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라지고 달라지는 일의 공간,
적응과 성공의 열쇠는 무엇일까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 11월 4일, 마지막 <슬기로운 도시생활>의 시즌이 열린 서울도시건축센터는 곳곳에 심어진 나무들의 단풍으로 가을의 정취에 휩싸여 있었다. 센터가 위치한 돈의문박물관마을의 광장에도 매일 오후마다 음악, 기악,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의 6팀이 펼치는 돈의문 가을음악회로 계절의 정감이 가득했다. 바로 이곳에서 도시 공간의 문화와 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도시 속 사람을 잇는 대화 살롱 <슬기로운 도시생활> 시즌 3의 첫 번째 대화가 열렸다. “변화의 시대, 다시 디자인하는 워크라이프”라는 주제는 변화와 적응에 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
“모두에게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합니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나도 빠르고, 그 폭도 넓으니까요.
계속되는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 일해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전통적인 일의 형태가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는 오늘날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무언의 긍정이었다. 베이커리 Victoria Bakery 대표 김경진 님, 건축사무소 서로아키텍츠 대표 김정임 님, 브랜딩 기획자∙디자이너 한지인 님으로 구성된 3명의 패널, 그리고 5명의 밍글러가 대화에 참여했다. 김경진 님의 확고한 취향이 선명하게 보이는 빅토리아 베이커리의 케익과 함께 밝은 분위기로 시작됐지만, 고민의 무게감만큼은 뚜렷했다.
일하는 공간, 오피스
가장 먼저 화두로 떠오른 것은 원격근무제였다. 산업혁명 이후 오피스의 근무 형태는 완전 개방형에서 70~80년대 파티션으로 대변되는 부서 및 개인별 구분형으로 변화했다가 2000년대 들어 다시금 개방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스마트폰과 각종 첨단 기기들이 등장한 최근부터는 원격근무가 떠오르고 있다. 물론 불가피하게 비대면을 강제한 코로나19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대규모 오피스 프로젝트를 맡아온 김정임 님은 미래의 오피스가 나아갈 방향으로 축소화∙다핵화∙분포화를 짚었다. 각기 다른 지역에 떨어져 근무하더라도 결국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동료와 협업자에게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화상회의 시스템 등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무경계의 네트워킹 오피스가 분포화되는 미래를 김정임 님을 통해 상상할 수 있었다.
양날의 검과 같은 자율성을 두고 장단점이 쏟아졌고, 기존보다 높은 효율을 기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과 아직은 모두에게 알맞은 근무 형태가 아니라는 부정적인 의견이 함께 나왔다. 직종별로 원격근무제를 바라보는 차이도 드러났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적응해 나가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가 같은 입장을 나타냈다. 전에 없던 형태의 근무에 노동자와 회사 모두 적응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신뢰에 기반한 시스템을 구축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뤄져야하는 점 또한 마찬가지다.
나아가 원격근무를 상황에 맞게 활용해 실용성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회사와 노동자의 교집합을 찾고 최적의 근무 형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노동자 개인이 스스로에게 맞는 일의 방식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설득력을 얻었다.
개인의 이슈, 일하는 태도
사회적 이슈로 시작된 대화는 자연스레 개인의 이슈로 옮아갔다. 급격한 시대 변화와 코로나19라는 복병을 만나 각자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이야기였다. 개인적인 신변의 어려움과 불확실한 사회적 환경에서 부각되는 불안감, 그리고 비현실 같은 현실을 인식하는 방법은 제각각이었지만 고민의 크기와 지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쁜 경험을 보편화하는 대신 좋은 경험과 안전한 기분을 태도의 기본값으로 삼는 한지인 님, 나다움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견하는 트레이닝으로 일의 중심을 잡는 김경진 님의 이야기는 개인이 구성하는 워크라이프의 접근 방식에 영감을 전했다.
일하는 모든 이들이 고민하는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거론됐다. 저마다 자신의 소득에 대한 고민, 언제부터인가 계속해서 화두가 되는 일과 삶의 균형, 일상에서의 각종 소비, 최근 조금씩 움트고 있는 기본소득까지 다양한 테마로 대화가 이어졌다. 취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날 대화는 절정에 이르렀다. 단순한 기호를 넘어 일과 휴식, 주거, 여행 등 다양한 분야의 취향이 총망라됐다. 각자 다른 취향을 갖고 있으면서도 타인의 취향과 다양성을 함께 인정하고, 이를 독립적으로 즐기면서도 때로는 향유할 수 있는 지점을 고민했다.
도시인의 일상, 사회를 넘어 도시생활의 핵심인 워크라이프에 관한 이야기로 마지막 시즌의 문을 연 <슬기로운 도시생활>. 이날 2시간 동안 참석자들의 대화는 높고 낮은 밀도를 오가며 숨 가쁘게 진행됐고, 수많은 담론과 고민을 쌓아둔 채 막을 내렸다.
누군가에게는 스스로를 정리하는 시간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공감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각기 다른 연령대의 참여자가 모였지만 같은 일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한편, 다른 이들의 방식을 거울삼아 자신을 성찰하는 이도 있었다. 빠르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를 감히 재단하고 해답을 찾아내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쉼표든 숨표든, 느낌표든 물음표든 모두들 각자가 한 개씩의 점을 찍을 수 있던 대화의 자리였다.
늘 그랬듯이 답을 찾을 것이란 거창한 각오보다는 기분 좋은 열린 결말이 때로는 사람을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결말을 함께 열어보는 대화, 각자의 삶과 세계를 교류하는 장은 도시의 지금과 미래를 선명하게 담는 제3의 공간으로 자리할 것이다. 바로 이 대화가 오갔던 서울도시건축센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