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그리고 올림픽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한 88올림픽. 유명세만큼이나 역사상 의미 있는 행사 중 하나로 꼽힌다. 1988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첫 회 주제 또한 88올림픽이었다. 예상 가능한 전개 속에서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마스코트 호돌이나 참여한 선수들의 이야기가 아닌 피켓 걸을 맡게 된 어느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들려줬다는 점이다.
올림픽이라는 국제 행사가 우리 일상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그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는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기소개보다 올림픽 소개가 먼저였고, 본인이 처한 힘든 상황을 이야기하기보다 국가 행사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많은 사람이 보고 있을 공식적인 인터뷰 자리에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싶지만,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시 되는 것에 당연함을 느끼고 사명감을 표하는 것이 익숙한 듯한 말투와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다큐멘터리 영화 <상계동 올림픽>은 특별한 편집 없이 날 것 그대로의 장면을 담아내었다. 갈 곳 없는 이들이 겨우 터를 잡아 애써 살던 곳을 무자비하게 부숴 버리는 철거반 사람들과 상처 입고 피를 흘리면서도 저항하는 철거민들의 모습이 비쳤다. 어찌할 도리 없이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는 그들의 울부짖음이 반복되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풍경을 본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울이라는 같은 도시 안에서, 같은 시간 누군가는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위해 땀을 흘렸고,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잃어야 한다는 사실에 슬퍼해야 했다.
그때 깨달았다. 올림픽이 모두에게 축제가 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국가가 치르는 큰 행사 앞에서 개인의 희생은 당연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구나.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구나. 씁쓸하지만 현실이었다. 사람들은 큰 욕심 없이 사는 것에 만족하며 지내고 있었을 텐데, 최소한의 대책도 없이 무작정 쫓아내면 얼마나 막막할까? 겪어본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심정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은 이러한 상황을 잘 알지 못했고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뭐 그분들을 말 들어보면 철거를 안 해야겠죠? 그렇지만 아닌 게 아니라 올림픽 경기도 있고, 한다면 미국인들이 와서 볼 때 미관상으로 좋진 않겠죠.
88올림픽 개최 준비와 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을 소개하는 전시였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머릿속에는 <상계동 올림픽>에 등장했던 장면만 남았다. 불현듯 그때, 2014년에 개최된 브라질 월드컵에 관한 기사를 봤던 것이 생각이 났다.
브라질에서도 월드컵으로 인해 도시 빈민들이 강제 퇴거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도시 빈민들이 쫓겨나는 것은 비단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런 현상이 해결되지 않고 지속해서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올림픽 이펙트
상계동 철거민 이야기를 접한 지 3년이 흘렀고, 또다시 올림픽과 연관된 전시를 접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는 <한국현대건축과 디자인 실천적인 관점에서 올림픽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가 주제였다. 분명히 이 전시주제에 해당하는 분야에서는 올림픽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변화하고 발전했다. 하지만 올림픽 이면을 접한 이후로 긍정적 효과보다는 부정적인 효과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이번 전시내용들이 편하게 와닿지는 않았다. 개인적인 측면이 강하게 들긴 하지만 이것 또한 올림픽 이펙트가 아닐까?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와 목동 지구 아파트 외장 색채 디자인 설계에 대해 소개하는 섹션이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다채로운 색상이 들어간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 설계도와 함께 목동 아파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1986년 상계동 철거가 이루어지기 3년 전인 1983년 목동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올림픽 개최 이전 목동은 서울의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으나 개최가 확정된 후에는 어떻게든 정리되어야 할 지역으로 변해갔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외국인들이 서울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곳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놓고 따져 보았을 때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철거민들을 쫓아내기 위한 핑계는 아닐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목동의 철거대상 건물은 무허가를 포함해 2,359동여에 달했고, 세입자와 가옥주를 합쳐 5,205가구 중 철거를 강요받은 세입자만 1만여 명에 달했다. 가옥주들에게는 연고권을 인정하여 부분적으로 대책이 마련되었으나 세입자들에게는 혜택이 주어지지 않아 1984년 8월 27일에는 양화대교 점거 농성을 시작으로 백여 회가 넘는 크고 작은 투쟁으로 이어졌다.
쫓겨난 그들이 머문 곳을 따라 가보다
3년간 철거민이 할 수 있는 조건들을 지속해서 요구하며 끈질기게 투쟁했지만, 어찌 되었든 그곳에 계속 살 수 없었고, 어디론가 이주해야 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다. 그중에서 일부는 경기도 시흥시로 떠났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88올림픽 때처럼 쫓겨나지 않고 잘살고 있을까? 여전히 남아서 살고 있다면 사라지기 전에, 사라졌다면 존재했던 흔적이라도 담고 싶어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그들이 사는 곳은 서울에서 가깝고도 먼 곳이었다. 전철로 1시간~1시간 30분 정도면 닿을 거리지만 찾아가는 길이 긴 여정처럼 느껴졌다.
도로와 인도가 구분 없이 이어지는 길, 반복적으로 지도를 켜서 확인하고 가야 할 만큼 이곳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생경했다. 공장과 주거지가 혼합되어 있었는데, 평소 서울에서도 이런 곳을 자주 방문했던지라 아주 낯선 건 아니었지만 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사람 인기척이 별로 없어 긴장감이 더해졌고, 혹시 잘못 찾아온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쯤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인공은 방에서 워킹 연습을 하다가 피켓으로 공부 하는 언니 머리를 실수로 치게 된다. 이에 화가 난 언니가 혼내면서 뱉는 대사를 통해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잠시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정부는 군부독재의 정당성을 갖기 위한 3S 정책을 펼치면서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다. 국제사회에서도 국내 정황을 잘 알지 못하도록 다소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데, 올림픽 개최국으로 결정 나면서부터 의도치 않게 급진적으로 개방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도시 정비를 추진하게 되고 철거민들이 대거 발생하게 되었다.
88올림픽은 과연, 모두에게 축제였을까?
당시 대한민국 서울 곳곳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정부는 사회복지 차원에서 지원해 줄 수 있는 부분을 찾기보다는 외국인들에게 이들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인지 강압적인 태도로 철거를 감행했다.
아무런 대책 없이 쫓겨나야 했던 사람들은 거세게 항의했지만 결국 자신이 살던 집을 철거당했다. 철거를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나질 않는데 <88올림픽과 서울>이라는 전시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었다.
양평동 철거민들의 복음 자리 마을,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당산동, 사당동 철거민들의 한독마을, 목동 철거민들의 목화연립이 모여 있던 곳. 세 개의 마을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여 서로 교류하며 지역공동체 구성을 위한 커뮤니티를 만들고 다양한 활동들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목화연립을 제외한 복음 자리 마을과 한독마을은 재개발되어 아파트가 들어섰다. 복음자리마을과 한독마을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사는 아파트일까? 살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의문을 안고 걷다 보면 목화연립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에 띄는 건물이 보인다. 나지막한 언덕 위, 작은 소규모 공장과 저층 아파트와 어울려 위치한 목화연립은 ㄷ 형태로 구부러진 복도를 가진 빌라였다. 복도 끝 모서리 부분이 둥글둥글하고 칠해진 페인트 색이 밝아서 전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당시 철거민촌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던 정일우 신부가 독일에서 얻은 지원금과 10%의 이자를 내는 정부 융자금으로 지었다고 한다. 목동 출신들이 잘 화합해서 살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고, 모든 세대가 외부 복도를 통해 다 연결되어 있고 야외극장으로도 활용 가능한 중앙 광장을 향해 문이 나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세부적인 구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주민들을 만났으면 좋았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코로나 19) 목화연립이 사라지지 않고 잘 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5년 전 인터뷰 이긴 해도 대를 이어 사는 주민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곳에서는 더 쫓겨나지 않고 지속적인 삶이 가능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시간이기도 했다.
올림픽 이후 남겨진 숙제
이렇게 개발 이전의 상계동과 목동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은 서울 밖으로 밀려났다. 정부의 무책임한 행동에서 비롯된 상황이 마지막까지도 무책임한 결과를 낳았다. 사람들은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고, 어떻게든 살 집을 구해야 했다. 목동 철거민들의 항의 과정에는 집을 소유한 가옥주와 세입자, 사회운동가들 등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불안한 상황 속에서 세입자와 가옥주 모두 자신들이 살아야 할 길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서로 간에 불신과 갈등도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결과적으로는 해결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서울 밖으로 떠나야 했던 그들의 현실이 서글퍼 보였다. 목동 철거민들이 살았던 안양천 둑은 그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잘 정리가 되어 있다. 버려진 땅이나 마찬가지였던 곳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