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는 수많은 공간이 있다. 카페나 꽃집 같은 작은 공간부터 학교나 경기장 같은 큰 공간까지, 제각각의 크기와 목적과 기능을 가진 공간들은 도시를 빼곡히 채운다. 극소수를 제외한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금자리, 집도 마찬가지다.
집은 도시를 이루는 아주 작은 단위이자 삶의 출발점이다. 개인 또는 한 가구의 무형의 삶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유형의 그릇이기도 하다. 가구원의 생활 구조∙형식∙행동에 따라 집의 모양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평형대에 따른 공간 구분은 비슷하더라도 개인의 삶과 가치, 개성과 욕망을 소비하는 라이프스타일이 다양해지면서 내부를 채우는 방식 또한 다양해졌다. 집 밖의 공간들이 잠시 머물며 시간을 보내는 대여의 성격이라면, 집과 동네는 [나의]라는 소유격이 자연스럽게 붙는 점유의 장소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사용자이자 관리자이며, 소유자이다.
내적으로 가장 편안하게 쉴 수 있으면서도 내 눈에 가장 만족스러운 외양으로 소품과 가구를 들이는 애착의 공간. 스스로 만들고, 치우고, 유지하며 인생의 조각을 성실하게 쌓아가는 공간. 집을 둘러싼 동네를 탐방하며 이웃, 골목, 상점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 이제는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외부에서 해결하던 것들을 집과 동네에서 소화하는 시기를 거치고 있다.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역할을 집과 동네에 기대하게 되는 지금, 다른 도시인들은 어떤 집의 모양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뒤늦게 독립해 단칸 월세방을 열심히 꾸려가는 1인 가구의 샘플 같은 도시인이다. 분야별 전문가와 도시 이야기를 나누는 <슬기로운 도시생활> 시즌 2의 두 번째 대화, “도시를 만들고 사람을 연결하는 집”에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장소는 도시의 공공 건축이 가진 문화와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서울도시건축센터였다. 평소 길을 거닐며 눈에 띄는 미감의 사적 건축물에 호기심을 가졌지만, 정작 관심있게 돌아본 공공 건축은 무엇이었는지 희미했다. 도시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은 장소는 도시를 이룬 공공 건축의 배경과 아카이브로 가득했다. 도시 건축의 일대를 집대성한 공간에서 집을 설계하는 건축가, 도시를 관찰하는 에디터, 동네 생태계를 디자인하는 사회적 기업가와 마주 앉아 짚어봤던 서울 주거문화의 지금을 나눠본다.
패널과의 본격 대화, 임태병∙박찬용∙신윤예
임태병 문도호제(文圖戶製) 건축사무소
“주거의 변화는 결국 사람들의 욕망과 맞물립니다.
욕망이 변하면 주거의 모습도 변할 수 있죠.
골목에 중간주거 두 개만 있어도 동네와의 접점과 거리의 풍경이 바뀝니다.
도시를 바꾸는 역할을 기대하며 이런 실험들을 하고 있어요.”
집과 동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첫 번째 패널은 건축가 임태병 님이었다. 그가 제안하고 실행한 중간주거는 신구세대의 각기 다른 주거 욕망의 교집합을 찾아 조율하는 새로운 주거 형태다. 한국 역사상 유일하게 자수성가할 수 있어 좋은 집을 장만했지만 관리와 활용을 어려워하는 베이비부머 세대, 그리고 주거에 관한 새로운 니즈가 왕성하지만 자본이 부족한 젊은 세대. 임태병 님은 두 세대의 생각과 고민을 한데 묶어 중간 영역이 있는 주거를 만들었다.
중간주거는 공간의 상황과 점유자에 따라 집의 일부를 유연하게 변화시킨다. 일반적인 주택에서 신발을 벗는 순간 타인의 사생활 침해를 느끼는 심리적 장애물이 없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전환점인 현관에서부터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가는 확장의 구조기 때문이다. 서재처럼 아주 사적인 공간을 제외한 주방∙식당∙미팅룸 등은 신발을 신고 돌아다닐 수 있는 타일을 깔아 영역을 구분했다. 거주자들은 상황에 따라 문을 닫고 개인적인 공간으로 사유하거나, 적재적소에 적당한 공간을 열어 외부인과 함께 공동으로 점유한다. 공간이 열려있을 때는 초대받은 특정인뿐 아니라 동네의 이웃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점에서 현관의 확장이자 거실의 확장이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중간주거가 실현될 수 있는 집과 자본을 맡겨 공급하고, 젊은 세대는 적극적으로 소비한다. 그 가운데에서 임태병 님은 건축가로서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중간주거의 변화가 거주자에게 녹아들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 중간주거 프로젝트, 풍년빌라
응암동에 있는 중간주거 풍년빌라에는 혈연은 아니지만 삶의 지향점이 같은 세 공동체가 모여 산다. 임태병 님의 가족, 싱글 삽화가, 그리고 방송작가 부부다. 이들이 조합을 만들어 땅과 건축주를 찾고, 건물의 내외부를 설계하고, 같이 살아가는 방식을 협의하는 모든 과정을 함께했다. 각각의 집은 현관을 중심으로 모든 거주자에게 개방할 수 있는 점유의 공간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신발을 신고 벗는 영역을 타일 바닥으로 구분했다. 한 집이 사용하는 두 개의 층은 상황에 따라 다른 가족과 겹쳐 쓴다. 모두가 쓰지만 누구도 관리하지 않는 푸드코트의 개념이 아닌, 집주인이라는 분명한 관리자가 유지한다는 점에서 보통의 공유 공간과 다르다. 실제로 사는 입장에서는 “집이지만 집이 아닌 것 같은 중간적인 공간이라 타인이 와도 서로 머무르는 데 훨씬 편안하다”고 한다. 거주자들이 공동 투자∙운영하는 1층 한쪽의 카페는 풍년빌라와 동네의 연결점이 되어 골목의 이야기를 담는다. 내부의 사람을 세심하게 보호하며 연결하고, 외부의 발길을 벽 없이 환영하는 풍년빌라는 중간주거로 바뀔 수 있는 거리의 풍경과 도시의 얼굴을 기대하게 만든다.
more info 풍년빌라 Harvest Mansion by brique magazine
박찬용 작가∙에디터
“멋있어 보이고 싶거나 남다른 주거 모델이 되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나의 기보, 그리고 그보다 더 절실한 상수와 여건들이 있어요.
맞춰 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지금의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임태병 님이 집의 설계부터 완공까지 가능했다면, 두 번째 패널인 박찬용 님은 정반대 지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를 위한 집을 짓는 꿈 같은 이상 대신, 적은 예산과 많은 기준을 들고 오프라인 부동산과 온라인 부동산 앱을 전전하며 집을 찾는 현실의 여느 평범한 도시인. 특히나 1인 가구 직장인은 집과 동네를 찾을 때 회사와의 거리, 연봉으로 가능한 전세대출금의 액수, 혼자 살아도 걱정 없는 보안 등 고려할 조건이 수두룩하다. 직장인인 박찬용 님 역시 여러 조건을 꼽아가며 서울 지도를 펼쳐놓고 최선의 선택지를 찾았다. 정해진 예산, 강남권 출퇴근, 야근이라는 상수, 녹지의 간절함, 저렴한 물가, 잘 갖춰진 편의시설, 도서관∙수산시장∙주차공간의 유무 등 슬프도록 현실적인 그의 주거 조건은 많은 도시인이 쉽게 공감할 법한 요소다.
어렵게 찾은 집을 꾸밀 차례. 박찬용 님은 남들이 꼭 갖추고 사는 품목도 그의 도시생활과 상관없다면 굳이, 혹은 당장 들이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조명을 발견할 때까지 등 없는 방에서 자연광에 의지하며 일여 년을 보냈다. 냉장고를 사는 대신 편의점과 식당에 식생활을 ‘아웃소싱’하며 매 끼니를 해결했다. 성수동과 쌍문동부터 영국과 스위스의 벼룩시장까지, 눈에 번쩍 들어오는 물건만 있다면 어디서 어떻게든 공수해 집에 들여놓았다. 어쩔 도리 없이 주어진 환경에 성실히 적응하는 한편, 원하는 것을 포기 않는 뚝심의 고집이 보인다. 박찬용 님의 주거문화는 유별나게 멋지거나 남다르지 않다. 하지만 도시를 살아가는 누구나 긍정할 수밖에 없는 구석이 있었다. 주거의 이상론을 펼치기 어려운 서울살이에서 우리는 얼마나 현실에 타협하고, 또 얼마나 욕망을 실현할 수 있을까. 그의 이야기에서 현실을 차근차근 실현해내는 보통의 이웃이 만드는 서울 주거문화의 한 조각을 발견했다.
> 박찬용 님의 저서, 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멋지고 좋은 각종 최신품에 둘러싸여 일하는 잡지 에디터. 으레 도회적인 세련미가 떠오른다. 하지만 <슬기로운 도시생활>에서 들었듯이, 십여 년을 잡지계에서 보냈던 박찬용 님의 주거문화에는 의외로 세속적인 화려함보다 확고한 기호가 있었다. 그의 저서인 「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또한 번화하지 않지만 확고한 서울의 면면을 담았다. 이 책은 박찬용 님이 잡지 에디터로서 갈고 닦은 예민한 관찰력과 탐구력으로 동네 곳곳의 사람, 골목, 공간을 넘어 태도와 문화를 세밀하게 풀어낸 도시생활 그 자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도시를 움직이고 있는 우리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라는 책 소개 문장은 거대한 도시에서 아주 작은 집 하나를 꾸리며 살고 있는 우리 또한 이 도시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가 도시의 주거문화에 관해 쓴 책이 곧 출간 예정이라고 한다. <슬기로운 도시생활>에서 못다 들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신간 소식을 기다려본다.
신윤예 공공공간(000간)
“한동네 안에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게 중요해요.
같이 일하는 순간 ‘우리가 이 일로 미래까지 함께 먹고 살 수 있어!’라는 신뢰가 생기죠.
제가 이렇게 동네에서 살고, 일하고, 같이 관계를 만들어 온 중심이에요.”
창신동 골목의 사람들과 함께 지속가능한 동네 생태계를 만든 사회적 기업가 신윤예 님은 창신동에서 6년째 살고 있다. 그가 처음 발견한 창신동의 모습은 아기자기한 골목, 오래된 성곽, 그리고 수많은 주택 사이로 흩뿌려진 크고 작은 봉제공장들이었다. 창신동 곳곳에 발에 치일 정도로 흔한 100L 쓰레기봉투에는 봉제공장에서 나온 자투리 천이 꾹꾹 눌러 담겨있다. 동네의 폐기물 문제를 업사이클링 디자인으로 해결할 좋은 재료였다. 신윤예 님은 수거한 쓰레기를 충전재 삼아 쿠션과 빈백으로 만들며 봉제공장 사람들과 동업자가 됐다. 창신동은 동네에서 살며 일하는 주민이 많다. 이 골목 사람이 저 골목 사람을 알고, 다른 주민의 도움을 소개받는 일도 친숙하다. 그가 연고 없는 동네에서 빠른 네트워크와 끈끈한 연대를 만들 수 있던 배경이다.
이들과 함께 고민할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국내 의류 제조업의 쇠락은 더이상 창신동에 일감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골치였던 자투리 천도 줄었다. 창신동의 일을 만들어야 동네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삶이 이어질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창신동에서 구르고 활동하며 쌓아온 경험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1인 창작가들이 창신동의 제조 클러스터에 쉽게 진입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동네 생산 플랫폼을 실험 중이다. 여느 동네의 주민 1인으로 단순히 먹고 자며 사는 보통의 삶이 있다. 하지만 신윤예 님은 동네에 미칠 수 있는 영향, 동네 공동체와 생각을 교환하고 공생하는 창신동 사람의 삶을 택했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같은 환경을 살아가는 도시인으로서 함께 주도적으로 동네를 살겠다는 생각. 모든 동네 사람과 교류할 필요는 없지만, 작은 그룹이라도 연결점을 만들어 새로운 선을 만드는 것. 신윤예 님과 살아가는 창신동 사람들의 도시생활 배경은 생태계가 있는 주거문화다.
>창신동 프로젝트, 거리의 이름들
요즘 간판 없는 카페가 유행이라지만, 그건 그곳이 간판 대신 SNS 채널을 세련되게 가꿔 홍보하기에 가능한 흐름이다. 창신동의 작고 오래된 봉제공장 중 대다수는 오래전부터 간판이 없었다. 전화 한 통에 수주가 오가는 단골 관계로도 잘 운영해왔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고 외부 거래처가 진입을 원하는 시점에, 연세 지긋하신 공장주들이 간판 없는 힙한 카페처럼 SNS 채널을 개설해 공장 정보를 홍보하기란 무리였다. 신윤예 님의 기업 공공공간이 창신길 647번지 일대 봉제공장 54곳의 간판을 만들게 된 출발점이다. 공장주와 간판을 기획하며 이들의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고, 동네의 청소년들과 함께 간판 실물을 제작해 설치했다. 간판을 받는 조건은 공장주의 재능 기부다. 간판을 선물 받은 공장주는 공공공간의 신제품 샘플을 제작해주거나, 창신동을 견학 온 아이들에게 봉제 공정을 설명하며 새로운 연결고리를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창신동 사람들이 하나 되어 창신동을 위해 만든 간판 프로젝트는 동네에 만남을 엮는 확장의 주거문화를 보여준다.
more info 거리의 이름들 by 공공공간
모든 도시인은 집이라는 정해진 공간에서 각자의 삶을 건축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무형의 주거문화 건축인이다. 직접 지은 집에서 제3의 공동체와 함께 살며 동네와의 연결을 만드는 임태병 님의 접점 건축은 이상적이었다. 골목의 커다란 표정이 바뀌기 전에, 그곳 거주민과 주변 이웃의 작은 표정부터 행복하게 바뀌는 모습이 상상된다. 멋진 이야기지만 여건상 모두가 동승할 수 없는 주거문화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서울에서 사는 1인 가구인 박찬용 님의 정직한 대응 건축은 반가운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또한 집 밖의 골목과 동네를 플랫폼 삼아 관계의 영역을 확장한 신윤예 님의 공생 건축은 서울에서도 다양한 동네 생태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러한 삶의 건축물이 모여 거리를, 동네를, 그리고 도시를 만든다. 이날 8명의 참여자와 나눴던 8개의 삶 외에도 수많은 삶과 주거문화가 서울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 건축과 기술의 발자취를 기록하고 보존하듯 도시생활의 발자취도 기록하고 공유한다면 도시인이 서로를 더 유연하고 넓은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도시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태도의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다. 도시생활의 영감과 가치를 대화로 나누는 <슬기로운 도시생활>의 시즌 3는 어떤 주제가 될지, 한결같이 문을 열고 도시인을 기다리는 서울도시건축센터의 겨울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