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도시의 불빛은

쉽게 꺼지지 않는 법

일상을 충분히 그리고 충실히 보냈다면 이제는 비일상을 만끽할 차례. 꼼짝 못할 정도로 사람이 가득한 지하철과 늦은 밤까지 환한 빌딩 숲을 지나 우리는 각자만의 즐거운 도시를 찾아 나선다. 일상의 한편엔 활기를 충전할 비일상의 시간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저 유행만 숨 가쁘게 따라가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된다. 문득 나의 도시뿐만 아니라 당신의 도시와 우리의 도시, 그리고 그 도시를 만드는 플레이어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도시의 즐거움은 무엇을 향해 흘러가고 있는 걸까.

날 선 찬바람에 코 끝이 빨개지던 11월의 어느 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울도시건축센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슬기로운 도시생활> 시즌 3의 마지막 대화 “이상과 현실을 잇는 즐거운 나의 도시”를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서둘러 달려오느라 숨이 찼지만 고민의 해답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스레 설렜다. 패널로는 월간 <디자인>의 편집장 전은경 님과 콘텐츠 브랜드 TMI.FM 대표 차우진 님,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OTD Corporation의 대표 손창현 님이 함께했고,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밍글러가 둘러앉아 즐거운 도시에 관한 생각과 고민을 나누었다.

 

 

재미있는 곳, 도시

 

 

“주인공이 나라서 그래요. 과거에는 동경할만한 대상을 찾고 좋아하는 것에서 그쳤다면 지금은 달라요. 인플루언서를 좋아하는 건 똑같지만, 주인공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죠. 소비 패턴과 노는 문화도 그런 생각에 맞춰 달라지고 있고요. 자기표현 폭발의 시대예요.” 

– 월간 <디자인> 편집장 전은경

확실히 서울은 무척 재밌어졌다. 다양한 전시와 새로운 공간, 흥미로운 이벤트들이 끝도 없이 열리고 막을 내린다. 덩달아 도시를 즐기는 사람들의 수준도 높아졌고 각자만의 슬기로운 도시생활 이용법을 갖고 있다. “옛날에는 카페에 빈티지 가구 하나만 놔둬도 센스있다고 여겨졌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대중들은 넓어진 시야를 통해 조금 더 감각 있는 디자인에 니즈를 드러내죠.” 전은경 님이 말했다. “저는 그런 대중과 공간을 만드는 기획자들, 도시 개발자나 디벨로퍼들의 힘 덕분에 도시가 이렇게 즐거워졌다고 생각해요.”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하면서 공간 소재의 콘텐츠가 많은 관심을 얻고, 이 관심은 자연스레 공간을 디자인한 사람에게로 향한다.

 

사람들의 생각과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따라 공간의 의미도 출렁인다. “호텔을 예로 들 수 있어요. 최근에는 야외수영장이 있는 호텔의 투숙률이 굉장히 높죠.” 차우진 님의 말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여졌다. 한여름의 무더위가 밀려올 때마다 인스타그램을 가득 채운 호텔 야외수영장 피드를 떠올렸으니까. 밀레니얼(Millenials)과 Z세대를 아울러 부르는 MZ 세대는 보이는 것에 익숙하다. SNS를 활용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거침없고 다양한 경험의 후기를 남긴다. 내가 주인공인 세상이라는 전은경 님의 말처럼, 내가 재밌어야 즐거운 도시가 될 수 있다.

 

 

공간과 장소의 의미

 

 

“공간과 장소는 같은 말이 아니에요. 공간(空間)이 비어있는 의미라면 장소(場所)는 무언가 일이 벌어지는 곳이죠. 도시는 장소성의 개념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간이더라도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하고 즐거운 장소일 수 있어요. 그런 차이에서 도시가 구성되고 이벤트가 벌어지죠. 위기도 물론이고요.” 

– 콘텐츠 빌드업 브랜드 TMI.FM 대표 차우진

좋아해야 하는 문화가 선택되던 때가 있었다. 선택받지 못한 문화는 자연스레 비주류로 여겨졌고, 전문가 또는 지식인이 추천하는 것들이 우리가 사는 공간을 가득 채웠었다. 그러나 도시는 달랐다. 단지 비어있는 공간의 의미가 아닌, 살아가는 이들의 이벤트로 채워지는 장소였기에 즐기는 사람이 도시의 중심으로 설 수 있었다. 취향이 스민 공간은 장소로 탈바꿈했고 도시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차우진 님은 사회학자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의 말을 빌려 대중이 아닌 사용자로서의 우리를 설명했다. “파리는 계획도시였어요. 평민 계급을 원활하게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죠. 하지만 그들은 통제하는 방식대로 움직이지 않았어요.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걷고 도시의 골목을 만들었죠. 걷는다는 건 아무것도 아닌 본능적 행위처럼 보여도 사실은 아주 능동적이고 저항적인 행동이에요. 그들의 발걸음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창의적인 개성을 보여줬으니까요. 도시의 사용자가 된 거예요.” 그의 말처럼 도시의 힘은 어떤 강압적인 통제나 시스템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발걸음에서 비롯된다.

 

취향의 다양성이 존중되고 대중의 눈이 높아지면서 좋아하는 수준에서의 차이는 크게 드러나지 않게 됐다. 차우진 님은 그보다 성큼 다가온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지적한다. “취향은 상향 평준화라고 표현할 정도로 달라졌지만, 이제는 오히려 공간에서 격차가 드러날 거예요.” 코로나-19 이전의 서울은 누구나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보기 좋은 디자인을 맘껏 누릴 수 있었다면, 코로나-19 이후로 달라졌다. 개개인은 공간의 안전함과 각종 이벤트, 그 안에 녹아있는 취향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크고 작은 비용을 지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과 차, 편리한 도시 상권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 뒤에는 발 디딜 공간 하나 마련하기 쉽지 않은 이들이 있다. 도시 공간의 점유는 적지 않은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에 확보된 공간 안에서 구성되는 취향에는 당연히 저마다의 격차가 드러나게 된다. 지금의 취향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라면, 앞으로의 취향은 공간을 차지할 수 있는 비용을 가졌는지의 여부에 따라 표현될지도 모른다.

 

 

변화를 마주하는 자세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배타적인 분위기예요. 공간을 공유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던 도시가 이제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된 거죠. 앞으로의 공간 기획이나 디자인의 방향도 매우 달라질 텐데, 어떻게 다시 도시를 관계 맺는 장소로 만들지는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라고 생각해요.” 

–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OTD Corporation 대표 손창현

우리는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상을 마주하고 있다.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코로나-19는 개인의 하루를 바꾸고 도시의 미래를 좌우한다. 사람이 찾지 않던 공간을 리테일 콘텐츠 요소의 결합으로 탈바꿈하던 손창현 님의 고민도 깊어졌다. “다양한 사람들이 공간을 공유하면서 즐기길 바랐어요. 공간 일부의 밀도를 높이면 다른 쪽에는 여유가 생기니까 그곳에 이벤트를 만드는 거죠.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더 이상 가까워지려고 하지 않아요. 이제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예전으로의 회복도 바랄 수 없어요. 라이프스타일이 변하는 거예요.”

 

전염병은 사람 간의 계산적인 거리와 배타심을 불러왔다. 무질서 속의 질서처럼, 자연스러운 도시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이다. 서로가 살결을 부딪히고 끊임없이 마주하는 자생적인 도시 생태계를 원했던 과거와 달리, 현재의 답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어렵다. “원래 사옥은 회장님만을 위한 공간이었어요. 지상의 좋은 공간은 높은 분들에게만 내어줬던 거죠. 하지만 현대의 사옥들은 오히려 로비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리고, 지상의 공간은 누구나 이용하도록 만들었어요. 다양한 숍들이 들어서고, 미식을 즐기는 공간이 됐죠. 그런데 지금은 다시 꽁꽁 막아뒀어요. 참 아쉬워요.”

 

그러나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비가시적인 위험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곁의 사람과 가깝길 바라고, 새로운 관계의 흥미도 내재한다. 전은경 님은 말한다. “규칙은 계속 바뀐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규칙에 유연하게 대처해야죠. 라이프스타일은 고정적이지 않으니까요.”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김준섭 님도 거든다. “도시는 평등해요. 모두에게 열려있고 밤에도 밝게 빛나거든요. 코로나19로 심각한 위기가 찾아온 건 분명하지만, 누구도 도시를 등지고 살아갈 순 없어요.” 이동과 만남이 제한된 상황에서 무작정 낙관적인 말을 읊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의 도시는 변하는 중이다. 사람을 만나거나 일하는 방식도, 집이라는 공간의 인식도 모두 달라지고 있다. 익숙했던 생활 방식에 매달리며 안주하기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변화를 맞이한다면 이상과 현실을 잇는, 각자의 즐거운 도시가 완성되지 않을까.

 

 

패널의 ‘슬기로운’ 도시생활 안내서

월간 <디자인> ‘100개의 숍, 100가지 디자인’ vol. 508 (2020년 10월호)

 

전은경 편집장의 월간 <디자인>은 1976년부터 디자인의 지금과 미래를 아카이브하는 일종의 도시안내서다. 508호에서는 도시인들이 찾는 전국의 공간 100개와 함께 각 공간별 기획자∙운영자∙디자이너의 크리에이티브한 생각을 소개한다. 비록 실제 공간을 하나하나 찾아가기 쉽지 않은 시기이지만 공간과 생각을 향유하는 지면의 끝에 다다른 순간, 생동감과 아름다움이 있는 도시생활의 나침반을 쥐어든 느낌으로 마지막 장을 덮게 될 것이다.

그 어떤 단어로도 불안함과 급격한 변화의 벽을 넘을 수 없던 2020년. 6월을 시작으로 6회에 걸쳐 36명의 도시인을 이어온 <슬기로운 도시생활>이 한 해의 끝에 막을 내렸다. 이토록 어려운 격변의 시기에 우리가 필요한 것은 현실성 없는 모범 답안의 학습이 아닌, 지금 우리가 함께 보내는 시간을 공유하고 기록해 만드는 연대와 공감의 장이다. 서울시도시공간개선단의 서울도시건축센터는 <슬기로운 도시생활>을 통해 이러한 장을 마련하고 도시 속 사람을 연결했다. 어려운 시기에 모두가 격차 없이 누릴 수 있는 제3의 장소로 한 걸음 더 가까워진 셈이다.

 

<슬기로운 도시생활>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지만, 도시에 관한 우리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공유보단 경계의 가치가 우선하는 현재는, 색다른 즐거움을 구상하거나 조금 더 나아진 도시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우리에게 큰 안심을 안겨준다. 도시는 자유롭고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는 점. 나와 우리의 도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얼마만큼의 생명력을 불어넣을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스스로가 결정한다. 밤이 깊어가는 지금도, 내일도 그리고 그 후의 시간에도 도시의 불빛은 쉽게 꺼지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