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3 Dots

▪ 화물 철로였던 뉴욕의 하이라인은 허드슨강의 풍요를 등에 업고 웨스트사이드 지역을 물류와 육류 산업의 중심지로 번성시킨 도시의 혈관과 같았다. 그러나 주요 운송 수단이 바뀌며 철로가 멈추자 웨스트사이드는 쇠락과 음지의 시간을 겪는다.

▪ 이후 하이라인은 철거 위기에 놓였지만 20년간 방치된 철로 위에서 자란 야생의 아름다움은 시민들의 시선을 붙들었다. 주민들의 자발적 애정은 ‘하이라인의 친구들’을 탄생시켰고, 철거 대상이던 폐철로를 시민이 주도한 공공 공간으로 되살리는 출발점이 되었다.

▪ 하이라인이 되살린 웨스트사이드의 활력 위에, 뉴욕 최대 민간 재개발 프로젝트인 허드슨야드가 들어섰다. 베슬과 리틀 아일랜드 등 주요 랜드마크가 상업 시설과 어우러지며 도시화에 성공했지만, 초고가 주거와 상업 공간으로 채워져 젠트리피케이션 논란을 피할 수는 없었다.

 


 

허드슨강은 뉴욕을 세계적인 도시서 성장시킨 물길이었다. 사람과 물자, 노동과 소망이 이 강을 따라 드나들었고, 웨스트사이드는 그 흐름을 가장 밀도 높게 받아낸 장소였다. 도축장과 물류창고, 철로가 겹겹이 얽힌 이 지역은 도시의 뒤편에서 뉴욕을 작동시키는 엔진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운송의 방식이 바뀌자 번성의 구조는 순식간에 폐허로 뒤집혔다. 철도는 멈췄고, 웨스트사이드는 범죄와 유흥이 공존하는 도시의 그림자로 밀려났다.

 

도시를 가로지르던 고가 철로 하이라인은 그렇게 철거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하이라인의 친구들’은 이 낡은 구조물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방치된 폐철로를 공원으로 재생시킨 선택은 웨스트사이드 부활의 불씨가 되었고, 멈춘 웨스트사이드의 시계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지역 회복의 기점이 된 이 작고 느린 개입은 결국 250억 달러 규모의 허드슨야드 개발로 이어지며 뉴욕의 새로운 랜드마크와 상업 중심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베슬과 리틀 아일랜드 등 새로운 랜드마크들은 분명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조금 불편한 질문들이 뒤따랐다. 이 도시는 누구를 위해 설계된 것일까? 허드슨야드는 젠트리피케이션과 소수의 부를 중심으로 한 공간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이라인 프로젝트가 보여준 것처럼 진정한 도시재생은 거대한 자본 이전에 지역 시민 참여와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그 기반이 빠진 개발은 결국 빛나는 외관만 남긴 채, 공허한 ‘부자들의 도시’로 전락할 수 있다.

베슬 외부 모습 © VESSEL
55번 부두에 남아있는 말뚝 잔해를 활용해 리틀 아일랜드를 건축하는 모습 © Little Island

웨스트사이드의 황금기

서울에 한강이 있다면 뉴욕에는 허드슨강이 있다. 뉴욕주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이 강의 총길이는 507km로, 우리나라 한강이 494km인 것을 고려하면 미국의 영토 크기에 비해 다소 작은 편이다. 허드슨강은 1609년 최초로 이곳을 탐험한 영국인 헨리 허드슨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그때 당시 유럽인들은 허드슨강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의 북쪽으로 영토로 확장하며 식민지를 확대했다. 아메리칸 원주민들은 이 강을 교역의 통로로 사용하곤 했는데 그때 당시의 사람들은 오늘날 세계적인 도시로 뉴욕이 발전하는 데에 이 강이 지대한 영향을 얼마나 미쳤을지 아마 몰랐을 거다.

 

허드슨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뉴욕 맨해튼의 서부 지역인 웨스트사이드와 스카이라인을 수놓은 뉴욕 특유의 초고층 빌딩들과 만나게 된다. 허드슨강에서 페리를 타며 바라보는 뉴욕의 야경은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사실 이 수많은 마천루도 허드슨강이 없었다면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허드슨강은 맨해튼의 서쪽을 감싸 대서양으로 흐르고 이 지리적 이점으로 대규모 선박이 드나드는 데 유리해 뉴욕이 항구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과거 19세기부터 미국 중서부의 농산물 및 자원들이 허드슨강을 통해 뉴욕 항구로 운송됐고 강 주변에는 산업 시설과 창고, 철도 등이 집중되면서 맨해튼은 미국 동부를 대표하는 물류 허브로 부상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왔는데 허드슨강이 그 첫 관문이기도 했다. 하구에 위치한 리버티섬에서는 미국의 정신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이 이들을 맞았고, 인근의 엘리스섬에선 입국 심사를 받곤 했다. 이렇듯 뉴욕은 그 역사에서부터 이민자의 도시라 할 수 있는데 대다수의 이민자가 허드슨강을 통해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로 허드슨강은 뉴욕의 탄생을 열어준 최초의 길이자 뉴욕과 세상을 잇는 문이었다.

 

자연스럽게 부두를 낀 웨스트사이드는 각종 항만 및 물류 유통의 허브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강을 끼고 있었기에 여러 식자재와 육류를 배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도록 도축 및 포장 산업이 성행했다. 웨스트사이드의 한 지역, 미트패킹 지구(Meatpacking District)에서는 그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 무려 250개의 도축장과 포장 공장이 자리할 정도였다. 원활한 유통을 위해 뉴욕시는 20세기 고가 화물 철로를 깔았는데 그 이름이 하이라인(The High Line)이었다. 하이라인이 고가 철도로 건설된 이유는 기존의 지상 철도가 잦은 인명 피해와 교통사고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화물 열차가 지나다니던 10번가는 ‘죽음의 거리’라 불릴 만큼 위험한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1910년까지 열차 사고로 사망한 사람 수가 540명이 넘어갈 정도였다. 

 

사망자가 늘어나자 뉴욕시는 시민들을 보호하고자 지상 철로를 철거하고 아예 공장 건물의 2~3층(지상에서 약 9미터 정도) 높이의 고가 철로를 건설하기로 결정, 그 결과 하이라인이 탄생했다. 1934년에 개통된 이 노선은 수백만 톤의 육류, 유제품, 농산물 등을 수송하며 맨해튼의 남북을 가로질렀는데 그 노선은 소호 지역의 남쪽에서부터 지금의 허드슨야드 남쪽 지점까지로 총길이는 약 2.3km였다. 

 

웨스트사이드는 오랫동안 빈곤층과 노동차,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거주한 곳으로, 낮에는 항만 노동자들의 거친 육체노동이 주를 이뤘다면 밤에는 범죄와 폭력, 섹스로 얼룩진 마피아의 도시이기도 했다. 그중 웨스티스(Westies)가 악명이 자자했는데 이들은 아일랜드계 미국인 조직 범죄단으로 각종 마약 밀매, 청부살인 등을 일삼았고 주로 이탈리아계 미국인 마피아와 협력해 헬스 키친 지역에서 활동했다. 헬스 키친은 미트패킹과 더불어 웨스트사이드에 있는 또 다른 지역으로 이름만 들었을 때는 영국인 쉐프 고든 램지(Gordon Ramsay)가 독설을 퍼붓기로 유명한 TV쇼 <헬스 키친>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사실 이곳이 원조이다. 

 

지명의 유래와 관련된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이 있는 건 19세기 초 이곳에 갓 부임한 한 경관이 노동자들의 파업과 폭동, 부랑자들의 난동을 단속하다 나온 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경관이 말하길 “이곳은 지옥(Hell) 그 자체이다. 아니, 지옥이 차라리 이곳보다 더 낫다 할 수 있다. 이곳은 지옥보다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지옥의 주방 그 자체다.”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원래 풍요에 범죄가 깃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훔칠 게 있어야 도둑도 존재하는 법. 허드슨강이 가져다준 풍요 속에서 웨스트사이드는 그렇게 양지와 음지에서 모두 번성했다. 그야말로 웨스트사이드의 황금기였다.

 

그렇지만 웨스트사이드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1960년대부터 트럭으로 대형 수송이 이뤄지면서 철로 유통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뱅크 스트리트까지 이어지는 하이라인의 최남단 구간은 부분 철거된다. 이러한 추세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결국 1980년을 마지막으로 하이라인 전체 철도 운행이 완전히 중단됐다. 하이라인 폐선 이후 20년간 이곳은 별다른 용도를 찾지 못한 채 방치됐고 무성한 잡초만 정글처럼 자라나 더 이상 열기를 내뿜지 않는 철로를 뒤덮고 항만 노동자들은 떠났다. 웨스트사이드는 번성하던 과거와 달리 낮에 가면 사람 하나 찾기 힘들 정도로 버려진 도시가 되었는데 이 공간에 각종 섹스 클럽과 매춘, 마약이 들어서며 웨스트사이드는 음지로 더 파고들어갔다. 그야말로 밤의 열기가 지옥보다 더 뜨거울 정도였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1980년대 에이즈 공포가 확산하면서 뉴욕시는 에이즈를 예방한다는 이유로 미트패킹 지구에 있는 한 유명 게이 클럽을 강제로 폐쇄하기도 할 정도로, 이곳의 밤 문화는 대단했다.

과거 고가 화물철로 위를 달리던 하이라인 모습 © High Line
1985년 AIDS 예방을 목적으로 폐쇄된 클럽 Mineshaft의 모습 © NYC LGBTQ sites

하이라인을 철거하라

도시가 점차 타락한다고 판단했던 토지 소유자들은 지가 하락을 이유로 하이라인을 철거하라며 시에 요구했다. 1999년 하이라인 철거 안이 제출됐고 하이라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때 몇몇 지역 주민들이 나서 하이라인을 철거하지 말고 보존하자는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20년간 버려진 철로 위에는 각종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 오래된 철근 콘크리트를 뒤덮으면서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다. 여기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이들은 하이라인을 보존하고자 1999년 하이라인의 친구들(Friends of the High Line·FHL)을 결성해 하이라인을 공공 공간으로 재창조하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단체의 설립자인 조슈아 데이비드(Joshua David)와 로버트 해먼드(Robert Hammond)는 이때를 회상하며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냐는 질문에 오히려 자신들이 비전문가였기 때문에 이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이 (하이라인 보존) 운동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았더라면 아마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직 하이라인을 향한 애정으로 뭉친 이 둘은 조엘 스턴펠드(Joel Sternfeld)라는 유명 사진작가를 섭외해 하이라인을 대중에게 알리는 작업을 했다. 방치된 폐철로에서 정글처럼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는 야생의 모습에 시민들은 열광했다. 대중적 호응을 기반으로 하이라인의 친구들은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 결과 2001년 토지주와 단체의 소송에서 뉴욕 시민들의 지지로 단체가 승소하면서 하이라인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재개발이 돼 2009년 하이라인은 새로운 모습으로 재개장하게 되었다. 도시재생이 키워드로 떠오른 오늘날 하이라인의 친구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바로 시민들이 자생적으로 참여해 기관이 이끄는 게 아닌 밑에서부터 풀뿌리 민주주의로 도시재생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하이라인친구들 설립자 조슈아 데이비드와 로버트 해먼드 © High Line
조엘 스턴펠드, 철도 유물, 30번가, 2000년 5월, 2000/2010. © High Line

미국 민간 부동산 개발 최대 프로젝트, 허드슨야드 프로젝트

하이라인의 개장은 활력을 잃은 웨스트사이드의 부활 신호탄이 된다. 맨해튼 서쪽 12번가에서 30번가까지 약 2.5km 구간에 걸쳐있는 하이라인은 미트패킹 지구, 헬스키친, 첼시 등 웨스트사이드 주요 지역을 관통하며 매해 각종 공연, 춤, 가족참여 프로그램 등 연간 400개 이상의 무료 체험 프로그램과 500종 이상의 식물들이 만들어낸 장관을 제공한다. 하이라인은 21세기 센트럴 파크란 평가를 받으며 인근 지역에 프랭크 게리(Frank Gehry), 장 누벨(Jean Nouvel), 시게루 반(Shigeru Ban) 등 유명 건축가들의 빌딩들이 들어설 정도로 뉴욕의 새로운 명소로 각광받으며 지역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주요 매체에서는 하이라인이 웨스트사이드의 르네상스를 불러온 프로젝트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 평가가 과대평가라 할 수만은 없는 게 바로 이 하이라인의 가능성을 보고 시작된 프로젝트가 바로 미국 민간 부동산 개발 최대 프로젝트인 허드슨야드(Hudson Yards)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허드슨야드는 허드슨강 변 철도기지를 대규모로 개발해 오피스, 상업, 주거, 문화시설을 집약한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로, 총사업비만 250억 달러(약 28조 4000억 원)에 달한다. 16개 타워형 건물에 초고가 주택, 사무실, 호텔, 학교, 공연예술센터, 명품 쇼핑몰 등을 갖춘 복합 공간으로, 기존에 있던 철도 기지 위로 두께 1.8m 콘크리트를 쌓고 건물들을 세웠다. 개발사인 릴레이티드(Related Companies) 허드슨야드의 제이 크로스(Jay Cross) 사장은 “누구든 우리 거기서(허드슨야드) 보자고 할 만큼 상징적인 명소를 만들고 싶었다”고 의도를 밝힌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있는 공간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게 사람들이 도시에 사는 이유”라며 허드슨야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뉴욕타임스의 건축 비평가 마이클 키멜람(Michael Kimmelman)은 허드슨야드 프로젝트가 도시에 가져온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250억 달러를 들여 무에서 창조한 빛나는 성과로 미래 조세수입의 원천이자 9·11 테러 이후 뉴욕의 분위기를 반전시킨 기적적인 결과물이다.” 

허드슨야드 프로젝트 이전과 이후 모습 © 세계일보

뉴욕의 에펠탑이 되다, 더 베슬 & 리틀 아일랜드

프로젝트의 중심에서 허드슨야드를 넘어 맨해튼의 랜드마크로 떠오른 건축물이 있으니 바로 건축가 토마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이 지은 베슬(Vessel)과 리틀 아일랜드(Little Island)이다. 베슬은 황금색 벌집 모양의 전망대로 총 158개의 계단이 46미터 높이로 이어진 형태다. 안에 들어가면 마치 벌집 속 한복판에 들어온 것처럼 진풍경에 압도된다. 방문객은 베슬의 밑에서부터 차례대로 계단을 오르며 허드슨야드와 허드슨강의 빼어난 경관을 즐길 수 있는데, 노을이 질 때쯤 베슬의 건축물 사이로 들어오는 노을빛은 베슬의 금빛 구조물과 더해져 마치 황금 바벨탑에 들어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헤더윅은 “방문객이 놀이터의 정글짐을 오르듯 그 구조물을 올라가 직접 탐험하며 어디가 위이고 아래인지 모르는 미로 같은 구조 속에서 도시와 우연한 만남을 즐기길 바란다”며 베슬이 시민들의 놀이터가 되길 원했고 그의 의도는 적중했다. 2019년 개장 당시 두 달 넘게 모든 예약이 꽉 찰 정도로 베슬은 뉴욕 시민과 관광객들의 큰 사랑을 받으며 타임스퀘어, 자유의 여신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뉴욕의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하지만 불행한 일도 연이어 일어났는데 개장 이후 18개월 동안 총 네 명이 이곳에서 투신자살을 하는 바람에 자살 명소라는 오명이 붙어 잠시 문을 닫고 안전 보완 공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허드슨야드 프로젝트 속 토마스 헤더윅의 또 다른 작품인 리틀 아일랜드는 허드슨강의 54번 부두를 재생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인공 섬이다. 참고로 54번 부두는 1912년 타이타닉호 참사 생존자들이 구조된 후 최초로 상륙했던 부두로, 2012년 허리케인 샌디로 부두 전체가 파괴되는 불운을 겪었다. 익스피디아 그룹의 회장 배리 딜러(Barry Diller)와 패션 디자이너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Diane von Fürstenberg) 부부는 54번 부두를 재생하기 위해 새로운 공원 조성을 제안하는데 부부는 이 공간이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설계돼 방문객들이 첫눈에 봐도 눈부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했다.

 

건축가 헤더윅은 리틀 아일랜드를 스케치할 때 기존 공간(부두)을 덮는 방식이 아닌 공간에 남아있는 요소를 활용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물 위로 튀어나온 말뚝 잔해였고 이 말뚝을 활용해 위에 풍부한 녹지 공간을 덧대어 일종의 녹색 아일랜드와 같은 물 위의 풍경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결과 튤립 모양의 유닛이 말뚝 위로 다발처럼 모여 인공섬을 이루고 각 유닛의 높낮이가 달라 이를 바탕으로 인공섬의 다층적인 랜드스케이프를 만들었다. 여기에 MNLA가 조경에 참여해 뉴욕 기후에 맞춰 400종이 넘는 다양한 나무, 관목, 풀, 꽃을 조화롭게 배치했다. 나무를 고를 때는 내한성, 바람, 염분까지 고려해 조망이 비교적 좋지 않은 곳과 겨울바람이 심하게 부는 곳에는 상록수를, 많은 사람이 쉬는 공간에는 캐노피처럼 커다란 낙엽수를 심었다. 이렇게 다양한 수목은 일종의 식물 팔레트처럼 다채로운 색을 보여주는데 봄에는 파스텔 색조로 물들고, 여름에는 강렬한 색을 뽐내며, 가을에는 차분한 색으로 단풍과 어우러지다 겨울에는 베리류의 식물과 관목이 조화를 이루게끔 연출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 속에서 방문객은 이러한 녹색 생태계와 함께 아늑하고 편안한 여정을 경험하며 높은 지대에 올라서서 허드슨강을 조망하는 한적함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리틀 아일랜드에는 세 개의 공연장이 있는데 그중 가장 큰 규모의 공연장은 687석 규모의 원형 극장으로, 허드슨강 위로 지는 노을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헤더윅은 국내 건축 잡지 월간 SPACE와 인터뷰에서 민간 주도로 계획된 도시 공간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 세계 많은 정부가 자체적으로 좋은 도시를 만드는 데 자신감을 잃어가는 추세이며, 점차 이러한 역할을 민간 개발자에게 넘기고 있다. 리틀 아일랜드도 민간 재단에 의해 지어진 공공 공간이다. 간혹 공공이 아닌 민간 자본으로 마련된 공간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있는데, 전 세계적으로 민간 자본을 투입하여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고 도시에 좋은 영향을 미친 사례가 많다. 록펠러와 구겐하임 가문이 뉴욕의 도시 환경에 미친 영향을 많은 사람들이 체감하고 있지 않은가. 민간은 공간을 기반으로 하는 사업 모델을 만들 때 보통 장기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력으로 좋은 공간이 생기는 것 같다.”

 

앞서 두 랜드마크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허드슨야드 프로젝트는 하이라인 공원과 함께 쇠퇴하던 웨스트사이드의 부흥기를 확실히 이끈 일등 공신이 되었다. 뛰어난 허드슨강의 경치를 배경으로 한 이곳에 글로벌 기업 100여 개가 입주해 약 5만 명의 근로자가 근무하며 맨해튼 내 공실률 0%를 기록하는 등 상업적인 성과도 거두고 있으며 연간 천만 명 이상의 방문객들이 이곳을 방문한다. 그렇지만 비판 지점도 확실하다. 허드슨을 세계 최고급 부지로 만들겠노라 럭셔리 지구로 계획했다 보니 이곳은 맨해튼의 고질적인 문제로 꼽히는 집값과 주거의 양극화를 더 악화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허드슨야드에 있는 한 빌딩 내 침실 하나 아파트의 한 달 월세가 5,000달러(약 540만 원)에 달하고 펜트하우스는 3,200만달러(약 364억 원)에 팔리고 있다. 또한 몇몇 공공 공간을 제외하고 대다수가 고급 백화점, 쇼핑몰, 명품샵 등 상업적인 공간들로만 채워져 있다. 

 

도시 전문 매체 시티랩은 허드슨야드가 비평가들이 미워하기 좋은 250억 달러짜리 메가 프로젝트라 평했고 건축 비평가 키멜람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이 갖춰진 곳”이라는 개발사 측의 자평을 두고 누가 이런 건축학적인 체험 동물원 같은 곳에 살고 싶을지 의문이라며 쓴소리를 냈다. 시사주간지 더 뉴요커는 <나의 허드슨 야드 쇼핑리스트 My Hudson Yard Shopping List>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400달러짜리 사이드 메뉴 없는 스테이크, 음식을 시원하게 보관해 주는 3만 달러짜리 스마트 냉장고, 음식을 데워주는 5만 달러짜리 스마트 오븐, 장난감으로 쓸 3D 프린터….” 이 모든 것을 최고급이라는 미명 하에 소수만 누리고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허드슨야드라며 풍자했다. 뉴욕타임스 또한 허드슨야드는 사실상 부자를 위한 곳으로, 이는 결과적으로 뉴욕의 또 다른 80/20 빌딩(전체 인구 20%가 전체 부 80% 차지한 현상)을 양산하는 데 그쳤다고 평한다. 결국 이 모든 비판은 도시재생의 고질적인 문제로 수렴한다. 바로 젠트리피케이션이다. 도시재생 사업을 벌였더니 도리어 주민들이 높은 집값으로 내쫓기고 결국 부자들의 놀이터가 됐다. 허드슨야드 프로젝트의 더 큰 문제점은 이 점이 사업 초기 기획 단계에서부터 조금 노골적이었다는 부분이다.

도시재생은 곧 시민의 것이어야

하이라인 공원과 허드슨 야드 프로젝트는 민간이 주도해 공공의 지원을 끌어와 도시재생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세계 각국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 특히 하이라인은 한국 내에서도 여러 지자체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는데 ‘서울로7017’이 대표적이다. 서울로7017은 하이라인처럼 고가도로 형태로, 1960년대 급격한 산업화로 늘어난 교통량을 감당하려고 만들었다. 2014년,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은 뉴욕 하이라인에서 이를 벤치마킹한 선형 녹지공간을 만들겠다며 서울역 고가도로를 수목 및 보행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서울로7017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17년에 개장된 서울로7017은 반짝 관심을 모았으나 하이라인과 다르게 시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곧 시들해졌다. 그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서울역 고가도로는 태생부터 안전 등급 D를 벗어나지 못해 하이라인과 달리 8cm 이상 흙을 덮을 수도 없어 다양한 녹지 생태계를 조성하기 힘들다며 공학적인 이유를 든다. 

 

맞는 말이지만 서울로7017은 시 정부의 의지에서만 출발했고 그 과정에서 프로젝트에 대한 시민들의 애정을 자아내지 못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 아닐까 싶다. 하이라인의 친구들은 앞서 쉽게 서술된 것과 다르게 뉴욕 내에서 여론을 조성하는 데만 해도 상당한 애를 먹었다. 1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주정부를 설득하고 후원금을 모았으며 각종 테스트 사업과 시민 대상 아이디어 공모전까지 열며 시민들에게 왜 우리에게 이 공원이 필요한지, 왜 우리는 인근에 거주하는 시민으로서 이 공간이 필요한지에 대한 자신들의 애정을 설파했다. 원주민들이 이 공간의 재생을 강력하게 희망했고 그 과정에서 주민들을 소외시키거나 내쫓지 않는 방향으로 사업을 전개하고자 했다.

 

뉴욕은 이상적이고 서울은 그렇지 않다는 걸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시민들의 애정을 담지 못한 도시재생은 공허다는 걸 강조하고자 함이다. 소수의 부자를 위한, 부자들에 의한 허드슨 야드 프로젝트도 그래서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놓고도 여론의 뭇매를 맞지 않았나. 도시를 재생하는 거 좋다. 그렇지만 그 재생의 대상에 도시를 이루는 시민들이 없다면 과연 무엇을 재생하는 걸까. 그 방향이 공허하지 않으려면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애정과 참여,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문득 ‘허드슨야드 최고층 빌딩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행복할까?’ 생각해 본다. 아침에 푹신한 오리털 이불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려다보면 허드슨강을 볼 수 있고 컨시어지로 배달된 아침 식사를 마치고 50층에서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가 자가용으로 출근한다. 훌륭한 방음 소재로 시공돼 이웃집의 층간 소음 걱정도 없고 가사도우미가 있어 집안일에 치여 살 걱정도 없어 보인다. 현대인의 꿈을 이룬 성공한 인생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임우진 프랑스 국립 건축가는 한겨레에 게재한 칼럼 <넓은 집과 넓은 도시>에서 이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연구 결과를 든다. 2006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 주거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고급 주상복합 거주민의 만성 우울증 지수가 서민 동네 거주민에 비해 3배 이상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연구가 흥미로운 점은 그 우울증 지수가 거주민이 접촉하는 우연하고 즉흥적인 도시적 만남의 횟수와 정확히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멋진 전망과 고급 서비스는 곧 무뎌진다. 한강 뷰는 어느새 무감해지고 초고층의 삶이 주는 낭만도 얼마 못 간다. 왜냐하면 일상이 단조롭고 바라보는 풍경과 만나는 사람도 늘 똑같기 때문이다. 주상 복합이라는 큰집에 살게 되는 순간부터 실제로는 그 작은 세계에 자신의 일상이 갇히게 되고, 마주칠 수 있는 도시적 기회는 축소된다. 칼럼에서 건축가는 역설한다. 집과 도시의 관계를 이해한다면, 길과 이웃으로 연결된 우리의 평범한 도시가 사실은 가장 넓은 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허드슨야드의 주민들을 내쫓고 최고층과 최고급만을 향락하는 이들에게 웨스트사이드는 애정 어린 고향이 될 수 없다. 누군가의 고향이 아닌 도시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논리에만 기능하는 상품이 되어버린다. 

 

여전히 허드슨 야드 빌딩에 거주하며 월세 500만 원을 내는 이들의 삶이 서민의 입장에서는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이들도 장기적으로 그 빌딩 때문에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니 허드슨야드의 도시재생은 여러모로 외관에만 집중한 공허한 왕국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최근 용산 국제업무지구를 대한민국의 허드슨 야드로 조성하겠다는 기사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허드슨야드의 4.4배 규모, 최대 용적률 1,700%, 높이 100층 내외 랜드마크가 서울에 들어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수직 도시라며 흥분할 때 잠시 물러나 우리는 허드슨야드 프로젝트가 남긴 교훈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 성찰이 우리가 진정으로 벤치마킹해야 할 부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