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우리는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이 결합된 4차원 시공간을 2차원상으로 보며 살고 있다. 이는 뇌가 두 눈으로 바라본 장면을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양쪽 눈으로 다르게 바라본 2차원상을 분석한 뇌가 3차원 공간을 인식하고, 그 3차원 공간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게 된다. 주소라는 체계의 역할은 이러한 3차원 공간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내가 아닌 다른 사람도 그 공간을 찾아갈 수 있게끔 돕는다.

그러나 위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지번 주소와 도로명 주소만으로 본인이 공유하려는 위치를 정확히 표현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를 극복하고자 생겨난 것이 바로 W3W(What3words) 표기법이다. W3W는 지구상의 모든 위치를 3m×3m로 나눈 뒤 3개의 단어를 이용해 고유 코드를 부여한 지리 코드 시스템이다. 이를 이용하면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23길 30-5라는 도로명 주소로만 표기할 수 있던 곳(프럼에이)을 ///국제.일행.휴일, ///갈색.색소.도전 등 50개가 넘는 W3W 코드로 나누어 표기할 수 있다.

 

W3W는 라이브 공연을 기획하던 영국의 크리스 셸드릭(Chris Sheldrick)이 GPS 좌표만큼 정확하게 공연장 입구나 음향 장비의 배송 위치 등을 더 쉽게 설명할 방법을 고민하면서 시작되었다. 셸드릭은 2013년에 모한 게인셀링검(Mohan Ganesalingam), 그리고 잭 웨일리-코헨(Jack Waley-Cohen)과 함께 스타트업을 시작했으며 UN, 에어비앤비, 메르세데스벤츠와 같은 글로벌 국제기구 및 기업들과 기술 제휴를 맺으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지난 2019년 W3W와 카카오맵이 제휴를 맺으며 한국어 버전이 출시되었는데, 한국어학자 25명이 모여 최대한 부정적인 의미를 제외하도록 약 4만 개의 단어를 선정해 제작했다고 한다. 한국어로 된 W3W 코드를 생성한 후 해외 언어로 된 코드로 변환해 공유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W3W 표기법으로 본 지도 © W3W

서울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 중심지로서, 100년 사이에 수많은 건축 구조물이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이 때문에 완전히 똑같은 위치임에도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주소가 바뀌거나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는 상황마저 발생하고 있다. 어제 놀이터였던 곳이 내일 주차장이 되고 낡은 단층 건물이 있던 곳이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건물이나 시설이 철거되면 이전에 부여되었던 도로명 주소도 함께 폐지되어 기록으로는 남아있을지 몰라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희미해진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창신동은 넓은 지역이 전부 좁은 골목길로 덮여있는 가파른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 초 태조 왕건의 명으로 지어진 청룡사부터 서울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까지 다양한 시대에 지어진 건축물이 한자리에 남아 있다. 어쩌면 서울의 가장 큰 타임캡슐일지도 모르는 이 지역은 최근 민간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정비계획 수립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글에서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주소 체계인 W3W 표기법을 이용하여 창신동 골목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흔적을 찾아보려고 한다.

창신숭인 채석장전망대(///찬반.한편.발끝)

지형이 낙타의 등과 닮아 이름 붙여진 낙산(낙타산)은 원래 오늘날 낙산공원이 위치한 봉우리와 정순왕후가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동망봉이 하나로 이어진 거대한 돌산이었다. 이 돌산을 가득 채운 화강암은 석조 건물을 짓는 데 최적화된 재질이다. 일제는 조선총독부와 서울시청 등 수많은 석조건물을 건설하기 위해 낙산 일대에 채석장을 만들어 엄청난 양의 화강암 석재를 캐냈고, 그 결과 오늘날 창신동 곳곳에는 나무 한 그루 없이 파헤쳐진 절벽이 눈에 띈다. 창신숭인 채석장전망대는 그렇게 해방 이후 남겨진 화강암 절벽 꼭대기 지점에 지어졌다.

 

이 전망대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서울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이다. 양옆으로 길게 뻗은 조선 시대 한양 성곽 안쪽으로는 70년대 저층 주거 형태의 건물들이, 바깥으로는 근대에 지어진 고층 건물들이 마치 지층 단면처럼 나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부터 자리를 지켜온 흥인지문과 햔양도성, 그리고 서울 곳곳에 세워진 고층 건물과 타워크레인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보고 있는 듯한 묘한 감정이 든다.

 

창신동은 바쁘고 빠르게 흘러가는 서울 한복판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다. 이른 아침 한양도성 대문이 열리기까지 백성들이 쉬어가던 나들목은 화강암 절벽이 되며 발길이 끊어졌고, 갈 곳 없던 사람들이 모여 그들만의 독특한 타임라인을 형성했다. 문득 정순왕후가 통곡했던 자리의 W3W 코드가 궁금해졌다. 그곳이 지금 봉우리로 남아있을지 일제에 의해 파헤쳐졌을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중복.심화된.토요일 © 직접 촬영
///약품.알린다.얼마 © 직접 촬영

이음피움 봉제역사관(///기점.패딩.시일)

1945년 해방 이후 버려진 공터였던 창신동은 피난민의 주거지를 거쳐, 동대문 주변 의류 산업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봉제산업의 중심 지역이 되었다. 골목마다 자리 잡은 옷 공장마다 일손이 부족할 정도로 호황을 이루었다. 사실상 70~80년대 우리나라 의류 산업을 이 가파른 골목이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물 반지하마다 있는 봉제 공장에서 뿜어내는 흰 연기가 좁은 골목을 가득 채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창신동의 수많은 건축물은 도시 미관보다는 부지 활용과 면적을 최우선시하며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지었고, 창신동 골목길은 그렇게 격자 모양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불규칙한 형태가 되었다.

 

창신동 봉제거리 끝 지점에 있는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은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창신동의 봉제인들을 기억하기 위해 2018년 4월 완공되었다. 내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수많은 재봉틀, 그리고 전시실 사면을 가득 채운 액자들이었다.

 

액자 속에는 봉제 공장의 모습뿐 아니라, 창신동 전성기 시절 뛰어난 옷 품질을 자랑하는 신문 광고나 옷감을 가득 실은 오토바이들이 골목길에 즐비한 장면 등이 담겨 있었다. 창신동의 봉제 공장에서 평화시장까지 의류를 운송하기 위해서는 덩치가 큰 트럭이나 승합차보다는 오토바이가 적합했다. 좁은 골목을 더 빠르게 누빌 수 있었기에 70~80년대 낙산은 언덕을 오르는 오토바이와 봉제 공장 미싱 소리로 가득했다. 지금은 자동차가 보편화되면서 정겹던 소리가 자취를 감추었지만, 주차 공간을 확보할 여건조차 되지 않는, 버스나 지하철도 가지 못하는 좁은 골목은 여전히 오토바이가 맡고 있다. 지번 주소와 도로명 주소 모두 복잡하게 얽혀있는 창신동에서 배달 장소를 파악할 때 W3W가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들의 머릿속에는 창신동 골목이 이미 그려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배달.엄청난.물속 © 직접 촬영
///맛있는.다소.우연히 © 직접 촬영

백남준기념관(///바코드.방향.꼼짝)

“나는 늘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었어. 창신동에 말이야. (중략) 3천 평도 넘는 거대한 한옥이었는데, 마당이 넓고 뒤쪽에는 동산이 있어 아이들이 놀기가 아주 좋았어.”

 

행위예술가이자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은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창신동을 이렇게 회고한다. 백남준기념관은 백남준이 유년 시절을 보냈던 집터에 있는 한옥을 매입 후 서울시립미술관이 조성하여 2017년 개관한 곳이다. 비록 옛 백남준 집터는 교회와 주택들로 분산되고 기념관은 그중 약 1/100의 면적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 보이는 백남준의 모습은 그 면적이 담을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월등히 뛰어넘는다. 오히려 옛터의 완전한 복원과 작품 원본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공간을 새롭게 조성한 후 가본을 재구성한 전시 형태는 예술과 삶, 그리고 역사가 우연과 필연의 조화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한다고 믿었던 백남준과 마치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당시 TV 등의 새로운 매체를 부정하며 때려 부수는 등의 행위예술과는 다르게, 백남준은 첨단기술과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 상상하며 이를 예술로 표현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기에 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아날로그 TV의 다이얼을 돌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으로 백남준의 주요 작품을 연도별로 살펴볼 수 있도록 설계된 백남준 버츄얼 뮤지엄은 시대가 뒤바뀌어 첨단 기술로 가득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혀 위화감 없이 다가온다. 어쩌면 백남준은 유년 시절을 보낸 창신동이 보여준 시간의 축을 현재에 갇혀 사는 관람객이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며 시간의 경계를 마음껏 뛰어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백남준은 “우리가 비디오로 작업하기 전에는 색이 시간의 기능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이제 색감만 보고도 대략 언제쯤 촬영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40년 전의 컬러 영상과 지금의 컬러 영상은 천지 차이가 난다. 실제로 창신동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이 사진으로만 보았던 옛날 색감으로 가득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레트로라는 트렌드 아래 과거의 기억을 그리워하며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창신동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레트로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다. 느리지만 묵직하게, 그들만의 타임라인을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그러나 천천히 흐른 그 타임라인이 변화무쌍한 도시에 사는 외부인에게는 새롭게 다가온다.

///의료.평형.전날 © 직접 촬영
///다니다.가까운.잘한다 © 직접 촬영

매년 가을 진행되는 <창신마을축제>의 중심지인 창신소통공작소(///관점.늦가을.땅속)에는 목공예와 가죽공예 등 예술 활동가들이 직접 기획한 주민 참여 프로그램이 매달 진행되고 있고, 골무 모양을 닮은 산마루 놀이터(///딱지.중력.잠기다)는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이곳은 축제의 장소이기 이전에 6, 70년대 당시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어졌던 낙산의 시민아파트가 있던 자리이고, 전쟁 후 갈 곳이 없어 모인 사람들이 지은 판잣집이 있던 자리이며, 인적이 드문 아카시아나무가 무성했던 자리이기도 하다.

 

이렇듯 한 장소는 세월을 거치며 여러 번 주소가 바뀌지만, 우리가 그 위치에 담긴 시간을 아카이빙하기에는 위도와 경도가 너무 멀게 느껴진다. W3W 코드는 지정되는 순간, 그 작은 격자 안에서 흘렀던 모든 시간과 격자 속에 들어왔던 사람들을 되돌아보고 생각하게 만든다. 창신동 골목에 숨겨진 수많은 공간 또한 오늘날까지의 시간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