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글을 활용한 타이포그래피(Typography)가 자주 눈에 들어온다. 레터를 활용한 디자인은 로마자가 대부분이었던 과거와 달리 세계 곳곳의 표지판에서, 의류나 소지품 등에서 한글이 자주 보이는 요즘이다. 그간 알파벳이나 한자 또는 아라비아숫자를 이용한 타이포가 주를 이뤘던 흐름과 비교해 보면 한글의 위상이 꽤 높아졌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듯 한글의, 한글을 위한, 한글에 의한 축제가 벌어졌다. 바로 지난 9월 하순부터 10월 중순까지 3주간 문화역서울284에서 진행된 ≪타이포잔치 2023: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다.
≪타이포 잔치≫는 글자의 예술로 주목받고 있는 타이포그래피의 최근 경향을 알아보고 광고와 기타 매체 속 타이포그래피 활용 사례를 살피는 세계 유일의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다. 한글을 소유한 나라답게 우리나라가 주축이 되어 진행되고 있으며, 소리와 사상을 조화롭게 담아 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과학 문자인 한글에 대한 자신감에서부터 출발했다. 올해로 8회를 맞은 이번 행사의 주제는 타이포그래피와 소리였다. 이번 비엔날레에는 전 세계 16개국에서 온 서른아홉의 작가와 팀(총 53명)이 함께 이끌었다. 이들은 문자와 소리, 시각과 청각, 사물과 신체를 연결하며 실험과 실천을 아우르는 작품을 선보였다.
글자에 소리를, 의미에 영상을 입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어쩐지 소리부터 흥미롭고 귀여운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였다. 예술감독을 맡은 박연주 디자이너는 “따옴표는 곧 들여올 소리를 암시하고 이미 읽힌 문자의 흔적을 내포하고 시각과 청각을 상호 번역하거나 교차시켜 서로 다른 감각이 만드는 차이를 드러낸다”며 “그래픽디자인뿐 아니라 문학, 무용, 조각, 만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과 함께 연결 짓는 예술로서 타이포그래피를 다루며 그 확장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글자로부터 시작된 소리가 영상으로 확산되거나 또는 그 반대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예술의 발견을 다룬 셈이다. 이러한 기획 의도는 그간 타이포잔치가 꾸준히 시험하며 추구해 온 담론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획 의도는 지난해 9월 ≪타이포 잔치 2023≫의 사전 행사로 열린 ≪타이포잔치 사이사이 2022-2023≫에서도 잘 드러난다. 프랑스 디자이너 알렉스 발지우(Alex Balgiu)는 문자와 소리의 관계를 시를 중심으로 살피는 강연에서 문자와 소리의 관계를 탐색했다. 이 기조는 올해에도 이어졌는데, 다양한 그림, 영상, 설치미술 전시와 함께 손영은 작가의 낭독 공연 <종이울음>, 양위차오 작가의 구술 즉흥 공연 <칠판 스크리보폰> 등 공연, 워크숍, 강연이 입체적으로 진행됐다.
전시장 1층 중앙홀에는 관객이 직접 제어 장치를 움직여 화면에 표시되는 글자꼴을 원하는 형태로 변형시키는 조효준 작가의 설치 작품〈문자들: 쏐뽙힗〉, 광고의 형식을 취하지만 상업적인 메시지 대신 친사회적(pro-social)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크사베리 키르클레프스키(Ksawery Kirklewski) 작가(폴란드)의 3채널 비디오 애니메이션 연작 <GIFs>, 기고받은 글을 재배열하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거나 웹에 특화된 읽기 형식을 실험하는 타이거 딩선(Tiger Dingsun) 작가(미국)의 반응형 웹사이트 <리딩 머신>과 <I Never Want to See the Same Image Twice!> 등이 관객을 맞았다.
오른쪽으로 들어선 3등 대합실에는 좀 더 실험적인 작품들이 시선을 끈다. <transCRIPted>는 ᄌᄌᄌᄌ제롬 엘리스 작가(미국)가 2020년 한 낭독 행사에서 발표한 내용을 녹음 파일로 재생하고, 말을 더듬는 부분을 포함해 자신의 말소리를 메모장에 실시간으로 타이핑하는 온라인 퍼포먼스 비디오다. 이윤정 작가의 <설근체조>는 혀와 혀뿌리의 운동으로 안무의 기술을 구축하면서 춤의 역사와 맥락에서 누락되어 온 대상인 혀에 주목해 신체 운동이 예술작품으로 변형되는 과정을 실험했다.
럭키 드래건스(Lucky Dragon) 작가(미국)의 <Visionreport>는 소리를 시각 보고서 형태로 녹취하는 방법을 보여주는데 컴퓨터로 생성된 패턴과 함께 손으로 재빨리 그래픽 표기를 스케치해 듣는 행위와 보는 행위를 보여주는 비디오 작품이다. <Trust Fall Into the Gap>은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린시절 자연스럽게 익힌 어머니의 언어, 포르투갈어에도 익숙한 알파벳 예술가인 내트 파이퍼(Nat Pyper) 작가(미국)가 두 언어의 틈을 좁히려는 시도이자 발화 연습을 담았다. 부인 대합실에 전시된 <Love Letters No. 1, 2, 3, 8, 9>는 슬라브스 앤드 타타르스(Slavs and Tatars) 작가들(다국적)의 카펫 작품이다. 러시아와 튀르키예의 20세기 문자 개혁을 중심으로 국가가 말에 특정 문자를 강요하는 알파벳 정치를 다루며, 모국어를 외국 문자로 읽고 써야 하는 고통스러운 경험과 이를 수용하는 과정을 풍자한다. 즉 언어 탈취의 희생물이자 근대화의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증거로서 잃어버린 글자와 불협하는 소리, 문자의 오역 등을 다루고 있다.
한글 타이포, 크리에이티브의 영역을 넓히다
타이포그래피가 주목받으며 한글을 활용한 광고도 눈에 띈다. 예전에는 신문 등 인쇄광고를 중심으로 타이포를 적용한 경우가 주를 이뤘지만, 최근에는 영상 광고에서도 자주 눈에 들어오는 요즘이다. 특히 여태까지의 타이포가 단순 정보 고지나 통계, 그래픽 등 제한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주변 요소에 그쳤다면, 이제는 광고 전체를 이끄는 크리에이티브의 중심에 서는 사례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기업은행은 리드미컬한 타이포그래피를 과감히 사용해 기업을 위한 기업은행의 서비스 IBK 창공, IBK BOX, 글로벌 액셀러레이팅을 차례로 소개한다. 젊은 기업가들의 모습을 빠른 화면 전환과 큰 자막을 통해 보여주며 그들의 이야기를 타이포로 다시 한번 강조한다. 자막이 카피이자 비주얼로 기능하며 주목도와 전달력을 높이면서, 젊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기업은행의 아이덴티티로 삼도록 만든다. 재미있는 스토리와 차별화된 서비스를 타이포그래피로 보여주는 광고도 있다. CJ대한통운의 더 운반 광고 이야기다. 무언가 부족하고 불안해 보이는 덜이란 글자에 트럭이 돌진해 플러스를 의미하는 ‘더’로 만드는 과정이 유쾌하고 흥미롭다. 전반부의 덜덜덜과 후반부 더더더를 한글을 활용해 대립시켜 새로운 서비스의 장점과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일에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옥외광고에도 한글 타이포가 새로운 톤앤매너를 만들고 있다.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유명 슬로건으로 잘 알려진 유한킴벌리의 옥외광고가 삼성역 코엑스 앞 케이팝 스퀘어 전광판 등에서 송출됐다. 유한킴벌리는 39주년 반성문이란 타이틀로 메시지를 전했는데 한글 텍스트와 컬러만으로도 임팩트를 남겼다. 브랜드의 진심이 느껴지는 진정성 있는 메시지가 소비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캠페인으로 이어져 반향을 일으켰다. 글로벌 OTT 넷플릭스가 서울역 맞이방에 설치한 옥외광고도 신선하다. 이들은 기차를 기다리는 이들이 공감할 만한 상황을 글로 제시하며 콘텐츠 제목과 연결시켰다. 넷플릭스 콘텐츠와 관련된 내용을 위트있게 담아낸 짧은 메시지가 시선을 끈다. 특별히 넷플릭스는 영상 콘텐츠에 대한 시의성 있는 이슈를 끄집어내 그때그때 카피를 바꾸는 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한글 타이포그라퍼 안상수 작가는 “대개 글자는 시각 문화가 아닌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림이나 영상을 시각 문화라고 하는데, 그 문화의 가장 기반에 있는 게 타이포그래피예요.”라고 밝힌 바 있다. 시각디자인은 물론 디자인 전반에서 그 본 바탕을 이루는 게 바로 타이포그래피라는 의미다. 문화의 근간인 문자는 우리의 생각은 물론 언어가 담고 있는 미묘한 감성까지 담아낸다. 문화를 넘어 일상의 아이콘이 된 셈이다. 이것이 곧 메시지의 명료함과 직관성을 높이는 타이포그래피가 가장 트렌드에 민감하다는 광고계에서 크리에이티브를 이루는 새 축으로 각광받고 있는 이유다. 여전히 K-컬처에 이목이 집중되는 시기를 지나는 지금, 한글이 새로운 문화의 코어로 또 한 번 비상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