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한 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이름이다. 20세기 미술을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인 피카소는 회화에서 조각, 판화에서 도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실험을 거듭했다. 상징주의, 야수파,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등 여러 사조를 뒤섞고 재창조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펼친 거장(巨匠)이다. 현재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에 많은 관람객이 몰리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사랑받는 피카소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파블로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예술 공예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화가로서의 재능을 드러냈다. 열네 살이 되던 해 그린 <첫 영성체>(1896)라는 작품에서 이미 옛 거장들의 구도와 색채, 기법 등을 완벽하게 구사했다. 1904년 피카소는 프랑스 파리에 정착해 아방가르드 미술가들과 어울리며 작품 활동을 해나갔다. 피카소는 1973년, 92살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80여 년간 창작 활동을 하며 5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예술 세계가 워낙 방대하며 다양한 작품 경향이 나타나기에 그의 작품 세계를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만, 대체로 청색 시대와 장미 시대로 일컬어지는 초기 작업, 원시미술에 빠져들게 되는 중기 작업, 분석적 입체주의와 종합적 입체주의를 포괄한 후기 작업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색 시대의 출발은 절친했던 친구 카를로스 카사게마스(Carlos Cassagemas, 1880~1901)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파리 몽마르트르에 살며 빈곤 속에서 생활하던 피카소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친구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검푸른 색과 짙은 청록색의 색조로 자신의 절망을 표현해 나간다.
청색 시대로 불리는 이 시기에 피카소는 매춘부, 거지, 방랑자, 빈민의 모습을 그리며 청춘과 사랑, 인간의 삶과 죽음 등을 다뤘다. 청색 시대의 연장선으로 불리는 장미 시대에는 광대, 곡예사, 배우, 점성술사, 마술사 등을 그림 속에 등장시키는데,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장밋빛과 황톳빛 같은 따뜻한 색감과 달리 어둡고 비애적인 감정이 드러난다.
1906년경부터 피카소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등 야수파 화가들을 통해 아프리카 원시미술을 접하게 된다. 그는 당시 서구의 회화 양식에서는 보이지 않던 원시적 생명력을 자신의 그림에 담아낸다. 원시미술 작가들은 서구의 미술가들과 달리 대상에 대해 훨씬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접근한다. 피카소가 원시미술로부터 배운 것은 단순한 요소들로도 얼굴이나 사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인상을 단순화시켜 표현하던 당시 서구 미술의 방식과 완전히 다른 접근이었다. 원시 시대부터는 회화뿐 아니라 판화와 조각 작품을 통해서도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으며, 20대의 젊은 나이에 이미 유명세를 얻게 된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아비뇽의 여인들>도 원시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피카소가 이 작품의 제작을 위해 열여섯 권의 스케치북과 다양한 습작을 남긴 것들을 보면, 그는 훗날 이 작품이 자신의 대표작이 될 것으로 확신했던 것 같다. <아비뇽의 여인들>은 5명의 여인이 360도에서 동시에 보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고,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구도와 심리 묘사가 드러난다. 특히 오른쪽 두 명의 여인이 지닌 위협적인 눈빛은 관람자로 하여금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게 만든다.
<아비뇽의 여인들>의 핵심은 원근법이라는 고전적 규범으로부터 탈피했다는 점이다. 원근법은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묘사하는 방법의 하나로, 멀리 있는 것을 작게, 가까이 있는 것을 크게 그리는 기법이다. 하지만 피카소는 이러한 규범에서 벗어나 여러 시점에서 관찰된 대상의 다양한 모습들을 한 화면에 모두 담아낸다.
원근법에서 탈피한 <아비뇽의 여인들>로 인해 ‘입체주의’의 서막이 열린다. ‘입체주의(Cubism)’는 여러 방향에서 본 사물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내는 혁신적인 화법으로, 대상이 파편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다. ‘입체주의’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은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로 알려져 있다. 아폴리네르는 비평을 통해 입체주의를 현대미술의 중요한 경향 중 하나로 자리 잡게 했다.
입체주의는 크게 분석적 입체주의와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분석적 입체주의는 피카소의 작품보다는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의 작품에서 선명하게 추적해 볼 수 있는데, 그는 일상의 여러 물체를 소재로 삼아 소재들의 윤곽선을 깨뜨리는 기법을 선보인다.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대상을 여러 각도로 해부한다는 말과도 같다. 종합적 입체주의에서는 사물 자체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서로 다른 대상을 도입하는 콜라주가 나타난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을 경험한 피카소는 전쟁에 관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중에서도 스페인 내전 기간 중 발표한 작품인 <게르니카(Guernica)>(1973)가 대표적이다. 스페인의 소도시인 게르니카에서 독일군의 폭격으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이 작품을 2개월 만에 완성하여 파리 국제박람회에서 공개했다. 전쟁의 광포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투우로 상징화한 작품으로, 피카소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현재 한가람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한국에서의 학살>도 전쟁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피카소는 한국에 방문한 적은 없으나,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민간인 대학살에 대한 뉴스를 듣고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피카소는 미군이 자행한 학살을 비판하려는 목적에서 이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화면의 좌우를 분할해 학살자와 피해자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했지만, 관람자의 입장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지, 학살의 주체를 선명하게 알 수 없어 공산당과 자유진영 모두로부터 혹평을 받은 그림이기도 하다. 피카소가 “미군이나 어떤 다른 나라 군대의 헬멧이나 유니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모든 인류의 편에 서 있다”라고 언급한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범인류애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피카소의 후기 작업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기에 하나의 경향으로 분류하기가 어렵다. 입체주의는 물론이고, 신고전주의와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등 당시 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거의 모든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후기 작업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도예다. 그는 60세가 넘어 신화적 주제를 도자기에 표현하면서 자신의 회화 작업과 연결 짓는다. 그는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약 1년 사이에만 대략 2천여 점이 넘는 도예 작품을 제작했다. 풍부한 색채와 강렬한 붓 자국이 인상적인 피카소의 도예 작품들은 회화를 넘어 조형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을 보여 준다. 주제적으로는 인간 생명의 근원을 이루는 에로스를 표현한 작품이 대다수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피카소는 회화 작품뿐 아니라 판화, 조각, 도자기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제작하며 광범위한 예술 세계를 보여 주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 인류애를 작품 속에 표현해 냈다. 피카소의 작품들은 그가 가진 천부적 재능과 끊임없는 열정, 그리고 특정 양식에 머무르지 않는 도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원근법을 기본으로 하던 당시 서구미술의 규범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방법을 발명해 냈다. 시대를 초월한 그의 전위적인 미술 경향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함과 동시에 현대미술의 영역을 넓혔고, 시각적 인식의 역사에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새로운 미를 추구하려는 피카소의 예술정신은 시대를 뛰어넘어 감동과 영감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