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나의 군 복무 지역은 강원도 화천의 깊은 산속 GOP(General Outpost: 일반 전초)였다. 입대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과 놀기 위해 해가 지고 밤이 오는 것을 기다리던 나였지만, 그곳에서는 밤이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다. 철책 부근 일부를 제외하면 빛도 사람도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산속에서, 뜬눈으로 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나를 해칠지 모르는 사람이나 동물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긴장감. 우리는 그 두려움 속에서 늘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마도 우리 인류에게 오랜 시간 동안 밤은 그렇게 어둡고 불안한 시간에 가까웠을 것이다.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이 점점 더 모여 살며 도시가 생겨났다. 거기에 전기와 인공조명의 발명을 통해 점차 어두움마저 정복하게 된 인류는 이전에 존재할 수 없었던 새로운 밤의 모습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의 우리에게 해가 지고 난 후 찾아오는 밤은 낮 못지않게 중요한 시간이다.

그런 의미로 서울도시건축센터에서 열린 대화 살롱 <슬기로운 도시생활>의 첫 번째 대화 주제, “당신의 밤은 안녕하신가요?”는 매우 흥미롭고 반가웠다. 서울도시건축센터는 도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건축의 문화뿐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문화를 기록하는 공간으로 확장하는 중이다. 이러한 주제를 품은 대화 살롱의 의도를 짐작해보며 행사에 밍글러(Mingler: 참가∙교제하는 사람)로 참여하기를 결정했다.

 

주제와 함께 패널들에 대한 정보를 접한 뒤, 적잖은 호기심이 앞섰다. 초대된 패널은 도시의 이야기를 담는 매거진 Achim의 편집장 윤진, 식물로 공간에 활기를 채우는 가드닝 스튜디오 수무의 대표 장은석, 그리고 밤의 시간을 보내는 심야서점 책바의 대표 정인성 등 각자의 영역에서 멋진 일들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었다. 이들이 도시∙공간∙밤 등의 키워드로 과연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호기심을 안고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자리에 앉아보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대화가 끝나고 난 뒤의 나는 도시가 건축이기 이전에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쉬는 시간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도시의 밤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얼마나 다양한 방식과 모습으로 채워지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되었다.

 

 

온전히 나를 위한 밤

장은석 님에게 있어 밤은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새벽부터 퇴근 전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해오며 바쁘게 살아온 나를 잠시 내려두고,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시간으로써 밤이라는 시간이 사용된다. 사회적 나가 아닌 개인적인 나로써 보내는 밤인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설명을 위해 가져오신 독특한 모양의 구갑룡이 심긴 화분이었다. 머나먼 땅에서 온 이 식물이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환경을 찾아내어 조금씩 성장하는 스토리는, 낯선 도시의 일부에 홀로 외로이 떨어졌지만 밤이라는 시간에 나다움이라는 양분을 찾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나만의 공간에서 만들어가는 온전한 나의 시간이라는 밤의 개념은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이 시대에, 밤이 가진 도시의 커다란 한 면을 보여주었다.

 

우리들의 창의적인 밤

장은석 님의 이야기가 나다움을 찾아 나가는 개인의 밤을 보여주었다면, 정인성 님의 이야기는 서로 함께 모여 만드는 우리들의 밤을 그려보게 했다. 책과 칵테일이라는 요소를 바탕으로 공간에 모인 사람들. 좋아하는 사람과, 또는 서로 잘 알지 못하지만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칵테일을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심야서점 책바는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밤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 공간에서 밤이라는 시간은 우리의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예술가의 창의적인 시간으로 사용된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아침을 준비하는 고요한 밤

아침의 영감들을 타블로이드 매거진에 담는 윤진 님은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보내는 새벽의 소중함에 관해 이야기했다. 해가 져서 어두워진 때부터 다음 날 해가 떠서 밝아지기 전까지의 동안이라는 밤의 사전적 의미를 생각했을 때, 해뜨기 전의 이른 아침을 보내는 모습은 도시에서 밤을 보내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어찌 보면 같이 해가 지고 난 후의 어둠 속인데, 굳이 잠들기 전의 밤이 아닌 새벽의 밤을 즐기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잠을 자고 난 뒤의 개운함이나, 해 뜨는 모습을 볼 때의 뿌듯함과 같은 개인적인 이유를 말씀하실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가 꼽은 것은 모두가 잠들고 난 도시의 고요함이었다. 고요함은 숨가쁜 낮의 책임감을 견딜 마음의 여백을 준비할 수 있는 배경이다. 도시는 모여 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지만, 반대로 고요함을 느끼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새벽은 온전한 고요함을 누릴 수 있는 밤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패널 세 분의 토크 후에 오간 다양한 질문들, 그리고 이어진 우리의 대화는 보다 다양한 도시를 바라보게 했다. 대화의 공간에는 8명 남짓의 이야기가 오갔을 뿐이지만, 적게는 수만 명, 많게는 수백만 명이 모여 사는 도시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하는 훨씬 다양한 도시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밤에도 불빛이 꺼지지 않는 번화가의 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야간 작업자들의 밤, 새벽 시간 우는 아이를 달래며 분유를 타는 부모의 밤, 도로 위를 달리는 운전자들의 밤, 남들보다 일찍 새벽을 여는 사람들의 밤 등. 그 모습 중 어느 하나도 도시의 밤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 각각의 삶의 빛이 모여 만들어지는 도시의 밤

 

높은 곳에 올라가 보이는 도시의 반짝이는 야경은 결코 도로의 가로등이나 한강 교량의 조명 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시에서 일하고, 또 살아가는 사람들의 창문에서 나오는 빛 하나하나가 함께 모일 때 비로소 도시의 야경은 완성된다. 우리의 삶에 똑같은 밤이 하나도 없듯, 우리가 사는 도시의 밤이 매번 다른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라는 공간, 또 우리 각각이 가진 삶의 빛이 모여 만들어지는 도시의 야경. 이날 늦게까지 이어진 우리의 대화는, 그런 도시의 야경처럼 각자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모여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여러 삶의 반짝거림을 모으고 담은 서울도시건축센터가 도시생활의 공감, 소통, 연대의 장을 만드는 [제3의 공간]으로 자리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