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미구엘 슈발리에(Miguel Chevalier, 1959-)는 가상적인 움직임을 작품에 구현하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1978년부터 디지털 예술을 선보였으니 이 분야에서는 선구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주로 대규모로 투사되는 디지털 설치 형태 작품을 선보이며 장소를 재조명하고 새로운 해석을 부여한다.

 

슈발리에 하면 가장 먼저 2015년 케임브리지 대학 성당 내부를 디지털 아트로 수놓은 작품이 떠오른다. 이곳 킹스 칼리지 채플은 수 세기에 걸쳐 유명한 석학들을 배출한 학문의 성지이다. 슈발리에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과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디지털 언어로 재해석한다. 의학, 생물학, 신경과학, 물리학, 생명공학 등을 모티브 삼아 실시간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16세기 후기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예배당과 디지털 설치에서 나오는 빛이 어우러져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미구엘 슈발리에, Dear World…Yours, Cambridge, 2015. © Miguel Chevalier

이 작품은 천재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에 대한 오마주로도 읽힌다. 호킹의 블랙홀 연구를 설명하기 위해 수천 개의 별자리로 구성된 몰입형 환경을 상상해 만들어 관람객을 우주의 신비로움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예배당을 수많은 별과 행성들로 뒤덮은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처럼 슈발리에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에서 차용한 컴퓨터 모델을 활용해 하이브리드 형태의 다채로운 예술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선보였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세상의 기원> 역시 생물학과 미생물의 세계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세포가 분열하고 증식하는 모습을 독특한 패턴으로 그려낸다. 현재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디지털 뷰티》 (2023. 1. 18.~2024. 2. 11.)에서 <세상의 기원>을 포함한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슈발리에의 작품은 강한 상호작용성을 특징으로 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일방적으로 송출되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이 화면 벽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세포의 궤적이 흐트러지며 상호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관람객이 지나갈 때마다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흥미롭다.

 

그는 다양한 문화적 패턴을 사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멕시코에서 태어난 슈발리에는 어린 시절 멕시코 전통 가옥의 바닥과 벽에서 보던 복잡한 패턴에 매료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특히 그는 기하학적 모양의 아라베스크를 작품의 도상으로 자주 활용하곤 한다. 아라베스크는 아랍인이 창안한 장식 무늬로, 식물의 줄기와 잎을 도안화하여 기하학무늬와 조화를 이룬 것이다.

 

슈발리에의 <디지털 아라베스크>는 전통적인 아라베스크의 복잡한 패턴이 화려한 색상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디지털 패턴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매혹적인 움직임과 유동성을 만들어낸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아라베스크의 아름다움과 복잡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해 볼 것을 제안한다. 과거의 전통을 현대의 디지털 기술과 융합하여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전시장이 아닌 완전히 개방된 장소에 설치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야외의 환경에서 주변의 문화적 요소들과 어우러지며 관람객과 소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해당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면서도 새로운 경험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많은 공감대를 끌어냈다.

미구엘 슈발리에, Digital Arabesques, 2014. © Miguel Chevalier

비슷한 시기에 선보인 작품으로는 <매직 카펫>이 있다. 현재 아라아트센터에서도 새로운 버전의 <매직 카펫>을 체험할 수 있다. 수천 개의 디지털 모티브와 기하학적 패턴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패턴이 바뀌며 몰입감을 자아낸다. 작가는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프로젝션 맵핑 기술을 활용해 현대 문화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반영하는 패턴을 디지털 시대에 맞게 재창조했다. 실제 세계와 가상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싶어 하는 작가의 접근 방법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읽힌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도 그를 대표한다. 그중에서도 신작 <엑스트라-내추럴>은 꽃에 대한 그의 시각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꽃은 언제나 우리를 매료시키는 대상으로, 종교, 신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슈발리에는 꽃의 문화사에 주목하면서 이를 생생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미구엘 슈발리에, Magic Carpets, 2014. © Miguel Chevalier

슈발리에의 작품은 오늘날 자연과 인공물이 공존하며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관계에 대한 질문을 시적이고 은유적으로 탐구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90년대 말부터 식물계를 관찰하고, 이를 디지털 세계 내에서 상상함으로써 다양한 시대의 가상 씨앗과 꽃을 제작했다. 작품 <엑스트라-내추럴>에 등장하는 무성한 가상 정원은 마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처럼, 꿈과 현실 사이에서 재창조된 정원 속으로 관람객을 안내한다. 이 정원은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다양한 상상의 꽃으로 구성되며, 이러한 가상의 식물들은 무작위로 나타나 꽃을 피우고 시들기를 반복하며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프랙탈 플라워>라는 작품도 <엑스트라-내추럴>과 마찬가지로 가상의 식물을 은유한다. 다양한 식물 표본을 기반으로 식물, 광물, 동물, 로봇이라는 네 가지 가장자리에서 새롭게 자라난 생명체를 표현했다. 작가는 디지털 발아로 탄생한 알고리즘 꽃들을 통해 인공 시대의 자연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미구엘 슈발리에, Fractal Flower, 2023. © Miguel Chevalier

미구엘 슈발리에는 전통적인 예술 기법과 현대의 기술을 결합하여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도전하는 상호작용형 미디어 아트 작품을 제작해 왔다. 그가 만든 작품들은 과거와 현재, 가상과 현실, 자연과 인공 등 다양한 요소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경험과 인식을 제공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예술적 표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다양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점점 더 디지털화되면서 예술적 표현의 잠재력 또한 점차 커지고 있다. 슈발리에의 작품은 기술을 활용한 문화적 경험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점에서 예술의 미래를 모색하는 데 중요하게 기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