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시간들을 멈출 수는 없으니 다만 우리 지금 여기서 작은 축제를 열자
-페퍼톤스 EP <Open Run> 수록곡 ‘노래는 불빛처럼 달린다’ 中
바깥 공기가 차가워졌다. 목도리가 행인들의 목을 감싼다. 모직 코트의 보드라운 색감과 어깨선이 길거리를 메운다. 그렇게 겨울과 연말이 함께 달려온다. 겨울 공기에 표류하는 묘한 긴장감과 결연함은 일 년의 시작과 끝을 담는다. 시간의 유한함 속 최상의 성과를 내고 싶은 사람들의 욕심과 아쉬움이 서로 맺어질 듯, 풀어질 듯 밀고 당기기를 하는 시간이 바로 지금, 연말이다. 그래서일까. 연말만 되면 약간 어둑어둑한 조명이 있는 나만의 아지트를 찾게 된다. 다음 봄이 오기 전까지 머릿속 계획들을 다듬고 생각을 퇴고하기 좋은 공간에 숨고 싶다.
또 하나의 버릇은 드라마보단 영화를 찾는다는 것이다. 영화 속 멜랑콜리에 푹 빠져 몽글몽글한 감성의 일기에 적다 보면 어느덧 새벽이 훌쩍 가 있다. ‘영화 같은 인생’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우습다고 생각했는데
해가 갈수록 이 말처럼 담백하고 솔직한 문장이 없다. 시작부터 크레딧 롤이 바삐 올라가는 순간까지 영화의 흐름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이 동하고 있다. 내가 예상했던 쪽이건 아니건 한정된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나를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움직인다. (보통 후자인 경우가 많다.)
겨울 감성에 흠뻑 취해 한 해의 고단함을 반추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제와 영화 관련 공간들을 글에 담았다. 홀로 또는 편한 벗과 도란도란 찾아가서 머무는 걸 조심스레 권해본다. 부디 나만의 작은 축제를 찾길, 그리고 그 안에서 여러 풍요로운 생각들이 결실을 보는 2018년 연말이 되길 바란다.
제주의 매력과 함께하는 제 14회 JEJU FILM FESTIVAL
*제주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http://www.jejuff.kr
겨울의 제주는 아름답다. 태어나서 처음 제주도를 갔을 때의 기억은 그 어떤 여행지에서의 것보다 활력이 넘친다. 공항에 내려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며 검푸른 바다를 관조했다. 1시간 동안 지켜본 날카로운 파도의 춤은 여행의 내일을 고대하게 했다.
올겨울 제주로 떠날 계획이 있다면, 시큰한 바람에 코끝이 빨갛게 물들 때쯤 영화 한 편을 감상하는 일정을 추천한다. 매해 늦가을에서 초겨울 열리는 제주영화제에는 제주도와 섬의 특성을 듬뿍 담은 섹션들이 마련되어 있다.
제주도를 소재로 한 단편 영화들로 짜인 ‘제주트멍’ 섹션, 바다에서 펼쳐지는 장편 영화들로 구성된 ‘아일랜드시네마,’ 그리고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어느 가족> 등의 작품으로 국내 영화 팬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별전’ 등이 준비되어 있다.
무엇보다 ‘제주트멍’ 섹션의 상영작은 제주 영화인의 감성이 담긴 작품들로 일반 영화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영화들이다. 바라만 봐도 낭만과 영감이 차오르는 제주의 자연이 담긴 컷들은 보는 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걸어올까. 제주도의 풍광과 매력의 끝점 같은 제주영화제에 발을 들여보자.
영화 ‘남국재견’과 연남동
*남국재견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namgukjaegyeon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남국재견>은 마음을 아리게 하는 영화다. 세련되게 다듬어진 2018년을 사는 나와 옛날을 살아가는 스크린 속 청춘들이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더 심각하다. 절절한 내적갈등을 발설하는 일조차 터부시되는 사회를 어려워하면서도 사실상 겉으론 너무 잘? 적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자아의 아픈 손가락 같은 영화 <남국재견>의 이름을 딴 공간이 한창 핫한 연남동에 자리하고 있다.
두 명의 감독이 운영한다고 알려진 이 공간에선 매주 직접 선정한 영화가 상영된다. 아늑한 공간에서 차, 영화, 분위기 삼박자를 고루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공간을 조심스레 귀띔해본다. 북적북적한 연트럴파크를 걷다 <남국재견>의 상영회에서 밤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날을 꿈꾼다. 겨울밤이 더욱 고소해질 듯.
과거와 연결된 유일무이한 광주극장
*광주극장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cinemagwangju
‘영화가 시작된 광주극장은 너무나 어두워서 빈 좌석과 사람이 앉아 있는 좌석의 구분이 다른 곳보다 어려운데 더듬거리며 자리에 앉았을 때 스크린과 내 눈 사이를 흐릿하게 지나가는 얼굴들 나는 그게 그 사람들이. 흐리게 나타나고 뚜렷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이.’
-박솔뫼 <우리의 시간들> 中
올해로 개관 83주년을 맞은 광주극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중 하나다. 여전히 그림 간판으로 영화를 홍보하는 이곳은 과거의 시간이 종결되지 않은 특별한 공간이다. 예술영화와 독립영화 위주로 상영하는 데 800여 석의 단관에서 한 편의 영화가 하루에 딱 한 번 상영된다.
피카딜리도, 신촌의 터줏대감이었지만 지금은 멀티플렉스로 바뀐 한 예술영화관도 모두 시간과 함께 마모되었다. 건물은 새로움이란 옷을 입고 재탄생하는 데 성공했지만 본래 극장의 문화와 숨결은 이미 소멸했다. 그래서 새 영화관들이 이전 영화관들의 명맥을 잇는다고 말하기엔 난처하다. 어쨌든 한국의 모든 도시는 새것을 사랑한다는 의견을 방증하는 공간들, 글들, 유행이 참 많다. 그래서 유일무이한 광주극장이 좋다. 좌석 하나하나에 놓인 청춘들의 꿈과 만나는 시간이 좋다. 그들과 나의 공통분모는 영화다.
세이브 더 칠드런과 제4회 아동권리영화제
*아동권리영화제 공식 사이트: https://www.sc.or.kr/scff
따듯한 극세사 이불, 훈훈한 바닥, 그리고 3cm 정도 열린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찬 공기와 함께할 수 있는 영화제가 있다. 올해로 4회를 맞이한 아동권리영화제가 왓챠플레이와 협업하여 온라인 상영관을 열었다. 총 77편의 영화가 상영되며 주제는 ‘아이들’이다. 일단 명작으로 꼽히는 <죽은 시인의 사회>, <피아노의 숲>, <기쿠지로의 여름> 등의 영화가 반갑게도 리스트에 자리하고 있다.
연말에 필요한 위로와 감동이 담긴 영화들도 있는데, 그중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내 이름은 꾸제트>, <코러스>가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캡틴 판타스틱>, <뷰티풀 라이>, <피부색깔=꿀색>같은 영화들은 생각을 자아내고 2019년의 나를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영화들이다.
영화제를 주최하는 NGO 세이브더칠드런은 아동 학대, 청소년 인권 등의 이슈를 알리기 위해 매해 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실제 영화제는 11월 24일, 25일에 열렸으며, 온라인 상영관은 11월 30일까지 열린다. 라인업에 명작이 다작 소개된 만큼 몇 작품은 나중에 볼 영화 리스트에 기록해두자.
영화로 나와 마주하는 시간
시끌벅적한 연말엔 그 나름의 장점이 있다. 기쁨이 섭섭함을 밀어내고 옆 사람의 웃음에서 활기를 되찾는 보석 같은 시간이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귀한 시간이기에 아지트에 콕 박혀 보내는 무비 타임은 송년 행사들을 대체할 수 없다.하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는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할 수도,그들의 진심을 받을 수도 없다.
내 안에 감정과 고뇌가 채워져야 공감하고, 품고,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나는 연말에 영화를 보고 아지트를 찾는다. 내가 나를 주인공으로 여길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질 때 감독과 시네마토그래퍼는 화면과 대사로 말을 걸어오고, 배우들의 감성이 나의 감정과 교차하며, 허상의 인물들과 환경이 내 속마음을 대신 읊어준다.
사실 연말은 여느 날과 다를 바가 없다. 다신 오지 않는 시간,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값진 재화, 일 년 중 하루. 하지만 결국 이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해가 시작되며 나는 시작이란 이름 아래 앞으로 걸어 나간다. 앞으로 다가올 많은 도전과 새로움을 만끽하기 전, 생각에 환기를 주는 영화와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하는 나와 추억을 쌓아 보시라고 조심스레 권유해본다. 잔잔한 침잠의 시간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크고 작은 불꽃들을 수놓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