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하면 떠오르는 것은?
오로라와 백야, 순록과 진짜 산타클로스, 아니면 자작나무와 자일리톨… 여럿 있겠지만 북유럽 특유의 감성을 전하는 디자인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빙하기 이후 핀란드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썼던 물건으로 인류의 디자인 영감과 변천을 볼 수 있는 행사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핀란드국립박물관(Suomen Kansallismuseo)과 함께 마련한 ≪인간, 물질 그리고 변형 – 핀란드 디자인 10 000년≫ 특별전이다. 이번 행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최하는 최초의 북유럽 역사 문화 전시다. 2018년 10월부터 2019년 2월까지 열린 핀란드국립박물관의 ≪디자인의 만 년≫ 전의 세계 첫 순회전이기도 하다. 한국 전시를 위해 두 나라 박물관이 협업하여 내용을 재구성했다. 핀란드국립박물관, 핀란드 문화재청, 헬싱키 디자인 박물관(Design Museum Helsinki), 알바 알토 박물관(Alvar Aalto Museum) 등에 소장된 고고, 민속, 사진, 영상, 현대산업디자인 등 다양한 범주의 핀란드 문화유산 140여 건이 전시됐다. 우리나라 유물 20여 건을 함께 전시해 인류 문화의 보편성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했다.
전시를 본격적으로 알아보기에 앞서 이름에 주목해보자. 빙하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대략 1만 년의 디자인을 다룬다고 하는데 왜 10,000년 또는 1만 년으로 적지 않고 10과 000년을 띄어서 표기했을까? 이 의문은 전시장에 들어가자마자 만나는 첫 번째 공간 프롤로그 디지털 존(Prologue digital zone)에서 조금 풀린다. 영화 <매트릭스(Matrix)>의 한 장면처럼 벽면을 가득 수놓은 숫자 1과 0의 끝없는 나열과 인트로 영상이 관람객을 맞는다. 해설자에 따르면 1과 0은 이진법의 디지털 세계를 상징한다. 디지털시대인 현재를 상징하는 동시에 이번 전시의 키워드라 할 수 있는 과거와 현대 물질문화의 유사성, 그리고 미래로의 연결을 의미한다고 한다. 전시는 크게 6개 주제다.
1부 – 인간은 사물을 만들고, 사물은 인간을 만들다
1부는 인간과 물질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이번 전시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코너다. 태초부터 현재까지 인류의 도구 사용의 큰 흐름을 볼 수 있다. 생존을 위한 석기시대 양날 도끼는 1차원적 단순한 기능에 점차 손잡이, 홈 등이 더해진다. 쓰임새와 좀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변화한다. 디자인이 가미된 복합도구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같은 시대 우리나라 유물을 함께 보여줘 공간을 넘어선 보편성과 유사성을 함께 제시한다. 필루(Piilu) 형식의 도끼와 함께, 핀란드의 대표 브랜드 노키아(Nokia)가 1994년 만든 최초의 모바일폰 노키아 커뮤니케이터 9000i 모델이 함께 전시장을 장식하고 있다.
2부 – 물질은 살아 움직인다
2부는 물질의 다양한 가치에 관해 다룬다. 자연 속에서 인간도 물질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삼림이 국토 전체의 75%를 덮고 있는 핀란드는 눈과 나무의 나라다. 핀란드의 사람들은 순록 뼈로 송곳을 만들어 자작나무 껍질에 구멍을 뚫었으며, 순록으로부터 식량과 물건을 확보했다.
3부 – 사물의 생태학
3부에서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생 과정을 살펴본다. 현재 핀란드 영역에 인간과 동물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8500년 무렵이다. 사냥과 채집, 사슴 방목, 경작은 새로운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탄생한 생계 시스템이다. 생계 시스템과 관련한 물품들은 핀란드인의 정서뿐 아니라 핀란드적 디자인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엿볼 수 있다. 각종 생활 도구와 함께 나막신, 가죽 부츠 그리고 핀란드와 우리나라의 설피를 비교해서 볼 수 있다. 면 소재의 남성 셔츠 옆에 20세기 대표적 셔츠인 요카포이카(Jokapoika)가 정갈하게 개져 있다. 핀란드어로 모든 소년이란 뜻의 이 셔츠는 남녀 모두가 입는 국민셔츠가 됐다.
4부 – 원형에서 유형까지
4부에서는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은 원형과 다양한 형태로 진화를 거듭하는 유형의 속성을 제시한다. 디자인의 원형과 핀란드 디자인의 진수를 볼 수 있는 코너다. 선조들의 나무의자에서 현대 디자인의 기능성과 단순미가 엿보인다. 이는 운동장 의자로 불리는 폴라리스(Polaris) 의자로, 에어백 의자로 변주된다. 옛 가정에서 쓴 유아용 그네 의자와 식탁 의자, 어부들이 사용한 휴대용 스툴(Stool), 사우나 의자 그리고 섬유 유리로 만든 트라이스(Trice) 접이식 의자까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동하는 듯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5부 – 초자연에서 탈자연으로
5부는 인간의 환경에 대한 이해를 신앙체계라는 관점에서 살펴본다. 과거에는 초자연적인 대상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욕망이 다양한 상징체계와 주술, 제의(祭儀)로 표출되었다. 일상과 영적인 부분이 뒤섞인 핀란드 샤머니즘의 면면이 드러나는 유품들을 만난다.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품도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 영향을 받은 마구류, 치즈 틀 옆에는 핀란드에서 시작된 오픈 소스 운영체계 리눅스(Linux)를 설명하는 노트북이 있다. 리눅스는 자유 소프트웨어와 오픈 소스 개발의 가장 유명한 표본이다. IBM이나 HP 같은 IT 대기업의 후원으로 자리 잡았으며, 뛰어난 기술력으로 전 세계 슈퍼컴퓨터 시장의 99%를 차지하고 있다.
6부 – 사물들의 네트워크
6부는 사물의 관계성에 대해 살펴본다. 사물은 격리된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으며, 상호 작용하기도 하고 보완적이기도 하다. 표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 쌓기와 겹침으로 만들어낸 응집성, 그리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모듈(Module)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틀로 찍어내 겹쳐 놓을 수 있는 의자가 대표적이다. 이번 전시의 진열장도 모듈성을 적용해 제작했다. 이번 특별전에는 핀란드를 공감각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체험 공간이 마련됐다. 원목으로 만든 사우나 공간, 핀란드의 국민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Jean Sibelius)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부스 그리고 대형 오로라를 연출한 영상을 보는 별도 휴게 공간을 만들었다.
≪핀란드 디자인 10 000년≫ 전시는 4월 초까지는 서울에서, 이후에는 국립김해박물관(2020.4.21~8.9)과 국립청주박물관(2020.8.25~10.4)에서 순회 전시를 한다. 지구 반대편 핀란드에서 인류 디자인의 본질적이고 근본적 문제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형식의 융복합 전시라 특별하다. 디자인이 거창한 형식이나 치장이 아닌, 삶에 대한 생각의 표현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전시다. 그 표현의 결 또한 동서고금, 시공간을 떠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디지털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