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대도시를 뜻하는 영어 단어 메트로폴리스(Metropolis)의 어원을 따라가 보면 그리스어 메테르(meter)와 폴리스(polis)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어머니란 뜻의 메테르와 도시란 뜻의 폴리스를 합치면 어머니 격의 도시가 된다. 이처럼 대도시라는 명칭이 굳이 생긴 이유는 안타깝게도 한 국가의 모든 도시가 어머니와 같은 큰 영향력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력과 경제력은 대도시로 집중되며 이처럼 특정 지역이 중심이 되는 현상은 국가의 성장을 이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노동력과 경제력이 대도시로 편중되면 그 반대 선상에 있는 선택을 받지 못한 어떤 도시들은 중요 인적 및 경제적 자원의 점유에서 후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이 심화될 때 발생하는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지역 격차다. 대도시 중심의 발전이 지속될수록 모든 산업과 지역 발전 정책의 수혜를 대부분 대도시가 차지하게 되어 다른 도시들과의 생산성 격차가 점점 벌어진다. 생산성에서 격차가 벌어지면, 노동을 통해 임금을 벌어야 하는 개인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대도시로 떠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다.

 

생산성이 낮은 동네에서는 아무리 일해도 큰돈을 벌기가 어렵고 심지어 일자리조차 별로 없다. 결국 사람들이 떠난 도시는 낙후되어가고 자생력을 잃어간다. 많은 도시가 각자 다른 색깔들을 띤 채로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게 건강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지만, 모든 사람이 거대한 대도시의 발전이 주는 풍요로움만 동경할 뿐 남겨진 도시를 지키는 건 결국 노동력을 잃은 노년층뿐이다.

 

유럽 선진국 가운데 이러한 문제에 가장 직면해 있는 국가를 꼽으라면 영국을 들 수 있다. 영국의 중심부인 런던과 다른 지역의 생산성 격차는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한 세기 전인 1901년의 수준과 비슷하다. 특히 2019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참패하고 보수당이 집권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잉글랜드 중북부와 웨일스 등 낙후된 지역의 주민들이 그동안의 노동당이 보인 지역 발전 정책에 회의감을 드러낸 상황에서 보수당이 지역 불평등 해소 및 국가 균형 발전을 중점 어젠다로 제시한 것에 대한 해당 지역 주민들의 화답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때 보수당이 제시한 공약이 바로 레벨링업(Levelling Up)이다. 건축 용어로 레벨링업은 측량 기계 등을 평평하게 수평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보수당은 이를 지역 간 균형발전을 도모한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영국의 레벨링업 프로젝트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런던과 수도권에 집중된 국가 인프라와 일자리들을 다른 지역과 공유하고 분산하는 작업이다. 국가의 중심 기관과 산업이 지방으로 자리를 옮기면 지역 간 경제 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예측되기 때문이다. 보수당을 중심으로 한 영국 정부는 레벨링업을 위해 48억 파운드 (약 7조 5,000억) 규모의 기금을 조성하겠다고 밝혔으며, 2022년 2월 기준, 이미 11억 파운드가 이를 위해 사용되었다.

2021년 영국 정부가 발간한 레벨링업 백서(Levelling Up White Paper)에 따르면, 레벨링업 어젠다의 구체적인 목표는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민간 경제의 성장을 통한 생산성, 임금, 일자리와 생활 수준의 증진을 꾀한다. 이를 위해 추진 중인 국가사업 중 하나는 지역 대중 교통망 개선이다. 특히 런던과 비슷한 수준으로 지방 도시들의 대중교통 수단을 확충하고 또한 지역 간 이동을 원활하게 하는 교통망 개선 사업을 2030년까지 완료할 계획이다. 또한 노후 기차역을 재정비하는 사업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 창출과 지역 상권 발달에 도움을 줄 계획이다.

 

자유무역항(Freeport) 지정도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다. 낙후된 항구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기업들에게 효율적인 비즈니스 환경을 제공한다. 자유무역항에 선정된 도시에는 세금 감면 및 통관절차 완화 등의 혜택이 제공되어 많은 무역 관련 기업들의 이동이 예상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될 만한 정부 기관들을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이동 배치하려는 계획도 있다. 최근에는 국가 차원에서 1억 파운드를 들여 미국의 실리콘 밸리를 벤치마킹한 혁신 산업 단지를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 조성한다는 발표가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혁신 산업 단지는 지역에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을 이끌고 혁신 스타트업의 활발한 유치를 이끌 것으로 기대되며 동시에 새로운 인구의 유입과 지역 경제 발전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둘째는 지역 간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공공 서비스 수준을 개선하는 일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복지 수준 향상을 의미한다. 영국은 특히 교육, 건강, 직업, 삶의 질 네 가지 분야에 집중한다. 가장 먼저 예산이 투입되는 분야는 교육이다. 영국에서는 그동안 학생들의 독해, 작문, 수학 능력에 있어 계층 및 지역 간 교육 수준의 격차가 심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정부는 2030년까지 교육 수준이 제일 취약한 지역에서조차 삼분의 일 이상의 어린이들이 적정 수준 이상의 학습 능력을 갖추는 일을 목표로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모든 지역마다 기술 교육 기관을 확충해 젊은이들에게 최신 기술 및 직업 교육을 제공하는 것 또한 정부가 중점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사업 중 하나다. 기술 교육을 받은 지역의 청년들은 굳이 대도시에 나가지 않더라도 지역에 존재하는 다양한 직업군에서 활동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된다.

세 번째 목표는 지역 공동체 의식과 소속감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지역 격차가 심화함에 따라 작은 도시의 주민들은 그들이 사는 지역에 대한 자긍심과 애정을 잃었다. 그 때문에 영국 정부는 각 지역을 살고 싶은 동네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우선 치안 인력의 확보에 앞장서고 있다. 치안이 안정되어야 나와 내 가족이 그 지역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다. 때문에 각 지역마다 구체적인 규모의 치안 인력 확보안을 마련했고 많은 지역에서는 이미 채용이 완료된 상태다.

 

지역과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공공시설들도 확충되고 있다. 영국 북부 공업도시 맨체스터의 도심 재개발 지역인 메이필드에는 100년 만에 도심에 대형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며 2022년 공사가 마무리될 계획이다. 이러한 계획은 맨체스터 도심 재개발 플랜의 일환으로 공원을 중심으로 새 주택, 상가, 호텔, 레저 공간, 산책길 및 자전거 도로 보급 등이 계획되어 있다. 이는 동시에 팬데믹 이후 지역 주민들의 야외 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보건 정책의 일환이기도 하다.

 

축구의 종주국답게 축구를 기반으로 한 지역 동호인 스포츠를 활성화하는 일에도 예산이 투입되었다. 프리미어리그를 운영하는 영국축구협회와의 협업을 통해 지역 주민들의 스포츠 시설을 보수하고 스포츠 활동 참여 기회를 늘리는 데 있어 지역마다 한화로 수십억의 예산이 편성되었다.

경찰관 채용에 속도를 내고 있음을 알리는 홍보 글 © 영국 총리실 공식 페이스북
맨체스터에 들어설 메이필드 복합 공원의 조감도 © 메이필드 맨체스터

레벨링업의 마지막 넷째 목표는 지역 사회의 자율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앙 정부가 모든 레벨링업 사업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예산은 지역에서 자율적으로 집행하는 것을 허용한다. 지역에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지역 정부와 지역 사회의 시민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정부는 분야별로 필요한 펀드를 조성해 지방 자치에 기반한 지역 재생을 돕는다. 지역 주도권 펀드(Community Ownership Fund) 및 지역 재생 펀드(Community Renewal Fund), 레벨링업 펀드(Leveling Up Fund) 등을 조성해 각 지역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부분에 예산이 사용될 수 있게끔 조치한 결과다.

 

이렇게 조성된 기금들은 어떤 지역에서는 일자리 확보에, 어떤 지역에서는 직업 교육에, 또 다른 지역에서는 기업들의 탄소 저감 수준을 세계적 기준에 맞추는 일에 사용될 예정이다. 물론 각 기금의 사용처는 다를 수 있지만, 그 우선순위는 지역을 재생하고 낙후된 도시의 인프라를 개선하는 데 최우선으로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현재 레벨링업은 많은 도전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최근 미국 언론사 블룸버그는 한 영상을 통해 레벨링업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분석했다. 레벨링업이 중요 정책 어젠다로 등장했던 것은 3년 전인 2019년인데, 그 이후 팬데믹이 발생하며 영국의 경제가 휘청이게 된 영향도 있다. 많은 예산이 전염병 대응과 보건 복지 및 경기 부양을 위해 투입되었고, 자연스레 레벨링업을 위한 기금 조성은 뒷순위로 밀려났다.

 

최근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국면이 장기화하면서 세계 경제에 타격을 주고 있는데 영국 또한 이를 비껴갈 수 없다. 이러한 안팎의 요인들은 레벨링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 현실적인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한다. 나아가 영국 정치권 내부에서 비롯된 이슈도 있다. 정책적으로는 런던을 비롯한 수도권에 집중된 자원을 분배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제로 영국 내 기득권이 중요 자원 및 국가 중심 기관을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양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도 있다. 또한 보수당이 10년 넘게 집권한 상황에서 여러 이슈로 인해 지지율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 또한 레벨링업 어젠다가 탄력을 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회의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레벨링업 프로젝트에는 생각해 볼 만한 시사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선진국들의 국가적 차원의 중심 의제는 이제 성장이 아닌 재생으로 옮겨가고 있다. 국가가 어느덧 충분한 발전을 일궜다면 성장을 위한 대도시 위주의 발전 전략을 넘어 낙후 지역과 대도시의 격차를 줄이고, 자원의 고른 분배를 통해 한 국가의 여러 지역이 성장의 열매를 고르게 나눌 필요가 있다. 어떤 한 도시가 이미 한 시대에 세계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면 다른 도시들도 그다음 시대에 새로운 주역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물론 무조건 나누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도시에게 있어 재생은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버텨낼 힘을 기르는 일 그 자체가 더 큰 목적이 될 수 있다. 약 처방을 받아야만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그 사람이 온전히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 곁의 도시들이 다가올 미래를 스스로 건강히 잘 버텨낼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