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와 신뢰, 영감을 파는
해외 독립서점 세 곳
“독립서점들은 컴퓨터 스크린을 넘어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찾았다. 이 독자들은 책을 입체적으로 경험하고 싶어 하며, 익명의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것보다 촉감을 통해 직접 책을 고르고 싶어 한다.”
Oren Teicher, 미국서적상협회장(American Booksellers Association CEO)
전자책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달마다 서점에 들려 수 권의 종이책을 산다. 아니, 오히려 전자책이 등장하기 이전보다 더 많은 종이책을 찾고 있다. 마치 디지털에 반격하는 아날로그의 정통성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각종 멤버십 혜택과 함께 하루 만에 집 앞까지 책을 대령하는 대형 서점의 모바일 주문의 편의성을 포기하고 가끔은 독립 서점으로 향한다. 그곳의 공간, 사람, 문화, 가치를 경험하며 얻는 즐거움으로 그 날 사는 책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복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 스토리를 만들고’, ‘사람으로 신뢰를 만들며’, ‘예술을 가져와 영감을 만드는’ 세 곳의 해외 독립 서점이 이 글의 주제다. 인터넷으로 이곳들을 우연히 발견한 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라면 책을 사는 일이 좀 더 의미있어질까?
A. Meet People, Make Story. McNally Jackson
B. Get People, Make Trust. One Grand Bookstore
C. Connect Art, Make Insight. Yvon Lambert
A. McNally Jackson in manhattan
meet people, make story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만들다
“책방은 사람을 모이게 합니다. 이 책 저 책 읽을 수 있습니다. 생각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책방에서 사람들은 창조의 과정을 체험합니다.”
– Sarah McNally, McNally Jackson CEO
활자와 출판의 도시 맨해튼에 자리한 맥널리 잭슨(McNally Jackson)은 사라 맥널리(Sarah McNally)가 자신의 열 살배기 아들의 이름을 따 지은 서점이다. 캐나다 서점주의 딸이었던 맥널리는 책이 갖는 진정한 의미와 가치보다 유통사의 이익 챙기기에 급급한 미디어의 브로커화에 반기를 든다. 또한, 미국의 책시장을 점령한 아마존에 대항하기 위해 사라는 그들이 제시할 수 없는 문화와 사람을 가진 독립 서점을 구상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맥널리 잭슨은 출판사가 독자와 만나는 채널이자, 독자, 저자, 편집자, 지식인, 시민 모두가 모여 새로운 문화 흐름과 연대를 형성하는 열린 공간이다. 저자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행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좀 더 본격적인 담론을 끌어낼 수 있는 상호적 이벤트가 맥널리 잭슨의 주요 콘텐츠다. 물론 세계적인 신예 작가를 초청하기도 하지만, 독서 토론회를 비롯한 세계문학의 밤, 시의 밤, 인문/사회학 토론, 북클럽 등 독자의 참여 비중이 높은 이벤트에 패널을 초대한다. 혹은 사라 맥널리 본인이 행사를 이끌며 보다 심도 있는 담론을 끌어낸다.
한 달간 일요일을 제외한 모든 날짜에 빼곡히 채워진 이벤트를 서점에서만 진행하기엔 무리일 것. 서점 내 숍인숍 형태로 입점한 카페는 스텀프타운(Stumptown)의 커피를 마시며 구매하지 않은 서점의 책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동시에 행사와 국제 문학 북클럽 및 스페인 책 연구 클럽을 소화해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으레 당대의 지식인들이 아지트에 모여 담론을 나누듯, 책을 사랑하는 모든 이가 맥널리 잭슨의 카페에 모여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며 그들만의 이야기와 문학 세계를 키워나간다.
모두에게 열린 맥널리 잭슨은 모두가 작가가 되는 방법도 알려준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순식간에 들이키는 것처럼, 에스프레소 북 머신으로 방문객이 가져온 텍스트 PDF 파일을 10분 안에 디자인 및 편집 과정을 거쳐 소량의 책으로 제본해주는 POD(Publish On Demand) 서비스를 제공한다. 직접 쓴 글을 인쇄하거나, 저작권 없는 고전을 본인이 원하는 대로 골라 나만의 고전 시리즈를 만들 수도 있다. 매대에 꽂힌 책의 저자뿐 아니라 서점을 찾아온 누구나 작가가 되는 셈이다.
B. One Grand bookstore in New York
get celeb, make trust
사람으로 신뢰를 만들다
“당신이 무인도에 떨어졌을 때 함께할 열 권의 책은?”
이 질문은 아웃(Out) 매거진 편집장이자 그랜드 에디토리얼(Grand Editorial)의 설립자인 애론 히클린(Aaron Hicklin)이 똑똑한 지성인, 특별한 사상가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대답은 애론 히클린이 점주인 원 그랜드(One Grand) 서점에서 판매되는 큐레이션이자 이 작은 독립서점의 정체성이다.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 원 그랜드의 큐레이터가 되는 이들의 선정 기준은 무엇일까. 자격은 유명도와 무관하다. 단지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자신의 분야에서 끝없이 노력하고, 그 노력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의 발전과 혁신을 일으킨 점이다. 큐레이터들의 직업 스펙트럼도 매우 넓다. 배우, 감독, 작가, 예술가, 요리사, 철학가, 디자이너, 방송인, TV 스타, 정치인, 운동선수, 음악가 등이다. 히클린은 맥널리 잭슨처럼, 거대한 아마존 머천다이징이 손 뻗을 수 없는 요소를 제시한다. 신뢰할 수 있는 퍼스널리티 기반의 큐레이션으로 영감을 파는 작은 서점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Bill Gates),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배우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 에미상과 그래미상을 연거푸 수상한 케이시 그리핀(Kathy Griffin), 배우 겸 프로듀서 레나 던햄(Lena Dunham), 맨부커 수상가 앨런 홀링허스트(Alan Hollinghurst), 저명한 프린스턴 문예 창작 교수 에드먼드 화이트(Edmond White) 등의 이름이 달린 나무 책장엔 이들이 선정한 열 권의 책이 불규칙적으로 정리되어있다. 2주에 한 번씩 새 큐레이션이 등장하고, 지난 큐레이션은 모두 아카이빙되어 웹에서도 리스트를 볼 수 있다.
지금의 원 그랜드를 만든 히클린도 물론 큐레이션을 갖고 있다. 그가 무인도에 함께 불시착하고 싶다는 열 권을 살펴보자.
1. Tess of the D’Urbervilles – Thomas Hardy
2. Another Country – James Baldwin
3. It This Is a Man – Primo Levi
4. Watership Down – Richard Adams
5. 수필집(A Collections of Essays – George Orwell
6. The Long-Winded lady: Notes from The New Yorker – Maeve Brennan
7. A Handful of Dust – Evelyn Waugh
8. Eastern Approaches – Fitzroy Maclean
9. The Line of Beauty – Alan Hollinghurst
10. The Secret History – Donna Tartt
C. Yvon Lambert in Paris
connect art, make insight
예술을 가져와 영감을 만드는 곳
파리는 아름답고 고혹적인 서점이 많은 도시다. 그중에서도 서점에 예술을 결합해 새로운 영감과 파급력을 만들어내는 독보적인 사례로 이봉 랑베르(Yvon Lambert) 서점을 꼽을 수 있다. 감각적인 컬렉터이자 아트 딜러로도 유명한 미술계 인사 이봉 랑베르는 1966년 파리에 그의 첫 갤러리를 열고 미국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하며 파리와 미국 예술계에 새로운 흐름을 가져왔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낸 골딘(Nan Goldin), 개념미술의 전설 로렌스 와이너(Lawrence Weiner), 가장 영향력있는 페미니스트 개념미술가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등 세계적인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했던 그의 독보적인 감각이 서점에 그대로 녹아있다. 그가 직접 선정한 예술 서적 큐레이션과 절판본 및 희귀본, 전시 카탈로그, 리미티드 에디션 포스터, CD와 DVD 및 다양한 예술 오브젝트로 채워진 이 독립 서점은 그야말로 예술∙출판∙문화계 종사자들에게 있어 소중한 영감의 금광이다.
랑베르는 책과 서점이라는 물리적 매체에 예술을 깊이 결합한다. 단순히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부터 길을 걷다 발견한 그림, 특별히 애정하는 작품까지, 다양한 예술 작품을 서점에 전시한다. 때로는 워홀이나 바스키아의 작품을, 때로는 한 명의 작가를 골라 특별전처럼 그의 작품으로만 서점을 장식한다. 갤러리보다 더욱 갤러리 같은 서점이다. 또한, 작가가 자신의 창작에 관해 쓴 텍스트를 모아 제작한 아티스트 북과 유명 예술 작가의 리미티드 에디션을 소개하는 월별 정기간행물 모두 이봉 랑베르 서점에서만 만날 수 있다. 이 출판물들은 전시와 판매 예술과 출판에 대한 일종의 장인정신이자 이봉 랑베르의 정체성이다.
모든 독자를 아우르며 매출 증가를 최우선 목표로 삼는 대형 서점과 달리, 독립 서점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문화의 허브를 이행한다. 맥널리 잭슨과 원 그랜드, 이봉 랑베르 모두 확고한 철학으로 문학과 예술이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관심을 넘어 생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문화적, 사회적, 전문적 연대감을 비롯한 영감을 준다.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책을 골라 그럴듯하게 전시하는 것은 팝업 스토어로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 하지만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에게 잊히기 십상이다. 스토리, 신뢰, 영감이 있는 큐레이션은 독자를 끌어오고, 그다음의 큐레이션을 원하게 만들며, 다양한 만남과 수많은 협업을 만들어낸다. 이런 특별한 큐레이션이야말로 성공적인 독립 서점 운영의 열쇠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