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이 저물었다. 호랑이의 용맹한 기운을 자랑하던 임인년(壬寅年)이 기력을 다하고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가 힘차게 도약하는 새해가 밝았다. 2022년은 끝이 없는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국제정세가 더 불투명해진 데다가 경기침체, 금리상승, 인플레이션 등이 세계 경제가 억눌린 한 해였다.
그 속에서 각자의 2022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누군가에겐 잊지 못할 추억과 환희의 기억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마음에 다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의 상처와 먹먹함이 새겨진 시간이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로 움츠러드는 세밑이었지만, 어둠을 밝히고 새해, 새 희망을 꿈꾸는 세 가지 빛의 이야기로 서울의 풍경을 담았다. 2022년의 끝과 2023년의 시작을 관통하는 빛의 시선이자 빛의 바람이다.
판타지의 빛, 서울의 밤을 채우다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잘 꿰뚫는다는 유통기업. 2021년 연말쯤 국내 한 대형 백화점이 백화점 건물 외관을 밝힌 화려한 연출로 최고의 마케터임을 증명했다. 바로 신세계백화점이다. 본점 전체를 에두른 미디어 파사드는 당시 연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매일 밤 코로나로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고, 일상을 잠시 잊은 채 판타지 세상으로 이끄는 마력을 발휘한 덕에 백화점 건너편은 최고의 포토존이 됐고, 주변 도로의 교통까지 마비되기도 했다.
이 기세를 이어 지난해에도 신세계백화점 본점은 11월 중순부터 서울의 밤하늘을 형형색색으로 밝혔다. 지난해의 주제는 Magical Winter Fantasy. 지난해 Magical Holidays에 이은 두 번째 작품이다. Magical Winter Fantasy는 설경 위를 달리는 크리스마스 기차를 타고 도착한 마법의 성에서 펼쳐지는 파티 이야기다. 환상적인 아이콘들이 어우러지는 3분짜리 영상이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이름 그대로 마법 같은 연말 선물이었다. 신세계백화점은 2021년의 성공에 힘입어 본점 외에도 전국에 위치한 여러 지점에서 화려하고 대형화한 외관 장식을 선보였다.
2021년 연말, 뜻하지 않게 크리스마스 마케팅 왕좌의 타이틀을 내어 준 다른 백화점은 지난해 더 공을 들인 모양새였다. 롯데백화점은 유통 명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신세계 본점과 상권이 겹치는 명동 본점과 함께 자신들의 주 무대라고 할 수 있는 잠실 월드타워에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내걸었다. 롯데의 테마는 Christmas Dream Moments. 모두가 꿈꿔왔을 크리스마스를 동화 같은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으로 풀어냈다.
롯데백화점 본점에서는 100m 이상의 파사드를 3층 높이로 새로 올리고, 파사드 전체를 크리스마스트리와 조명으로 장식해 동화 속 크리스마스 거리를 걷는 듯한 느낌을 연출했다. 월드타워에는 5천여 개의 조명이 반짝이는 대형 트리, 높이 1.2m의 유럽풍 미로 정원 그리고 회전목마 등을 갖춘 크리스마스 테마 정원 샤롯데 가든(Charlotte Garden)이 등장하기도 했다. 건물 전체가 미디어 파사드로 유명한 월드타워와 함께 LOTTE TOWN을 이루어 꿈처럼 색다른 찰나의 경험을 선사했다.
희망의 빛, 광화문 광장을 밝히다
서울의 연말을 밝힌 빛은 백화점과 같은 상업적인 공간에서만 빛난 게 아니다. 새로 조성된 광화문광장은 시민들의 마음을 밝게 비춘 대규모 미디어파사드 쇼 서울라이트 광화를 개최했다. 서울라이트 광화는 기존의 규모보다 2배 이상 커진 광장을 한겨울 시민들이 즐길 수 있도록 기획해 처음 선보인 빛의 축제다. 연말까지 매일 밤 새로 단장한 광장 전역을 빛과 음악으로 채웠는데,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세종문화회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KT빌딩 등 주변 건물을 활용한 색다른 경관 조명이 곁들여졌다.
인상적인 광경은 광화문광장에 새롭게 설치된 6m 높이의 조명 기둥 22개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였다. 광화문광장 대형 미디어파사드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외벽, 역사박물관 광화벽화를 활용한 빛이 서울의 밤을 수놓았다. 특히 리모델링 중인 KT빌딩은 색다른 볼거리를 선사하기도 했다. 사옥 리모델링 공사 현장에 설치된 대형 가림막(90m X 70m)을 이용한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 체인지 더 월(Change the Wall) 캠페인과 연계한 콘텐츠인데, 도시 경관을 해칠 수 있는 대형빌딩 공사 현장 가림막을 미디어 캔버스로 활용한 역발상이 돋보였다.
주요 콘텐츠는 세종의 하늘, 새로운 빛을 입다라는 주제로, <세종의 상상, 우리만의 시간과 공간을 여는 빛의 탄생>, <광장 속의 시간 그리고 우리 창의의 시대>, <함께 바라보는 광화문 여민락, 함께 즐기다> 등 3부작으로 이루어졌다. 광화문광장이 새로 개방되면서 시민이 중심이 되어 모두 함께 광장을 즐기는 모습을 미디어아트로 표현했는데, 입체적인 라이트 쇼 외에도 미디어 체험존 덕에 축제가 더욱 풍성했다. 올해 마지막 날인 31일에는 2023년 계묘년 새해를 맞는 시민들의 신년 희망 메시지를 끝으로 축제의 막을 내렸다.
이번 서울라이트 광화는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적 공간인 광화문광장 일대를 미디어아트의 랜드마크로 조성하고자 서울시가 준비한 첫 신호탄이다. 근처 청계천에서 열리는 청계천의 빛 축제와 함께 빛을 통한 감성 도시 서울을 알리는 새로운 콘텐츠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래의 빛, 도시의 내일을 그리다
서울 동쪽의 랜드마크이자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는 주목할 만한 또 다른 빛이 시선을 끌었다. 바로 2022 서울라이트 DDP다. 2019년 첫선을 보인 후 매년 1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는 서울의 대표적인 빛 이벤트다. 매일 밤 DDP 서쪽 외벽 전체가 빛의 캔버스로 새로 변신했는데, 길이만 무려 222m에 이르는 초대형 미디어아트 프로젝트답게 국내 최대의 규모였다. 장면 장면마다 비정형의 무대가 살아 숨 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지난해 주제는 무한함의 경계를 넘어선 우주적 삶(Designing Life at the Universe)이었다. 도심에 착륙한 우주선으로 비유되는 DDP의 외관적 형태를 모티프로 2022 서울라이트 DDP는 우주적 삶을 상상하며 떠나는 여정을 담아냈다. 주제에 걸맞게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기법의 라이트 쇼를 선보였다.
2023년 첫날까지 이어진 전시명은 <DDP 우주와의 만남, Rendez-Vous(랑데-부)>. Rendez-vous는 프랑스어로 만남을 뜻하지만, 항공우주 용어로서는 우주를 유영하는 두 물체가 만나는 행위에 대한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국내 미디어 아티스트 3인의 작품이 DDP를 채운 빛을 통해 시민들을 우주와의 만남의 장으로 이끌었다. 이들의 작품은 우주의 컬러풀하고 다채로운 비주얼을 표현하거나 관객이 우주 비행사가 되어 미지의 블랙홀, 행성, 성운 등을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연출하거나, 우주 먼 곳에 사는 여러 행성 친구를 찾아 떠난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DDP가 꾸민 이번 작품은 우주를 도달 가능한 공간으로 재인식하게 만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DDP를 찾은 시민들은 축제 기간 기아자동차와의 협업 프로젝트 <서울라이트X기아(KIA) : Opposites United>와 크리스마스 행사 <함께이기에 외롭지 않은 크리스마스>도 볼 수 있어 더 풍성한 빛의 세계를 즐길 수 있었다. 이처럼 서울라이트는 우주라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을 경계 없는 상상력으로 제시했으며,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만남의 광장이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한 선들이 동시에 교차하는 DDP에서 잊지 못할 빛의 만남을 성공시켰다.
영국의 콜린스 사전은 2022년 올해의 단어로 Permacrisis를 선정했다. Permanent와 Crisis의 합성어인 이 단어는 기후변화와 전쟁, 인플레이션 등 각종 위기에 직면한 인류의 현재 상황이 안타깝게도 일시적이 아닌 항구적 위기라는 의미다. 동시에 Permacrisis는 장기간의 불황과 불안정을 경고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녹록지 않은 현실이지만, 새해를 시작하는 지금만큼은 희망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판타지의 빛이 지친 일상에 새로운 힘을 공급하는 꿀잠처럼 반짝이고, 희망의 빛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단 믿음으로 빛나길, 또 미래의 빛이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이들의 발걸음을 환하게 비춰 주길 기대해 본다. 잔뜩 웅크렸다가 뛰어오르는 토끼처럼 모두가 한껏 희망을 향해 도약하는 2023년이 되기를 바란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