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Dots
▪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 중인 《서도호: 스페큘레이션스》는 서도호 작가와 아트선재센터 김선정 예술 감독이 20년 만에 다시 만나 한국 관객에게 보여준 적 없는 전시를 논의한 끝에 탄생한 전시다.
▪ 서도호의 스페큘레이션은 수많은 가설, 스케치, 모형을 통해 상상과 현실, 떠나온 고향과 향하는 목적지 등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작가의 사변을 작품으로 구체화한다.
▪ 서도호의 예술 세계 안에는 절대적인 진리, 온전한 목적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작품이 끝나는 지점에서 결론을 내리지 않거나 여러 버전의 결론을 제시하는 방식을 취한다.
한 땀 한 땀 손으로 바느질한 성북동 한옥. 설치 미술가 서도호의 서울집 기억은 반투명한 모양새다. 여름용 한복의 재료인 은조사로 짜여 반대편이 흐릿하게 비친다. 떠나온 집은 손에 잡힐 듯 살랑인다. 기억처럼 가벼운 천은 내가 가는 곳 어디든지 따라올 수 있을 것만 같다. 천 건축물 내부를 거니는 경험은 그 자체로 숭고하고 아름답다. 그래서일까? 때로는 의미를 넘어 작품의 아름다움만이 강렬히 부각되기도 한다.
서도호 작가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단계가 모든 작업 단계 중 가장 흥미롭고 즐겁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의 이번 전시에는 작품을 만들기까지 구상해 온 아이디어 노트가 나란히 함께 놓였다. 머릿속을 떠나 종이로 옮겨지는 순간을 포착한 흔적, 고뇌하며 수정을 거친 끄적임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20여 년 전, 그는 작품에 담긴 의도가 관람객에게 오롯이 가 닿지 않는 것 같다고 느꼈고 스케치로만 존재하던 아이디어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그러나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20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작가의 습작을 공개하였다.
이번 전시에 그가 미완의 스케치를 놓아둔 이유는 따로 있을지 모른다. 작가의 아이디어가 서도호 작가만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주변의 영향을 받고 그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차용하고 차용 당하기를 반복한다. 누군가에게 숨기고 싶었던 나만의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작가 서도호는 습작 노트를 나눔으로써 작가와 관람객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뉴욕과 서울을 잇던 다리처럼, 완벽한 그 어딘가를 향하면서 말이다.
What if-에서 시작된 체계적인 상상, 스페큘레이션
사변, 추론, 사색으로 번역될 수 있는 스페큘레이션(Speculation)은 서도호 작가가 즐기는 작업 방식이다. 사변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사변은 상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인지 활동의 하나이지만, 철학적 맥락에서 잠재적인 결과 및 그것의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탐구하고 검토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잠재된 것, 가상적인 것들까지 모두 실재에 포함된다. 그것까지 인식하는 힘이 바로 실재에 대한 감각이며 우리는 이를 사변이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서도호는 “What if(만약에 ~한다면)”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3차원 바깥으로 벗어난 작품을 머릿속에 떠올린다고 해도 그것을 당장 오롯이 실현해 내기는 어렵다. 그래서 뒤따르는 수많은 가설을 세우고 검토하기를 반복한다. 자료의 한계에 부딪히더라도 리서치는 계속된다. 수많은 스케치와 모형, 애니메이션으로 구체화한다. 서도호의 사변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진행된다.
스페큘레이션 프로젝트 중 하나였던 <다리 프로젝트>(2010-2012)를 살펴보자. <다리 프로젝트>는 만약에 완벽한 집이 있다면 어디에 있으며, 완벽한 집이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됐다. 바다 한가운데 다리를 지어 작가가 살던 도시들을 동거리로 연결한다. 완벽한 집의 좌표를 찍은 뒤에는 수많은 가설을 세우고 검토한다.
두 번째 진행 중인 다리 프로젝트가 아주 좋은 예인데, 물방울의 부력을 활용해 다리를 만드는 아이디어는 박테리아의 방울을 사용하는 아이디어로 발전된다. 뒤이어 생물학자와 건축가가 실현 가능성을 검토한다. 이처럼 사변 과정을 뒷받침하는 리서치는 자판을 몇 번 두들기는 검색만으로는 쉽게 알 수 없는 수준까지 파고들어 간다. 그렇기에 체계적인 조사를 토대로 건축한 “완벽한 집”은 비현실적이기만 한 공상처럼 보이지 않는다.
현재 선재아트센터(2024년 8월 17일~11월 3일)에서 진행 중인 전시 《서도호: 스페큘레이션스》에서도 작가의 사변이 구체화된 작품들을 여럿 만나볼 수 있다. 인간은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할 수 없는 존재일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집을 옮긴다면, 또는 도시들을 이어 버린다면 어떨까? 이처럼 서도호는 현실을 벗어나 상상해 온 또 다른 사변의 세계를 작품 안에 고스란히 녹여둔다. 그 궤적을 좇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따르던 현실의 문 바깥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할 것만 같다.
이번 전시에서는 2003년 한국 첫 개인전에서 함께 했던 김선정 예술감독과 다시 손을 맞잡게 되었다. 한국 관객에게 보여준 적이 없는 전시를 만들어 보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서도호: 스페큘레이션스》가 탄생했다고 한다. 20년간 같은 길을 걸어 온 작가와 예술감독이 두 사람이 함께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는 만큼 작품만큼이나 그 관계성에서도 흥미로운 서사가 싹튼다. 인연이 맞고 시기가 맞아 이루어진 전시다.
서도호 작가의 작업은 제가 상상한 것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줍니다. 처음 서울 집을 천으로 만든다고 했을 때, 좌대를 받치고 있는 조그만 군상들이 움직인다고 했을 때, 서울과 뉴욕 그리고 런던을 잇는 브릿지 프로젝트를 한다고 했을 때도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작업들이 수년 혹은 십여 년에 걸쳐 마침내 실현될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상에 그치지 않고 실현해 내는 그를 보면서 다음에는 과연 어떤 작업을 할지 항상 알고 싶습니다.
통로를 거니는 서도호의 작품들
사변은 지금의 잠재력을 탐구한다. 그렇다면 여러 사변이 실타래처럼 얽혀 만들어진 서도호의 작품들은 어떤 방식으로 잠재력을 탐구하고 있을까? 그 중심에는 통로가 있다. 그가 목적지를 바라보는 방식은 통로 개념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인생이란 하나의 긴 여정이자 목적지 없이 그저 통과하는 공간들일 뿐이다.
사람들은 목적지에 집착한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이 없는, 평범한 공간인 통로가 없다면, 우리는 A에서 B로 갈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삶이란 시작과 끝이 정해지지 않는 통로라고 생각한다.
– 서도호
그에게 있어 목적지란 세상에 없는 것이다. “진짜 진리는 이 세상에 진리가 없다는 거다.” 서도호 작가의 아버지 서세옥 화백이 종종 하시던 말씀이라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 한 시대의 진리였던 것들도 낡게 된다. 답을 손에 쥔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없어진다. 우리는 답을 향해 걸어갈 수 있지만 죽을 때까지 온전한 답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완벽한 집까지 이어지는 다리를 짓는다 하더라도 죽기 전에는 절대 걸어서 도착할 수 없는 것처럼.
완벽하고 영원한 진리를 향해 걸어간다면 그 길의 중간에서 그런 것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평생 목적지에는 도착하지 못한다. 의미 없다며 주저앉기에 길은 길고도 짧다. 그렇다면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있는 목적지가 아니라 가까운 통로를 바라보아야 할 때다. 걸어가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그가 통로를 직접적으로 조명한 작품인 <틈새호텔>(2012)을 살펴보자. <틈새호텔>은 집과 집 사이의 골목에 작품을 놓음으로써 골목을 조명한다. 골목 때문에 양쪽에 있는 집들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5,000km가 넘는 다리를 건설하는 <다리 프로젝트>(2010-2012) 또한 통로를 조명하고 있다. 죽을 때까지 우리가 걷는 다리는 우리가 통과하는 공간이며 우리의 긴 여정이다.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한다 해도 애썼던 시간이 무의미하다기엔 너무나 길다.
기어이 실현되곤 하는 서도호의 아이디어가 증명하듯 불가능은 영원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상상하는 완벽한 목적지가 있다고 믿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다리 프로젝트>의 엔딩 장면에서는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연구 결과물이 사라지며 <비밀의 정원>(2012)의 엔딩 장면에서는 트럭의 미래가 다양하게 제시된다. 결론을 내리지 않거나 여러 버전의 결론을 상상하는 셈이다. 한옥을 작품에서 반복해서 사용하는 이유, 집을 움직이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종착역이나 목적지에 다다르지 않고 집은 계속 움직이며 여기저기서 다른 버전으로 반복된다.
움직이는 집, 연결하는 집
서도호의 또 다른 탐구 주제는 시공간의 이동성이다.
서울에서 만든 집을 다른 곳으로 옮긴 다음 들어가 보면 옛날로 되돌아가는 듯한 프루스트 효과를 느끼지만, 현재 집을 보는 곳은 새로운 곳이다. 그것은 미래에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한다.
시공간을 아우르는 이동성이 내가 붙잡아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 서도호
기억은 우리를 형성한다. 시공간은 붙어 다니며 연속되기도 하고 끊기기도 하는데 이것은 기억의 문제이다. 어느 공간에 가면 어떤 시절이 생각난다. 그 기억은 이어지기도 하고 툭 끊어지기도 한다. 또 그 기억은 우리를 형성한다. 가만히 앉아서는 우리를 형성한 시공간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우리는 움직이는 만큼 느낀다. 이동한 후에 우리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더 선명하게 느낀다. 이 과정이 없이는 어딘지도 모르는 장소의 바깥에 설 수도 없다. 이처럼 잠재된 미래는 현실에서 시작한다.
서도호의 <낙하산병-Ⅰ>(2003)에서는 많은 이들의 사인을 수놓은 수많은 실 가닥이 낙하산을 지탱한다. 낙하산병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이동해 생존하기 위해서는 낙하산이 필수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어디서건, 어떠한 찰나에서라도 지금의 자신, 즉 낙하산병을 존재하게 만든 수많은 인연의 힘을 그려낸다.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이동하는 병사를 지나온 시간과 기억과 인연이 붙들고 있다. <공인들>(1988)과 같은 반모뉴먼트 작업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선택적 기억과 가치 평가로 이루어진 역사는 불완전하다. 우리는 불완전한 역사 위에 존재하므로 우리가 존재하는 기반을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 기준에 맞는 대안적 역사를 만들어가는 편이 도리어 합리적이다.
전근대 사회의 미덕이 분수에 맞는 정착이었다면 현대 사회의 미덕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다. 땅을 기반으로 고착된 사회 체계에서 직분을 부여받았던 전근대인들과 달리 현대의 노마드는 땅 바깥의 주체(탈영토화된 주체)를 지향한다. 전통적 가치관이 삶의 의미를 보증해 주지 않고 안전망이 되어주던 공동체는 뿔뿔이 흩어졌다. 어느덧 현대인들은 정체성을 고정해 주던 전통, 관습, 공동체 등과 분리되어 있다. 나를 보호해 주는 집에서 느끼는 장소를 잃은 상실감은 소속감, 안정감, 정체성의 상실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초국가적인 삶의 조건 속에서 어느 누가 뿌리 내렸던 집에 평생을 머무를까? 집의 상실과 부재, 집에 대한 향수, 여행지의 아름다운 낯섦. 어느덧 이 모두가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삶의 조건이 되어 가고 있다. 그렇기에 집을 이동시켜 버리는 상상은 필연적이다. <연결하는 집>(2010)은 영국의 대리석 기둥 사이에 한국의 전통가옥을 거칠게 끼워 박아 화제가 된 작품이다. 두 문화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불통, 부조화, 어긋남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불시착의 감각은 비단 한국인 이민자만의 것이 아니다. <별똥별>(2012)은 미국 보통 가정의 인테리어가 유사하게 재현된 작품으로 마치 불시착한 것처럼 바닥이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관람객이 작품을 들여다볼 때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야 한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느낌과 그 안에 깃든 불안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이 작품은 미국 보통의 가정에서 자라 온 관람객들에게도 큰 공감을 얻었다.
서도호 작가는 작품과 작품을 연결하는 나름의 조합이 있지만 작가로서 그 조합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각자 다른 구슬이 연결되어 서로를 비춘다면 그 안에 비친 상은 구슬의 개수만큼 다양하다. 그의 작품을 둘러보는 과정은 서도호 작가가 걸어 온 통로와 우리 각 개인이 걸어가고 있는 통로 그 어딘가에서 중첩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한다. 잔물결이 번져가듯 작가의 사변에서 시작된 스페큘레이션이 우리 안에서 또 다른 사변으로 재탄생하는 셈이다.
<스페큘레이션스>를 보고 아트선재센터에서 나와서 맞은편의 정독도서관을 바라보면 사뭇 새롭다. 나와 정독도서관 사이의 몇 미터가 낯설어진다. 이 길을 어떻게 걸어 아트선재센터에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가쁘게 발을 재촉하며 달려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더라. 집에 가는 길에 했던 다짐, 집을 향해 걸어가는 발의 촉감이 문득 생경하다. 아까와는 다른 상쾌한 공기였던 것만이 확실하다.
수많은 인연과 기억이 지금과 과거 사이에 있었고, 체계적인 가설이 지금과 미래 사이에 있을 것이다.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지 않다. 흰색과 검은색 사이 회색의 진가를 밝히는 서도호 작가의 <스페큘레이션스>가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킬지 궁금하다.
2025년 5월,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서도호의 개인전을 기획 중이다. 지금도 구상하고 짓고 허물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는 작가인 만큼, 그간 보지 못했던 미공개 작품 70% 가량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서도호 작가는 다음 전시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굴할까. 또 우리는 다음 전시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할까. 다 읽지 못한 만화책처럼 다음이 기다려진다. 서도호의 작품 세계는 또다시 새로운 길을 밝히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