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글자를 그대로 해석해 보면 옛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서 새것을 안다는 것이다. 보통 어떠한 새로운 일을 도모할 때 과거의 역사나 지식을 고려해야 제대로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흥미롭게도 온고지신은 우리 삶의 대부분의 영역에 해당된다. 우리가 새로운 일을 맡았을 때 과거의 동일하거나 비슷한 사례를 먼저 찾아보는 것처럼, 어떤 대상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에서 과거의 역사와 이야기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다.
건축 분야에서 특히 그런 사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전의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고 새로 건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리모델링을 통해 최소한의 철거만 진행하고 기존 건축물에 과거를 고스란히 담아낸 상태에서 새로운 정체성과 역할을 부여하는 경우다. 이 경우, 사람들은 그 건물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를 기억하며 그 공간이 가진 특별함을 상기할 수 있다.
관련된 대표 사례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이다. 오르세 미술관은 1804년 처음 지어질 당시, 오르세궁이라는 이름의 행정 재판소였다. 이후 화재로 탔다가 1900년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기차역으로 바뀌었다. 이후 철도 기술의 발달로 오르세 역의 활용 가치가 떨어짐에 따라 포로수용소, 영화촬영장 등으로 쓰이다 1986년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이 세워졌다. 만약 활용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기차역이 철거되었다면 그 위에 멋진 건물이 들어섰을진 모르나 오르세 미술관이 지닌 역사와 이야기들은 땅에 묻힐 수도 있었다. 오르세 미술관에 방문하는 관람객들은 적어도 흥미로운 프랑스 역사 한 꼭지 정도를 더 알고 가는 셈이다.
오르세 미술관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많은 건축물들이 보존의 미학을 자랑한다. 그저 건물을 밀어버리고 새로 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여기저기서 증명되고 있다. 이것이 곧 도시 재생의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보존형 건축물이 지닌 흥미로운 이야기의 가치다.
고귀한 폐허, 헝가리의 루인펍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찾는 여행자들이라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술집이 있다. 바로 루인펍이다. 루인(Ruins)은 영어로 몰락 혹은 폐허라는 뜻인데, 한때 온전했던 구조물이 유지관리 부족이나 고의적인 파괴, 자연재해 등 기타 이유로 인해 일부분만 남아 있거나 사라진 흔적을 의미한다. 단순히 되살릴 수 없는 폐허만의 의미가 아닌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건물, 터 등을 보존하는 유적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헝가리의 루인펍은 이러한 콘셉트를 살려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과거의 건물을 개조하여 술집으로 만들었다.
대다수의 루인펍들이 위치한 부다페스트의 제7구역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유대교 회당이 있으며,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유대인들이 밀집해 있던 곳이다. 그러나 폴란드와 함께 헝가리에서도 독일 나치 정권에서 벌어진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많이 일어남에 따라 도시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유대인들이 살던 주거지역은 말 그대로 버려진 폐허가 되었으며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는 그 누구도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헝가리가 한창 발전하던 시기에 지어진 멋들어진 주택과 상가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이후 제대로 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헝가리의 경제 체제가 바뀌면서 다양한 민간 주도의 사업 모델들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그중 하나가 루인펍이었다. 버려진 주택, 상가들과 같은 폐건물들 가운데 내부 개조가 용이한 곳들을 중심으로 하나둘 저마다의 색깔을 가진 펍을 세웠다. 젊은 사업가들이 개발의 중심이 되면서 디자인적인 요소들을 중시했고, 오래된 가구나 펍의 특색에 맞는 오브제들을 적극 활용했다. 멋진 공간이 탄생하자 소문은 금방 퍼졌다. 최초이자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심플러 케르트(Szimpler Kert)를 필두로 점차 이 지역에 루인펍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폐허 특유의 분위기에 당시 유행했던 히피, 언더그라운드 문화 특유의 자유로움이 더해져 한껏 더 멋들어진 공간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현재 부다페스트에는 옛 유대인 지구를 중심으로 십여 개의 루인펍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아파트를 개조해 작은 방들이 많은 펍, 대형 공간을 개조해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하는 펍, 호스텔과 바를 운영하는 펍 등 각기 다양한 콘셉트를 지니고 있다. 그 때문에 관광객들은 헝가리에 와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으로 루인펍을 꼽기도 한다. 루인펍은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폐허의 공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현대의 멋을 담아낸 가장 대표적인 상업적 개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야기하는 미술관, 영국의 테이트 모던
영국은 2000년대를 맞이하며 21세기의 첫 순간을 기념하는 동시에 영국이 보여 온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새로운 발전을 다짐하고자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밀레니엄 프로젝트에는 총 5개의 건축물이 계획되었는데, 밀레니엄 돔, 밀레니엄 브릿지, 밀레니엄 휠(런던 아이), 대영박물관(증축 공사), 그리고 여기서 소개할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다. 나머지 넷이 새로 짓거나 기존의 건물을 더 증축한 사례라면,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기존의 시설이 지닌 외관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용도로 탈바꿈했다는 특징이 있다.
런던은 서울과 같이 템스강을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은 북쪽과 달리 남쪽은 과거 산업혁명 시기부터 계속되어 온 제조업 중심지의 이미지를 탈피하지 못했으며 제조업 공장들이 문을 닫으며 낙후되어 갔다. 도시 발전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영국 정부는 템스강 남부에 있는 버려진 화력발전소 부지를 활용해 현대 미술관을 짓기로 했다.
흥미롭게도 이 결정에는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다. 우선 영국을 대표할 만한 현대 미술관이 부족했던 런던 내에 안팎으로 상징성을 지닌 현대 미술관이 세워진다는 점이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낙후된 남부 지역을 새 랜드마크의 후보지로 선정함으로써 북부 지방을 주로 찾던 관광객과 유동 인구를 남부로 분산시키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하나인 밀레니엄 브릿지를 테이트 모던 바로 앞에 짓기로 했다.
런던의 새로운 현대 미술관을 세우는 이 프로젝트에 100명이 넘는 건축가가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제출했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기존 화력 발전소 건물을 그대로 활용하는 리모델링 방식을 제시한 헤르조그 & 드뫼롱(Herzog & De Meuron)의 아이디어가 채택됐다. 발전소를 부수지 않고 외관을 그대로 살려 리모델링함으로써 그 건물이 지닌 역사와 문화를 그대로 지킬 수 있었고, 또한 오랫동안 지켜 온 런던만의 색채를 그대로 머금을 수 있었다.
건축물에 역사와 이야기가 깃든 덕분인지 테이트 모던은 한 해 5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영국의 대표 관광지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테이트 모던의 미술 작품들은 기존의 영국 국립 미술관에서 옮겨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엄밀히 말해 이전에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던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런던의 제조업 절정기를 지나 보낸 화력발전소가 미술관이 되었다는 건축의 스토리텔링과 상징성이 생기자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들었다. 과연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지었다면 이만큼의 반향을 만들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한국형 도시재생의 새 얼굴, 프로보크 서울
한국에서도 보존을 키워드로 한 도시 재생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옛 제분공장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바꾼 프로보크 서울이 그렇다. 1930년에 지어진 제분공장 건물은 2013년 새로운 공장용지로 이전하게 되면서 5년 넘게 문을 닫은 채 방치되었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데다가 그 면적이 1만 제곱미터를 넘기에 땅값도 상당했으며, 그 탓에 선뜻 개발하겠다고 나서는 새 주인도 없었다. 결국 서울시는 토지주와 상호 협의하여 민간사업자를 선정하고 공장 시설을 개조한 뒤 복합문화공간인 프로보크 서울로 탈바꿈시켰다. 이는 서울시의 첫 민간 주도형 도시재생사업 프로젝트다.
재미있는 사실은 프로보크 서울의 사업 운영을 총괄하는 이가 바로 제분공장 창업주의 손자라는 점이다. 오랜 기간 외국계 부동산 투자회사에서 근무한 박상정 대표는 회사를 설득해 공장용지 매각을 막았다. 사실 부동산 전문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땐 공장을 매각하고 아파트나 대형 오피스 빌딩을 짓는 것이 더 이윤을 남기는 일이다. 하지만 박 대표는 공장이 지닌 역사에 주목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한국전쟁을 버텨내고 80년 넘는 역사를 이어 온 제분공장 건물은 분명 존재만으로 그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공장 건물을 문화공간으로 바꿀 때 증축과 리모델링에 들어가는 비용이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보다 때로 더 비싸기도 하다. 하지만 프로보크는 공장 건물이 지닌 가치를 더 오랫동안 지키고 보존하면서 이익을 창출할 방법을 고민했고 외형을 그대로 살리는 리모델링을 통해 복합문화공간을 구축할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이에 회사 측은 임대료를 받는 조건으로 운영을 일임했고 박 대표는 이 프로젝트만을 위한 매니지먼트사를 꾸려 전력투구에 나섰다. 서울시 또한 첫 민간 주도 도시재생 사업을 돕고자 사업비 지원 및 주변 인프라 정비에 나섰다.
프로보크 서울은 총 3개의 테마를 가지고 공간을 운영할 예정이다. 카페 및 식당이 주가 된 F&B 구역, 전시 및 쇼핑 시설 구역, 그리고 밀가루를 주제로 한 쿠킹 클래스와 청년 창업시설 구역 등으로 이루어진다. 서울시는 창업시설 구역의 일부를 활용해 지역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꾸릴 계획도 갖고 있다. 프로보크 서울은 현재 계속 리모델링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부 공간은 이미 공개되어 전시, 제작 발표회, 음악 페스티벌 등의 용도로 다양하게 활용되는 중이다.
흔히 개발이라고 하면 오래된 무언가를 부수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짓는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하지만 위의 사례들은 용도 폐기된 이전의 건물을 보존하면서도 건물에 충분히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건물에 담겨있는 역사와 이야기의 가치가 충분하다면 굳이 부시지 않아도 새로운 역할을 맡았을 때 그 매력을 고스란히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과거에 담겨있는 그 이야기 때문에 건물을 찾게 될 수도 있다.
과거의 이야기가 무엇이든 그것을 지켜내고 그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이 과정을 해냈을 때 그 공간에는 다른 공간이 가지지 못한 역사가 생기고 가치가 생긴다. 그 가치 있는 공간은 하나의 대상이자 매개가 되어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추억이 될 것이다. 여러 세대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공간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보존은 훌륭한 옵션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