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런던, 파리, 헬싱키의 편집매장

“창작가들의 철학을 전달하는 커다란 확성기”

 

독립 디자이너와 신진 공예가의 일반적인 유통 경로는 백화점, 단독 매장, 소규모 점포, 아틀리에, 개인 공방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유통 경로를 안정적인 재정 능력으로 확보하면서, 자신의 이념과 정체성을 지키는 소규모 브랜드의 수가 많을지는 의문이다. 과거와 달리 시장 패러다임이 변하고 리테일러가 증가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유통 채널이 등장했다. 온라인 플랫폼과 프리마켓, 팝업스토어, 편집매장 등은 디자이너와 공예가가 매장 없이도 소비자와 만날 수 있는 요긴한 접점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제품을 물리적으로 전달만 하는 오프라인 매장이 시들해지면서, 브랜드만의 독특한 경험을 종합적으로 전달하려는 리테일러에 의해 각종 테마를 가진 편집매장이 등장했다. 운영자가 자신만의 철학과 전략적인 의도로 상품을 구성해 제안하는 편집매장은 다양성과 희소성, 감성, 개성을 추구하는 까다로운 소비자의 취향을 높은 성공률로 만족시켰다. 작은 규모로 아이덴티티를 지키려는 창작가들의 상품을 한데 모아두기에 편집매장만큼 효율적인 유통 형태를 찾을 수 있을까? 매장 속 상품만 봐도 운영자가 왜 이 디자이너와 공예가들을 선정했는지, 그 확고한 철학과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해외의 편집매장들이 있다.

 

A. Wolf & Badger, 런던

B. Empreintes, 파리

C. Lokal, 헬싱키

A. WOLF & BADGER, London

“디자이너와 소비자 모두를 고려한 편집샵”

홈페이지: https://www.wolfandbadger.com

전 세계의 혁신적인 독립 디자이너와 세공인을 발굴하는 영국의 편집매장 Wolf & Badger(이하 W&B)는 600여 개에 달하는 신진 디자이너 라벨을 취급한다. 패션, 주얼리, 잡화, 홈웨어, 코스메틱 브랜드까지 넓은 영역을 다루는 그레이엄(Graham) 형제가 설립한 이래 보그가 선정한 ‘영국 최고의 부티크’, 타임 아웃(Time Out) 지가 선정한 ‘런던 샵 탑 6’을 기록하며 시장에 안착했다. 2009년 영국의 노팅 힐(Notting Hill)에, 2012년엔 도버 스트릿의 메이페어(Mayfair)에 이어 최근 뉴욕 소호(Soho)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그레이엄 형제는 매출보다 디자이너와 소비자가 만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기 위해 편집매장에 뛰어들었다.

 

사회적 의식이 편집의 기준

 

모든 매장은 컬렉션에 담긴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유하고, 사회적 의식을 가진 잠재적 고객들과 소통해 W&B가 추구하는 철학을 나누는 디자이너와 소비자의 접점이다. 특히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윤리적 측면. 모피와 가죽을 사용한 모든 제품은 입점할 수 없으며, 공정하고 투명한 공급망 관리를 통해 의류 업계에 만연한 노동착취형 생산 공정을 타파하고자 한다. 또한, 제품 판매로 얻는 수익 대부분을 디자이너에게 돌려줘, 영세한 독립 디자이너들의 창의력과 가능성이 재정적인 문제에 발목 잡히지 않도록 돕는다.

<Sustainability sunday>, <The SETT>

정기적인 문화 콘텐츠로 W&B의 철학을 표현

 

W&B는 정기적인 매거진 발행과 문화 공간 운영, 이벤트 기획을 통해 디자인을 대하는 W&B의 철학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시즌마다 발행하는 계간지 <The SETT>는 트렌드를 비롯해 W&B에 입점한 디자이너의 인터뷰, 해당 시즌에 주목할만한 제품과 브랜드를 다룬다. 또한, 매장 지하에 구성된 이벤트 공간은 음악, 설치 미술, F&B를 결합했다.

 

이 공간에서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의 이벤트가 진행된다. <Meet the maker> 시리즈는 디자이너가 직접 소비자와 만나 브랜드 스토리를 전해주는 일종의 대담이다. 브랜드에 따라 칵테일과 핑거푸드, 혹은 신규 컬렉션 할인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 다른 시리즈인 <Sustainability sunday>는 매달 마지막 주 일요일에 모여 환경 지속 가능성과 윤리적 행동에 대해 패션, 디자인, 코스메틱 업계가 취해야 할 방향을 함께 논의하는 자리다. 그 흐름을 선도하는 W&B의 친환경적 브랜드를 소개하는 프레젠테이션이 주 콘텐츠를 이뤄, 브랜드와 매장의 정체성을 강화하며 충성고객층을 늘리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작용한다.

B. EMPREINTES, Paris : Place for crafts professions

“로컬 공예 브랜드를 활성화하는 쇼룸”

 

홈페이지: https://www.empreintes-paris.com

©Estelle Lefevre Photographe

분명한 타깃층과 목표 : 프랑스 공예가의 창작과 네트워킹

 

W&B가 전 세계 디자이너를 대상으로 한다면, 앙프랑뜨(Empreintes)는 프랑스 공예가의 창작 지원과 네트워크 강화를 겨냥한다. 2016년 프랑스 최초의 고급 공예품 편집매장이란 타이틀을 내건 앙프랑뜨는 프랑스 예술공예협회(Atlier d’Art de France)의 회장이자 도예가인 Serge Nicole와 무대 디자이너 Elizabeth Lerich의 주도로 등장했다. 아방가르드 파리지앵 스타일의 진원지인 오-마레(Haut-Marais)에 둥지를 튼 600m²의 4층 공간에는 프랑스 전역의 공예가가 만든 천여 점의 공예품으로 가득하다.

 

앙프라뜨는 더 빨리, 더 많이 쏟아지는 시장의 기성품과 급변하는 소비주의에 반기를 든다. 사람과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공예품을 선정하고, 장인이 만든 단 하나의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한다. 또한, 석수, 도예가, 가구공, 유리 세공사, 레이스 메이커, 깃털 공예가 등 1600여 명에 이르는 예술공예협회 회원들에게 고루 유통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테이블 웨어, 오너먼트, 조명, 가구 등 거의 모든 유형의 공예품은 그 수가 워낙 많아, 시즌별로 매장 디스플레이에 변화를 주며 테마에 맞는 작품을 바꿔 선정한다. 섹션 구성과 매장 인테리어는 사람들이 공예품에 제약 없이, 내밀히 접근할 수 있도록 무대 디자이너인 Lerich의 역량으로 완성된다.

공예가의 작품을 알리는 쇼룸

 

앙프랑뜨는 프랑스 공예가와 작품을 알리는데 무게를 싣는다. 따로 기획된 작가 부스에는 작가의 공방과 브랜드에 대한 정보가 적힌 패널, 사진으로 꾸며져 있다. 제품이 어디서 왔는지,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강조해 프랑스 공예의 장인정신을 매장의 정체성으로 삼게 된다. 대형마트 마냥 모든 제품에 가격표를 붙인 것도 미술관의 유리창 속 공예품을 볼 때 느껴지는 심리적 거리감을 없애주는 대목이다. €24 짜리 샐러드 스푼부터 €9999에 이르는 황동 조각상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공예품을 갖췄다. 이들은 레디메이드의 반대를 지향하며, 프랑스 공방에서 탄생한 장인의 수공예품을 직접 만져보고 느낄 기회를 제공한다.

 

이렇듯 갤러리와 샵의 요소가 뒤섞인 판매 공간 외에는 전시 공간, 공예 서적이 갖춰진 도서관, 진기한 공예품을 모아둔 컬렉션 룸, 공예 관련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 프로젝션 룸, 휴식 공간, 카페 등을 결합한 복합공예문화 공간으로 구성했다. 특히 1층에 위치한 요리 부티크와 오가닉 카페에서는 앙프랑뜨에서 판매 중인 공예품을 커트러리로 활용해 직간접적인 홍보 효과를 꾀했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워크숍은 공예가들이 다루는 직물, 유리 등 특정 재료에 관한 콘텐츠로 짜여있으며, 앙프랑뜨의 공예가가 직접 진행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이벤트로 평가받고 있다.

C. Lokal in Helsinki

“예술가를 위한 갤러리”

 

홈페이지: https://lokalhelsinki.com

예술적 가치를 중시한 갤러리형 편집샵

 

일주일동안 한 권의 책만 선정해 파는 도쿄의 ‘모리오카 서점’을 본 순간, 한 달에 한 번, 한 명(혹은 팀)의 디자이너 작품만 골라 전시하는 핀란드의 한 공예품 편집매장이 떠올랐다. 헬싱키에 위치한 로칼(Lokal)은 핀란드의 신진 독립 공예가를 알리기 위해, 사진작가 캍야 하겔스탐(Katja Hagelstam)이 2012년에 설립한 갤러리형 편집매장이다.

 

최근 핀란드 공예 산업은 해외 소싱을 비롯한 디자인 문화의 단일화 및 획일화로 이전의 입지를 잃은 것이 사실이다. 로칼은 핀란드 공예의 예술적 가치와 장인 정신을 전시하고, 사업 역량이 없는 자국의 젊은 디자이너를 발굴함으로써 수공예 문화의 부활과 존속을 목표로 한다. 또한, 핀란드 공예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그들만의 독창적인 특성과 문화를 강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들의 비전이다. 예술, 디자인, 공예가 공존하는 로칼은 공예가들이 좀 더 성숙한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다.

미술관 전시를 큐레이션 하듯, 제품을 고르다 

 

로칼의 큐레이션은 매달 바뀌는 방식이다. 전시 주제를 먼저 선정한 뒤, 이에 적합한 작가를 섭외해 한 달간 작품을 전시한다. 주제와의 적합성도 중요하지만, 수공예 제품, 장인정신, 소규모 제품이라는 3가지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 도자기, 가구, 키친웨어, 텍스타일, 프린팅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수공예품을 다루고 있다. 앞선 사례들과는 규모 면에서 판이하게 비교되지만, 타 작가의 영향 없이 한 명의 작가를 깊이 파고들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로칼은 비즈니스 역량이 부족한 공예가를 위해 마케팅적 측면을 돕고 있다. 사진작가인 로칼의 CEO 하겔스탐이 상품 이미지 편집과 룩북 제작 등을 맡아 작가들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로칼과 함께한 공예가를 다른 전시나 커뮤니티에 소개해 부차적인 기회를 만들어주며, 로칼 웹 사이트에 모든 전시를 아카이빙해 포트폴리오화 시키기도 한다. 이렇듯 유연한 에이전시 역할을 하는 로칼이 가진 또 하나의 아이덴티티는 바로 카페다. 헬싱키의 유명한 로스터리에서 공수한 커피를 제공하면서, 자신들을 72%의 예술과 28%의 커피가 이루어진 공간이라고 정의내리기도 한다. 핀란드의 커피향을 맡으며 핀란드 디자인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곳.

명확한 컨셉과 작품에 대한 존중에서 기품이 나온다 

 

런던, 파리, 헬싱키의 세 편집매장 모두 브랜드 큐레이션으로서 디자인과 예술에 대한 운영자의 확고한 철학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 매장에 방문하는 소비자는 기존의 양산형 브랜드에서 발견할 수 없는 공예품의 특별함과 마주하게 되고, 창작가는 유통 경로의 부재와 부족한 비즈니스 역량을 편집매장의 관리와 지원로써 채운다. 소비자, 창작가, 공예/디자인 산업이 공생할 수 있는 공익적 편집매장인 셈이다. 특히 지역에 충실한 앙프랑뜨와 로칼의 경우 세계적으로 단일화되어가는 디자인 문화를 탈피해, 각국의 디자인이 독보적인 아이덴티티를 구축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국내의 편집매장이 갖는 시장 내 포지셔닝은 어떨까. 과거에는 높은 인지도를 갖는 유명 브랜드의 입점 여부가 편집매장의 성패를 갈랐다. 하지만 브랜드의 인지도는 매장의 철학을 대변할 수 없다. 어떤 콘셉트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콘텐츠를 채워넣어야 소비자와 창작가, 운영자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문화와 산업이 만족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