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수의 도시들은 저마다의 역사와 문화로 대표되는 건축물을 가지고 있다. 건축과 공간은 도시인의 삶에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시민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울은 이제 메트로폴리탄 도시로서 규모나 인구 면에서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다. 풍부한 경제∙문화∙예술 자본이 흐르고, 사람과 사람이 이어진 도시로서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확립해가는 시기라고 느껴진다.
나는 그런 서울에서 태어났고, 여전히 서울에서 살아가고 있다. 업무로 종로를 자주 오가는 길에 서대문의 생소한 건축물과 풍경이 비쳤다. 버스를 타거나 걸을 때 서대문 근처 언덕에서 보이는 저곳은 어떤 장소일까. 바로 서울도시건축센터였다.
서울도시건축센터는 서울 건축물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발견하여 알리는 공간이다. 그에 대한 확장으로 시민들의 도시생활을 이야기하는 <슬기로운 도시생활>의 시즌 2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건축의 의미를 세우고 공간의 의미를 만드는 주체는 사람이다. 건축에 관한 궁금증부터 시민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까지, 이러한 흐름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평소에 건축, 공간, 도시에서의 삶에 관심이 많았기에, 현장에서 열리는 생생한 도시의 이야기에 함께했다.
<슬기로운 도시생활>은 주제와 관련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 그리고 도시 내부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가진 참여자가 편안히 대화하는 형식이었다. 내가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시즌 2의 첫 번째 대화는 “넥스트 공유도시 : OPEN & SHARE”였다. 패널로는 기획자이자 건축 저널리스트로서 영국에서 시작된 건축전문축제 오픈하우스(OPENHOUSE)를 서울에서 선보인 임진영 님, 을지로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 산림조형을 운영하는 소동호 님, 임팩트 디벨로퍼 MGRV의 코리빙 브랜드 맹그로브(MANGROVE)를 기획 및 운영하는 박찬빈 님이 함께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오프라인에서 이루어지던 연결이 가로막힌 지금, 앞으로 우리가 공유할 것의 다양성과 플랫폼, 커뮤니티뿐 아니라 도시와 밀접한 키워드인 로컬, 건축,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본격 대화에 들어가기 전, 워밍업 보드에 부착된 질문을 무작위로 골라 함께 답하는 여는 대화를 나눴다. 소동호 님이 고른 질문은 최근 코로나로 맞은 일상 전반의 변화였다. 코로나의 대유행으로 걱정과 불안이 일상에 파고들고, 특히 인구가 고도로 밀집되어 사회적으로 거리가 밀착될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서울이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은 공통된 대화를 나눴다. 현장에서 직접 보고 만지는 경험이 사라진 아쉬움뿐 아니라 비대면 화상회의의 증가로 개인의 사적 공간이 스크린을 통해 개방되며 여러 이슈가 생겨난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나 또한 평소에 지인이나 동료와 대화하며 여행과 같은 오프라인 경험의 그리움을 나눴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우리가 포기하고 배려해야 할 것에 대한 인식, 만남을 통한 직접적인 교류의 그리움 등은 나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위기 속에서도 서로 배려하며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확산을 막으려는 정부와 시민의 노력이 이루어졌다. 비대면을 위한 적응을 잘해오는 셈이다. 또한 코로나-19의 위기에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부분은 있다. 소동호 님은 반대의 시선으로 위기를 바라보았다.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개인의 시간, 시공간의 제약 없는 웹에서의 만남이 갖는 장점도 분명 있었다. 지금은 도시 속에서 이어졌던 피상적인 관계∙시간∙만남의 간소화, 개인의 생활에 집중하는 삶의 방식이 주목받는다. 홈루덴스의 재부상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이어가며 워밍업의 시간을 마쳤다.
패널과의 본격 대화, 임진영∙소동호∙박찬빈
“가치를 나누고 교류하는 중간 지대를 OPEN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적 영역의 보호와 상호 간의 신뢰죠.”
임진영 님이 오픈하우스 서울의 캐치프라이즈인 “도시의 문턱을 낮추고 건축을 만나다”를 소개하며 패널 토크가 시작됐다. 오픈하우스 서울은 좋은 건축물을 직접 보고 경험하며 사람과 도시의 접점을 찾는 일종의 플랫폼이다. 숨겨진 건축물과 공간을 방문할 수 있다는 호기심을 끌며, 축제 기간마다 순식간에 신청 인원이 마감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건축을 물리적으로 사용하는 공유의 형태는 아니지만, 한정된 시간동안 탐방하고 탐색하며 건축을 함께 향유하고 이야기하는 관점에서의 공유가 이루어지는 축제다.
좋은 행사의 배경에는 대개 많은 고민이 뒤따른다. 임진영 님 또한 여전히 고민을 안고 있다. 해외는 공적 영역에도 좋은 건축물이 많은 반면, 국내의 좋은 건축물은 대부분 사적 영역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행히도 서울시도시공간개선단을 비롯한 공공건축의 영역에서 좋은 공간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지만, 임진영 님은 여전히 부족한 공급을 짚었다. 오픈하우스 서울의 목표는 사적 영역의 보호다. 단순히 문을 여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고, 사적 영역을 잘 보호하고 상호 간 신뢰를 쌓는 것이 앞으로의 오픈하우스 서울이 지켜야 할 가치라고 강조했다. 사적 영역의 보호가 사회적으로 약속된다면 전보다 더 많은 공간의 문이 불신과 경계 없이 열릴 수 있다. 도시를 살아가는 모두가 곱씹어야 할 부분이다.
주거 환경이 개선되면서 집이라는 공간의 기능∙구성∙역할∙사생활의 범위도 변했다. 임진영 님은 나태하고 게으른 거실의 탄생도 그 변화 중 하나임을 짚었다. 사적 영역이 존중되지 않던 시절, 집은 누구든 오는 것이 허용되는 장소였다. 지금의 집은 손님을 초대하는 것이 드문 사생활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처럼 중간 영역이 사라져 도시에서 교류되는 반공적 공간, 혹은 전이 공간도 함께 사라졌음을 임진영 님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사적 공간은 존중하되 누군가를 1년에 한 번쯤 초대해 그 공간의 가치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보호하는 것이 오픈하우스 서울의 출발점이다. 그런 만큼 도시에서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공존하는 방법을 고민한다는 임진영 님의 이야기는 평소에 듣기 힘든 관점이라 흥미로웠다.
“구세대와 신세대가 일대일로 만나 지식을 공유하며 협업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영향이 생겨요. 을지로가 조금씩 그 변화를 이끌고 있죠.”
다음 패널이었던 소동호 님의 이야기는 을지로에서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로 출발했다. 공동화 현상이 심각했던 6년 전의 을지로는 중구청의 정책으로 예술가들이 빈 점포에 입주하며 새로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였던 소동호 님 또한 산림동에 자리를 잡고, 을지로 기반의 다양한 프로젝트에 기획자이자 디자이너로 힘을 더했다. 그가 총괄 아트디렉터로 참여한 <by 을지로>는 중구청과 서울디자인이 국내 유명 디자이너와 을지로 조명거리의 상점을 1:1로 연결해 을지로만의 독창성이 담긴 조명 디자인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다. 지역 자원과 특정 산업을 바라보고 조합하여 유기적인 지식 공유를 만들어낸 디자이너의 접근 방식이 새로웠다.
또 다른 공유의 관점이 담긴 소동호 님의 프로젝트는 <서울의 길거리 의자들>이다. 을지로 거리에 널려있는 의자를 사진으로 기록해 온라인, 포스터 등으로 아카이빙하며 색다른 도시의 요소를 사람들에게 전달(공유)한다. 최근 많은 산업이 기획자이자 디자이너의 태도를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그 태도에서의 고민과 연계성, 새로운 시도를 소동호 님과의 대화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기획은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지역과 공간을 고민하며 자생성을 살리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근래의 을지로는 힙지로라 불리며 많은 주목을 받지만, 그 단면에는 특정한 부분의 모습만이 부각되는 아쉬움 또한 나눴다. 결국 도시와 산업은 유기적으로 얽혀있어, 도시인이 전체적인 시각을 가져야 서울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 모두가 공감했다.
“가볍게 스치더라도 연결된 작은 연대가 혼자서,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패널인 박찬빈 님은 공유 숙박, 공유 오피스 등 공유 비즈니스에서 쌓은 다년간의 경험을 기반으로 공유 주거인 맹그로브를 기획 및 운영하는 커뮤니티 시니어 매니저다. 2010년도에 시작된 공유 비즈니스는 최근 다양한 글로벌 플랫폼이 생기고 기술이 더해져 플랫폼 사업으로서의 본격 궤도에 올랐다고 한다. 이런 심상 공유 비즈니스가 확대되면서 공유 중심의 커뮤니티도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맹그로브의 입주자는 같이 사는 집의 공간 공유자들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연결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발견하고, 좀 더 독립되어 고민하는 시간의 전달이다. 이러한 전달은 단순한 공간 구성과 운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공유의 경험을 기획하고 공동체를 연결하는 커뮤니티 매니저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박찬빈 님이 정의한 커뮤니티 매니저는 브랜드의 접점에서 고객이 경험하는 모든 사이클에 관여하는 사람이다. 커뮤니티∙커넥터∙컬렉터∙큐레이터∙크리에이터라는 5개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멀티 매니저이기도 하다. 공유 산업뿐 아니라 도시의 모든 산업에 필요한 역량이기에, 각자의 분야에서 이런 경험치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누구나 외롭지만 모이기엔 두려운 시점이고, 모여야만 하는 공유 산업이지만 정작 모이기 어려운 시기다. 하지만 대면과 비대면, 독립과 공유를 잘 접목한다면 공유 비즈니스뿐 아니라 지금의 도시에 다양한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가볍게 스치더라도 연결된 작은 연대가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는 박찬빈 님의 마지막 말로 <슬기로운 도시생활> 시즌 2의 첫 번째 대화가 막을 내렸다.
같은 도시를 살아가는 전문가들과 마주 앉아 다양한 이야기를 편안하게 나누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넥스트 공유도시 : OPEN & SHARE”라는 주제 안에서 굉장히 다양한 개성과 분야의 이야기가 나왔기에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 시간이었다. 직전까지의 시간은 우리가 함께 나눌 것의 형태도, 종류도, 플랫폼도 예측할 수 없어 불투명하게 느껴지던 시기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대화를 통해 앞으로 이루어질 공유의 모습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뿐 아니라, 도시를 살아가는 생각과 가치까지 공유할 수 있다.
이야기의 기록과 공유, 좋은 도시를 만드는 길
코로나-19로 변해가는 일상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개인의 가치가 담긴 도시생활이 존중받고, 이러한 기록과 행동이 다양한 프로젝트로 꾸준히 이어진다면 도시의 주체성과 다양성을 확장하는 <슬기로운 도시생활>이 이어지리란 믿음과 기대가 생겼다. 각자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 그리고 공유하는 것. 그것이 좋은 도시를 만드는 길이다. 좋은 도시는 좋은 시민들이 살고 있는 곳, 바로 그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