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안 쳉(Ian Cheng, 1984~)은 사진, 영상, 게임, 미디어를 활용해 수학적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을 결합한 라이브 시뮬레이션을 선보인다. 라이브 시뮬레이션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용해 게임 형태의 가상 상황과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비디오 게임 디자인과 인지과학 원리를 기반으로 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교외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그래픽 디자이너인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영상매체를 접하며 자랐다. 특히 쳉의 예술은 영화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년 시절부터 영화관에서 다양한 영화를 관람했다고 밝힌 바 있다. 어린 쳉은 영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영화 속 이야기가 늘 고정돼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관람자가 자신의 의도대로 연출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인데, 그는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추후 자신의 작업에 게임의 방식을 도입했다. 대학에서는 인지과학과 실천예술을 전공했고, 이후 특수효과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다녔으며, 영화 <스타워즈>와 <트랜스포머>의 특수효과를 담당하기도 했다.
쳉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시뮬레이션이다. 본래 시뮬레이션은 상황이나 단계를 모방한다는 의미로, 무언가를 따라 하거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시스템화하는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쳉은 시뮬레이션을 하나로 종합되는 내러티브를 구사하는 매체 또는 내러티브 그 자체로 본다. 내러티브는 관람객들에게 앞으로 어떤 사건이 펼쳐질지를 예측하게 만들고, 세계를 재현하는 원리로서 기능한다. 쳉의 작품에서 내러티브는 일정하게 반복되지 않고 즉흥적이면서도 다양한 이야기가 축적된다.
이안 쳉은 2013년 런던 프리즈(Frieze)에서 1세대 VR 기기인 오큘러스 리프트를 착용하고 관람하는 가상현실(VR) 작업을 선보였다. 쳉은 <엔트로피 랭글러(Entropy Wrangler)>라는 작품을 통해 가상 세계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이 작품은 시각적으로 인식이 가능한 사물이 공중을 부유하면서 다른 사물들을 밀어내는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이때 관람객은 실시간으로 변형되는 사물의 형상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사물들이 부유하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운동들은 작품 제목에서처럼 물질과 에너지가 무질서한 상태로 변화하는 엔트로피와 연결되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은유한다.
작가는 작품 제작 시 초기 조건을 설정하지만, 관람객이 목격하는 과정에서부터 다시 새롭게 이야기가 파생되며 예기치 못한 행동들이 나타난다. 그는 인간과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고정된 결정론적 모델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하기에 사물들이 충돌하는 움직임을 통해 역동성을 발견하고 인간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이러한 그의 작품세계는 2015년에 첫선을 보인 <특사(Emissary)> 연작으로 이어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리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이안 쳉: 세계건설(Ian Cheng: Worlding)》에서 <특사> 연작을 만날 수 있는데, 이 연작은 가상 세계에서 인공지능(AI)을 가진 등장인물이 자연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라이브 시뮬레이션 형태를 띠고 있다.
라이브는 즉각적이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쳉은 여기에 더해 ‘무한의 시간’이라는 의미를 추가한다. 작가가 작품의 진행 과정을 통제하지 않기에 시간의 흐름 또한 무한의 상태로 수렴된다. 쳉은 영원히 재생되는 작품을 만듦으로써 이 시뮬레이션이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기능하도록 만든다.
<특사>는 총 3부작이며, 에피소드 1, 2, 3으로 구성된다. 에피소드 1 <EISOG, Emissary in the Squat of Gods>(2015)은 화산 근처에 살던 고대의 어느 집단에 대한 이미지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이들의 조상은 재에 묻혔고 주술 우두머리의 딸은 재의 잔해에 의해 부상을 입은 상황이 그려진다.
에피소드 2 <EFAP, Emissary Forks At Perfection>(2015-2016)에서는 에피소드 1에서 등장한 고대 공동체의 먼 후손인 인간이 등장하며, 인간의 마지막 표본과 시바견 사이의 관계가 주로 그려진다. 시바견은 인간보다 더 많은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인간의 마지막 표본에 대한 정보를 인공지능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에피소드 3 <ESTS, Emissary Sunsets The Self>(2016)에서는 완전히 진화된 기술을 이용해 초지능을 가진 초생물이 등장하며, 이들은 과거 인류가 느끼던 삶의 감정을 재현하려고 시도한다. 각 에피소드는 <특사>라는 작품의 틀 안에서 세계관을 공유하고 연결되는 지점이 존재하지만, 한 에피소드가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는 순차적 구조를 띠고 있진 않으며, 개별 작품들은 모두 현재 진행의 시제를 지니고 있다.
작품의 제목이 <특사>인 이유는 작품 내부에 두 개의 스크린을 넘나드는 특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특사는 라이브 시뮬레이션이라는 틀 안에서 에이전트(agent)의 역할을 하며 작품을 이끌어간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에이전트는 사용자를 대신해 작업을 수행하는 자율적 프로세스를 의미한다. 에피소드 1의 특사는 주술사의 딸이며, 에피소드 2의 특사는 시바견, 에피소드 3의 특사는 인공지능 물웅덩이이다. 특사의 프로필은 이미 설계되어 있으나 이들이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는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안 쳉의 작품에는 내러티브가 있으나 그 내러티브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초기에 설정된 값 또한 과정 중에 변화할 수 있는데, 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쳉의 관점을 나타낸다. 관객 앞에 시각적으로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이 펼쳐지지만, 작가는 이에 앞서 본질적으로 세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안 쳉의 대표 작업 중 하나인 <백스 오브 빌리프(Bags of Belief, BOB)>(2018)도 주목할 만하다. 정방형의 화면에는 BOB이라는 붉은색의 인공 생명체가 등장하는데, 작가는 BOB에게 기억력과 감정을 다루는 능력, 다른 개체들과 관계를 맺는 능력 등을 부여하고 일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추적한다. BOB는 신체로서의 밥과 정신으로서의 밥으로 구분된다.
BOB의 신체는 다른 유기체들과 마찬가지로 먹는 것으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자신의 생존 방식을 마련한다. BOB의 정신은 프로그래밍을 통해 구축된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로서 자신의 환경과 신체를 이해하도록 설계되었으며, 스스로 규칙을 세우고 수행하는 즐거움을 통해 보상받는다. 관객들은 작품과 연결되는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 받아 밥에게 신념을 심는 방식으로 그의 성격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
쳉의 신작, 장편 애니메이션 <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Life After BOB: The Chalice Study)>(2021)는 뇌에 AI BOB가 이식된 주인공 찰리스(Chalice)가 자아를 찾아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BOB는 찰리스가 마주하는 인생 경로에서 항상 최적의 순간을 찾아가도록 시뮬레이션하는데, 작품을 통해 인공지능이 고도로 발달한 미래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레비(Pierre Lévy)는 자신의 책 『사이버 문화』에서 시뮬레이션에 대해 “모든 상상 가능한 변화에 따라서 현상이나 상황을 바꾸고, 복잡한 대상이나 시스템을 보다 잘 인식하거나 유희적 방식으로 가상적인 세계를 탐구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한 마디로 시뮬레이션을 유희적인 방식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이를 예술에 접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안 쳉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실시간 생성해내는 가상의 공간은 이처럼 예술적 기제로 작동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술 작품을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자 우리가 사는 세계를 재현하는 대상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이안 쳉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 세계가 가상 세계의 기반이라고 보지 않고 동일한 선상에서 각자의 세계를 이끌며 영향을 주고받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관점은 세계가 고정되고 결정된 것이 아닌 기술을 매개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면서 우리에게 인간 존재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고찰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