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말할 수 없는 존재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함에도 사회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은 사회의 타자로서, 혹은 금기시되는 목록으로서 호명된다. 이러한 금기의 목록들은 사회의 윤리에 포함되지 않거나 심지어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여성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제도권의 타자로 존재했으며 참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백인을 제외한 인종은 백인이 아닌 인종으로서만 존재했고 고유한 정체성으로서의 인종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동성애자는 교정과 치료의 대상이었으며 트렌스젠더는 성별 불일치라는 병명으로서만 존재했다. 사회적으로 용인된 정상성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은 비정상으로 취급되어 왔다. 획일화되고 표준화된 정상성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은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외부의 타자만을 배척한다고 생각했던 정상성은 타자의 범위를 무한히 확장해 갔다. 배척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정상성을 끊임없이 증명하게 만드는 사회의 단선적인 정상성 개념은 모두를 검열하게 만들고 동시에 모두를 병들게 한다. 사회의 비-정상성, 다시 말해 소수자성 자체를 긍정하려는 새로운 윤리는 사회의 획일적인 기준으로 개인을 검열하는 정상성 개념이 사실은 허구에 가까움을 폭로한다. 끊임없이 좁아지는 정상성의 섬에서 살아남는 이들은 극소수이며, 오히려 사회가 규정한 타자를 환대하고 긍정해야 자신의 정체성을 검열당하지 않고 보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윤리는 기본적으로 연대를 기초로 개인의 정체성을 긍정한다.

흐릿해진 경계선: Louis Vuitton

2021 FW 루이비통 패션쇼는 무의식적인 편견을 해체하려는 의도를 담았다. 파리와 스위스의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진행된 이번 패션쇼는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의 에세이에 등장하는 마을의 이방인을 테마로 한다.

 

영상은 로이커바드(Leukerbad)라는 스위스 산골 마을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방문해 유일한 흑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경험과 미국에서 흑인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교차해 보여준다. 마을의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경험과 미국에서 도시의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경험을 통해 흑인이라는 정체성이 어떠한 사회적 경험을 겪는지를 예술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심리적 대립은 패션쇼 스테이지 위에서 실체화된다. 파리 패션쇼에 등장해 쇼 진행 중 변화하는 대리석은 마을 이방인의 변화된 감정을 상징한다. 예술은 타자의 문화적 유산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루이비통의 남성 아티스틱 디렉터인 버질 아블로(Virgil Abloh)는 패션쇼를 통해 여행자와 순수주의자의 대립을 표현했다. 사회 외부에서 부유하는 여행자와 사회 내부에서 정보를 점유하고 있는 순수주의자 사이의 대립을 하나의 룩으로 제시함으로써, 그 둘의 경계가 무화(無化)되고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사회의 안과 밖을 결정짓는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버질 아블로의 시도는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나누는 기준을 재고하게 만든다.

 

루이비통이 BTS를 모델로, 서울에서 컬렉션을 공개한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해당 패션쇼에서는 BTS가 신문 캔버스 액자 등 다양한 오브제를 들고 등장하는데, 이는 개인의 패션을 보고 개인의 정체성을 짐작하거나 유추하는 편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버질 아블로는 이에 대해 사회의 보편적 캐릭터에 따른 전형적 드레스 코드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편견을 조명하고 이를 중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한 바 있다.

 

동양의 세계적인 팝 아티스트를 모델로 내세운 것 또한 백인 중심 패션쇼의 관습과 전통을 전복하려는 시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쓰레기를 처리하던 소각장에서 2014년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부천의 아트벙커 B39를 패션쇼의 배경으로 선정했다는 점 역시 버질 아블로와 루이비통의 사회적 편견에 대한 전복적 시선이 담겨있다. 사회적 편견과 인식을 극복하려는 버질 아블로의 노력은 그가 사망한 후에도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으며, 편견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회 소수자들에게 다시금 삶을 꿈꾸게 해주었다. 다시 한번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브랜드와 윤리의 조화 : Gucci Equilibrium

구찌가 만드는 제품의 미학과 구찌에서 생각하는 윤리의 조화를 이룬 구찌 이퀄리브리엄(Gucci Equilibrium)은 지구와 사람을 위한 구찌의 노력을 담고 있습니다.

-Gucci 공식 홈페이지-

 

2020년 봄,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알렉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는 자신의 일기를 SNS에 공개했다. 그의 일기에는 우리의 창작 활동은 즐거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으며, 이제는 각자의 역할에 맞추어 공동체에 힘이 되어야 한다고 적혀있었다. 구찌는 지속가능성, 성평등,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꾸준히 강조해왔다.

 

구찌는 구찌 이퀄리브리엄이라는 공식 사이트를 리뉴얼해 새로 오픈했다. 구찌 이퀄리브리엄의 로고는 <차임 진>의 아트 디렉터이자 비주얼 아티스트로서, 성평등 퀴어 페미니스트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MP5가 담당했다. 로고에는 다양한 모습을 한 다섯 명의 인간이 지구를 감싸고 있는데, 다양성 존중과 환경 보호를 강조하는 구찌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구찌는 2013년부터 Chime for Change라는 성평등 캠페인도 진행해 온 바 있다. 이들은 여성을 위한 자금을 모금하고 세계여성기금(Global Fund for Women), 유엔 여성기구 (UN Women) 등과 협업해 여성 인권 운동을 증진하려고 했다. Chime for Change의 일환으로 2019년부터 발행한 <차임 진>은 여성뿐 아니라 다양한 성 정체성과 평등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트렌스젠더의 인권을 주제로 성별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퍼포먼스 아티스트, 알록 바이드 메논(Alok Vaid Menon)의 글과 여성 보디빌더 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아랍인 여성의 사진을 실어 사회적 여성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구찌 이퀄리브리엄의 가치관은 한국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2020년 10월, 구찌 청담 플래그쉽 스토어에 MP5 로고가 크게 전시되었다. 한국의 다소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구찌는 브랜드가 지향하는 가치관과 윤리를 과감하게 선보였다.

 

구찌는 관습화되고 표준화된 남성성/여성성 개념에 지속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성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다소 심오할 수 있는 명제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려는 구찌의 시도는 사회의 새로운 인식에 기여한다. 구찌는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체성을 긍정하고 그들의 존재를 가시화한다. 또한 캠페인을 통해 지워지지 않는 존재를 끊임없이 환대하고 마주하며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성별과 인종을 넘어

앞서 살핀 구찌와 루이비통의 사례처럼 규모가 큰 패션쇼나 캠페인을 통해서만 기업의 가치관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가치관은 규모보다는 브랜드의 기획력이 지닌 진정성에서 발견된다. 골든구스는 브랜드를 대표하는 세 가지의 컬렉션(Golden Collection, Star Collection, Journey Collection) 중 Star Collection에서 유명인 다시 말해 셀럽을 섭외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성소수자, 작가, 사회운동가를 기용해 사회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자 했다. 브랜드 홍보를 위해 이미지로 소비되는 셀럽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사회적 의미와 가치관을 끊임없이 관철하려는 활동가와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모델을 내세워 브랜드 가치관을 제시한 것이다. 골든구스는 셀럽이 지닌 대중성과 홍보 효과를 포기하면서까지도 브랜드의 가치관을 우선시했다. 제냐 또한 #Whatmakesamen 컬렉션을 진행하면서 무엇이 남성성을 구성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성별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시도했다.

 

또한 나이키, 어콜드월, 꼼데가르송, 피어 오브 갓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Black Lives Matter 운동에 지지를 표했다. 나이키는 자신의 슬로건인 Just do it을 변형해 For once, Don’t do it이란 캠페인 영상을 공개하면서 인종 차별을 외면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꼼데가르송은 Black Lives Matter라는 캡슐 컬렉션을 발표하면서 인종차별 반대에 힘을 보태겠다고 뜻을 밝혔으며, 피어 오브 갓은 Black Lives Matter 운동의 시발점이 됐던 조지 플로이드 사건의 유가족을 후원하기 위한 티셔츠를 출시했다. 실제로 해당 티셔츠 판매의 수익금은 모두 플로이드 펀드에 기부되었다.

 

이 외에도 수많은 기업이 사회적 소수자와 연대하고 편견과 오해를 불식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브랜드 액티비즘(Brand Activism)은 기업들의 윤리적 책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브랜드 역시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발전할 수 있다. 그렇기에 기업들은 변화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쪽을 택했다.

윤리적 주체로서의 브랜드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에서 탈선한 이들을 호명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언어화될 수 없었으므로 사회의 제도로 편입되지 못했다. 그것은 시대의 윤리였으며 관습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변화하면서 우리는 타자를 환대하고, 새로운 윤리를 스스로 설립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사회의 표준에서 벗어나 있다. 저들과 우리는 다르지 않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경계는 이미 흐릿해졌을 뿐 아니라, 사실은 허구였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사회적 인식의 변화는 느리지만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더욱 나은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만족하고 기뻐할 일임에도 브랜드들은 변화의 속도를 가속하고자 한다. 어느덧 브랜드는 사회의 윤리와 기준에 맞추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윤리를 스스로 창출하는 능동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존재한다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새로운 시대의 윤리에 대해 많은 브랜드가 동의할 뿐만 아니라 그 윤리를 적극적으로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