 살면서 잊어가던 감성을 불러왔다는 점입니다. 삼시세끼를 시청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반려견 밍키가 오랜 산통 끝에 새끼를 낳는 장면입니다. 방송을 같이 시청하던 친구가 ‘너무 감동적이지 않니?’라며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당시에는 ‘얘 좀 보래요’라고 웃어넘겼지만 지금 생각하면 삼시세끼의 장면 하나하나가 우리가 어른이 되고 잊고 있었던 혹은 잊었다고 생각했던 내면의 감성을 깨운 것 같습니다.
과장된 동작과 언어유희의 재미요소는 없지만, 대형 솥에 밥을 지으면서 나는 구수한 냄새, 직접 수확한 먹거리로 반찬을 만드는 뿌듯함, 시장에서 장보고 먹는 짜장면이 그렇게 맛있다는 것을 기억나게 했고, 풋풋했던 사랑, 따뜻했던 가족과 한 때, 비 온 뒤의 흙냄새, 여름의 푸르른 녹음과 시원한 계곡에서 수박 한 입, 선선한 가을밤의 정취와 흘러간 옛 팝송을 들으며 노곤노곤 해졌던 추억과 감성을 그렸던 장면이 코끝 찡하고 눈물이 나는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크리에이티브? ‘반보 앞선 새로움’과 ‘성실함’ 그리고 ‘사람’
<꽃보다 할배>
나PD가 제작하는 프로그램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대중이 나PD에게 궁금한 점입니다. 그는 한 강연에서 크리에이티브한 콘텐츠는 ‘새로움’, ‘재미, ‘의미’ 3가지를 담아야 하는데 그 중 ‘새로움’이 가장 중요하며, 그 새로움이란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하는 것 ‘반보 앞선 새로움’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현재, 콘텐츠는 넘쳐나고 유능한 기획자도 많습니다. 의미 있고 재밌고 주목할 만한 콘텐츠도 많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찾아보고 언론이 소개하는 콘텐츠는 몇 안됩니다. 아무리 나만 생각할 수 있는 독특함과 새로움으로 무장한 아이디어라도 사람들이 낯설어하고 따라올 수 없는 새로움은 의미 없는 것이죠. 대중이 흥미를 갖고 따라올 수 있도록 만드는 새로움 바로 나PD가 말하는 ‘반보 앞선 새로움’입니다.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대중의 시선과 호흡을 맞춰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반보 앞선 새로움,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하기
‘꽃보다 할배’를 처음 봤을 때, 단순한 해외여행인 줄로만 알았다가 출연진을 보고 충격 받았습니다. 배낭여행은 당연히 20대 청춘들의 버킷리스트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상상하지도 못했던 70·80대 연기자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이 다녀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배낭여행과 70·80대 연기자를 연결할 생각을 했을까?
그가 강연에서 이야기한 ‘꽃보다 할배’ 기획과정을 보면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하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박 2일로 국내 여행을 해봤으니 우리 해외여행 콘텐츠를 다뤄볼까?
-근데 그냥 여행 말고 배낭여행이 좋을 것 같아! 배낭여행은 누굴 데려가면 좋을까?
-꼭 20대만 배낭여행을 하는 건가? 배낭여행에 마땅한 나이가 있을까? 꼭 청춘만 배낭여행을 하는 걸까?
-그렇다면 배낭여행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은 누구일까?
-어린이, 어르신인데. 그럼 70·80대 어르신이 하는 배낭여행은 어떨까?
그렇게 배낭여행과 거리가 멀어 보였던 80대 어르신을 섭외했습니다. 서로 다른 것이 부딪혀 발생한 스파크는 예상하지 못함과 당연하지 않음에서 오는 재미와 새로움으로 연결됩니다. 여기서 ‘보편적 소재의 만남’이 중요합니다. 대중이 관심 없고 생소한 소재를 모은게 아닙니다. 모두의 로망인 여행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친숙하게 생각하는 80대 연기자 4명을 연결한 것에서 시너지가 폭발한 것이죠.
더불어 방송은 시청자를 충족시켜야 하는 포인트가 있는데, 어르신들께는 기억을, 젊은이에게는 호기심을, 장년층에게는 로망입니다. 삼시세끼는 현실적인 시골의 모습을 최대한 배제하고, 시골 생활의 로망을 담은 콘텐츠라 더욱 유효했다고 말합니다.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힘 ‘성실함’
나PD는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를 실행으로 옮기는 능력은 ‘성실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크리에이티브한 사람은 ‘당신 요즘 좋은 아이디어 없나요?’라고 질문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질문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야 내 아이디어와 생각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를 왜 못 알아봐?’, ‘왜 어른들은 내말을 들어주지 않지?’, ‘나에게 기회만 주면 정말 잘할 텐데’ 이렇게 생각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청년들이 갖고 있는 빛나는 아이디어는 중장년층이 가질 수 없는, 그 청년 시기에만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함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은 신뢰라는 바탕에서 나옵니다. ‘이 친구는 믿고 맡길수 있어’라는 믿음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실함에서 시작합니다.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크리에이티브한 사람은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 분야에서 묵묵히 경력과 경험을 쌓고 또 쌓아 어느 위치에 올라섰을 때, 사람들이 내 아이디어를 들어주고 창의적인 사람이다라고 불릴 수 있죠. 그래서 크리에이티브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당장의 성공과 인정을 바라기 전에 그 지난한 과정의 시간을 버티고 버텨야 합니다.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나영석 사단’
사람마다 일하는 방법과 편차가 큽니다. 어떤 성격이 훌륭한 리더고, 팀을 이끌어가는데 어떤 방법이 옳다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나PD와 함께 일하는 제작진은 ‘나영석 사단’으로 불리며 끈끈한 팀워크와 협업체제로 새로운 실험과 콘텐츠를 만듭니다. 트렌드에 민감하고 경쟁이 치열한 방송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입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끊임없이 말합니다. 아래는 그가 동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던 질문과 대답입니다.
Q. 잘나가는 1박2일에서 2년 만에 소집해제한 김종민을 왜 불렀고, 사람들의 비판에도 끝까지 함께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연예인은 비정규직에요. 겉에서 본 것처럼 돈이 많고 화려하지 않아요. 김종민씨는 열심히 일하다가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왔어요. 근데 ‘지금 우리 분위기 좋으니까 너 들어오지마’라고 말할 수 없잖아요. 김종민씨가 다시 들어와서 잘할지 못할지 아무도 몰라요. 어쩌면 못하는게 당연해요. 근데 1박2일은 처음부터 최고의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프로그램이 아니었어요. 모든 멤버가 부대끼면서 같이 성장했고, 그 덕분에 프로그램이 성장했어요. 김종민씨가 들어와서 다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이미 성장한 친구들이 김종민씨를 끌어가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삶이라는게 서로 얽히고 설키고 끌어주면서 나아가는 거잖아요. 그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게 좋은 콘텐츠죠.
나PD의 협업방식은 명의 천재가 이끌어가는 것이 아닌 집단의 지성을 모으는 일입니다. 본부장, PD, 작가가 격의 없이 회의시간에 아이디어를 주고받습니다. 어쩌면 한 명의 유능한 리더가 결정하고 이끌어 갈 때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동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팀 내에서도 능력과 경험치가 다르기에 속도를 맞추는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분명히 실패와 시행착오가 존재하겠죠. 협업은 팀원들에게도 도전과 인내의 시간입니다. 나PD 제작 프로그램 중 시청률이 낮은 프로그램도 있었고, 트렌드를 잘못 짚어서 실패한 적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PD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많은 사람이 도와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재능과 노력이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원동력이기 때문에 가능성 있는 친구에게 기회를 주고 공들여 키운다고 합니다. 후배 PD가 재미없게 편집했다고 바로 ‘너 그만해’, ‘이것 밖에 못해’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더 성장하지 못하니까요. 개인적으로 깨닫고 노력한 모습을 증명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 기회를 고마워하면 더 좋은 거고요.
지금 1년 내내 ‘나영석 사단’의 프로젝트와 콘텐츠가 돌아갈 수 있는 이유는 나PD의 함께 일하는 사람들 덕분 아닐까요.
“한때는 내가 잘나서 잘됐겠지 생각했다면 지금은 아니에요. 대단한 천재가 아닌 이상 이 세상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더라고요. 제 부족한 부분을 좋은 선배, 동료, 친구가 채워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그에 대한 무게감을 크게 느껴요. 좋은 작가 좋은 피디를 키우는건 저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조금씩 나이가 들며 알게 된 사실이죠.”
출처: ‘금요일의 남자’ 국민예능 PD 나영석 인터뷰(조선일보)
예능(Entertainment)과 예술(Art) 사이 그 어딘가
한 강연에서 예술과 예능의 다른점에 대해 들은적이 있습니다. 예능(Entertainment)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에서 훌륭한 기술을 통해 울고 웃는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고, 예술(Art)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세상,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을 발견하여, 내가 사는 이 세계를 흥미롭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능보다 예술의 여운이 더 길게 남는 것 같습니다.
나PD가 말하는 반보 앞선 새로움과 같은 맥락인 것 같습니다. 삼시세끼, 꽃보다 할배, 윤식당, 알쓸신잡을 보고 나면 평소에 무감각했던 부분에서 발견과 질문이 밀려옵니다. 나PD의 콘텐츠는 예술작품은 아니지만, 콘텐츠에서 인문학적인 의미와 발견, 사유을 끌어내는 걸보면 웃음만 주는 예능이라고 말하기 애매합니다. 예능과 예술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나PD의 콘텐츠를 기대하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능이 예술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끊임없이 관찰하는 자세에서 나오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