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한 번쯤 익숙했던 장소가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재개발을 앞둔 동네다. 이미 주민들과 가게 주인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대신 비뚤빼뚤한 손글씨로 쓴 메모만 남겨져 있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동네지만 괜히 마음이 쓰인다.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동네도 이렇게 재개발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저도 재개발 때문에 몇 십 년 산 곳이 허물어진 사람 중 한 명인걸요. 은로초등학교 뒤편, 청호아파트 아래. 여기서 동네 동생들이랑 앉아서 서울우유 먹고 군것질 거리 사다가 맞은편 세탁소 골목에서 땅따먹기하고 놀았는데… 물론 나도 다른데 살다가 이사왔지만 20년을 여기서 살았으니 고향이나 마찬가지인데 이제 나의 고향은 사라지고 아파트촌이 되어 버렸네요.” |
친한 동생과 대화를 나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런 경험이 알게 모르게 다들 한 번씩은 있을 수 있겠구나. 그 이유가 재개발이 아니더라도, 장소가 동네가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익숙했던 물리적 공간(혹은 장소)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예를 들면 자주 들르던 카페, 공방, 서점, 학교, 아파트 앞 상가 건물, 시장 같은 곳 말이다. 다만 사라지는 현상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개인마다 다르므로 누군가는 별일 아닌 것처럼 여기고, 누군가는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상실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장소에 담긴 기억과 추억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정도는 약해도 모른 척하진 않을 것이다.
익숙한 감각 속에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나서 그곳으로 가봤는데, 이미 사라지고 없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혹은 알아볼 수조차 없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 엄마와 손을 잡고 갔던 어린 시절의 목욕탕이 생각났다.
행화탕과 나의 만남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우연히 점심시간에 들린 카페가 과거 목욕탕이었던 공간이었고, 우연히도 행화 커피라는 커피 브랜드 런칭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각자 다른 곳에서 일하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회사에 입사한 동기와 이야기를 나누다 전시 작업을 했던 장소가 행화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시 콘텐츠를 기획하는 회사에서 진행하는 투어를 신청했다가 우연히 들린 장소 중 한 군데가 행화탕이었고, 피아노와 가야금 그리고 대금이 합주하는 공연을 본 것도 우연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어린 시절 엄마와 동생과 함께 목욕탕으로 향하던 그 시간이 생각났다. 매주 일요일 아침 오전, 마치 어떤 의식을 행하는 것처럼 잠도 덜 깬 상태에서 옷도 대충 챙겨 입고 곧장 목욕탕으로 향했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에 가는 길은 괴롭고 힘들었지만 개운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마치 몸의 묵은 때만 벗겨 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때도 벗겨 낸 것처럼 말이다.
장소란 단순히 인간이 살아가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구성된 다양한 차원의 의미들이 축적된 공간이다. 물리적이고 추상적인 공간을 구체적인 장소로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인간의 감정이나 생각 같은 심리적인 부분과 인간의 활동 같은 행위적인 부분이 개입된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 생각이나 행위는 ‘공간을 통한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다.
– p.89 <장소 경험과 로컬 정체성> –
그 덕분에 괜히 마음이 갔고, 행화탕이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자리 잡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재개발 이슈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다.
# 행화탕은 그냥 복합 문화공간이 아니었다.
목욕탕은 내게 단순히 때만 벗기는 장소가 아니라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좋은 장소였다. 지금은 더 이상 가진 않지만, 행화탕이 내게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 실제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느낌으로 만들어 놓은 입구에서부터 연결된 길을 따라 안쪽 공간에 들어가서 앉아 있으면, 진짜 목욕탕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탕이나 샤워 시설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흔적들을 남겨 두었기 때문에 목욕탕 안에 있을 때의 감각이 살아났다. 천장의 목재 구조는 목욕탕 안에 있던 사우나실을 생각나게 했고, 샤워기가 설치되어 있던 벽면 흔적은 탕에서 충분히 때를 불린 뒤 본격적으로 밀기 위해 앉았던 자리가 생각났다. 뜨거운 온수 습기에 의해서 잘 보이지 않던 거울도 벽에 걸려 있었다. 보통의 복합 문화공간과는 다르게 느껴졌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했다. 물론 이쯤 되니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감정이입이 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은데, 적어도 한 번쯤 부모님과 함께 어린 시절 목욕탕을 가본 사람이라면 다들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목욕탕이었던 공간에서 합주 공연과 행위 예술 그리고 전시를 보았다. 이 모든 것이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 장면 자체는 마치 목욕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는 탈의실이자 용모를 꾸미는 공간에서 공연을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목욕탕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는 생경하면서도 아름다워서 잊을 수 없었다. 이때 내가 가진 목욕탕과 연관된 기억은 평생 좋을 수밖에 없겠구나!라고 직감했다.
# 행화탕의 마지막, 행화 장례식
재개발구역에 속해 있던 행화탕은 언제 끝일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현재의 시간들을 잘 견뎌 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끝이 오고야 말았다. 재개발이 확정되고, 2021년 5월 24일까지 이주를 완료해야 했다. 이곳을 운영하던 문화예술콘텐츠랩 축제 행성은 행화 장례식을 마련하여 그동안 행화탕에 관심을 가지고 이용해 주신 분들에게 마지막을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을 내어 주었다. 우연히 만났던 그 날을 기억하며 우연 같지 않은 마지막 우연을 만들기로 했다.
[조문 안내]
: 2021년 5월 22일(토) 오전 10시~오후 10시, 복합 문화예술공간 행화탕 행화탕 (1958~2021)
[조문 시 유의 사항] 1. 평소 일상에서 즐겨 입는 옷을 입고 행화탕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해주세요. |
입구에는 장례식장에서 볼 수 있는 화환이 세워져 있었다. 이제 정말로 없어지는구나! 실감이 났다. 입구와 연결된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한쪽에는 장례식을 위한 상이 마련되어 있고, 한쪽에는 작은 성의를 표할 수 있도록 테이블 위에 조의금 봉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벽면에는 행화탕에 대한 애정 가득한 사람들의 메시지가 가득 쓰여 있었다.
짧고 간결한 메시지들이었지만 행화탕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느껴졌다. 특히나 ‘진작 자주 와 볼걸…’이라는 말에는 무수히 많은 의미를 읽어 낼 수 있었다. 평소엔 당연하다고 느끼고 있던 것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우리가 늘 하는 후회다.
‘조금이라도 더 들여다볼걸’
‘조금이라도 더 자주 올걸’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렇게 사라져 가는 공간을 다시금 들여다보고 되새기며 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던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라지고 없다. 어차피 사라지게 될 공간을 소중하게 여겨본 적도, 여겨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행화 장례식은 일상의 공간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자 경험인 것 같다.
특히나 행화탕의 경우 목욕탕도 목욕탕이지만, 뒤쪽으로 연결된 길을 통해 생전에 목욕탕을 운영하셨던 주인분이 거주했던 집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더욱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번 장례식에서는 그동안 개방하지 않고 있던 공간도 모두 열어서 볼 수 있도록 했다. 창고, 지하 공간, 2층 집, 목욕탕. 한때 동네 사랑방 역할을 했었다고도 전해지는 행화탕은 단순히 한 개인이 운영하는 목욕탕이었다기보다는 동네 주민이 함께 이용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소통의 공간이기도 했다. 하늘 높이 솟아있는 굴뚝을 볼 때마다 미처 알지 못한 이곳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했던 나날들. 그때를 떠올리면서 지금 아니면 더 볼 수 없을 행화탕의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담았다.
# 자세히 들여다보기
입구 문을 열면 곧장 탕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을 안겨주는 곧게 뻗은 길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마련된 평상 같은 공간이 있다.
바닥이 평평한 단면이 아니라 돌이 깔려 있어서 걸을 때 자박, 자박 소리가 난다. 큰 창문 너머로 바깥 풍경도 보이고, 적벽돌의 닳은 흔적들을 그대로 살려 놓은 벽면을 바라보며 그동안 쌓아온 시간을 잠깐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다. 구멍이 나서 빈틈도 보이고, 뭔가 덧대고 칠해져서 질감이 다른 재료들이 섞여 있는 것도 보인다. 온전하게 새것이 아니기에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중간의 작은 연결 통로를 통과하여 안쪽으로 들어오면 이제 진짜 목욕탕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이 없다. 천장의 목재구조, 굴뚝과 연결되는 공간으로 추정되는 구조물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고 있으니 그제야 진짜 실감이 났다.
‘이제 진짜 없어지는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행화탕을 기억하고자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장례식 마지막이 되는 오늘에서야 처음 와 본 사람들도 있고, 시작부터 함께 한 사람들도 있고,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행화탕의 가는 길을 응원해 주었다. 나는 이 시점에서 또다시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다시금 한번 스스로 되물어 보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우리의 일상을 담고 있던 공간이 사라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 사라지는 공간에 안녕을 고하다.
일상의 공간들이 하나둘씩 사라질 때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매번 이 근처를 지날 때마다 아, 아직 잘 있구나!를 확인하고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행위는 복잡한 마음마저 정리되는 의식 같았는데 이젠 그런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재개발이라는 이슈 앞에서 이런 공간들이 지속 가능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아무리 힘들고 복잡한 하루여도 내 집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듯, 온통 시끌벅적한 소음에 사로잡혀 있다가도 내 마음 하나 붙잡아 둘 수 있었던 공간. 또다시 이런 곳을 찾을 수 있을까?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 목욕탕이 여전히 생각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을 지배했던 건 사람들과 함께했던 공간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잘 모른다. 여전히 모른다. 사라지고 나서야 깨닫는다. 얼마나 소중한 곳이었는가를 말이다. 한껏 행화탕을 느끼고 돌아서는 길,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괜스레 앞에서 서성거렸다. 하지만 이제 보내 주어야 한다. 햇빛이 짱짱한 어느 주말 오후, 마지막까지도 사람들에게 쉴 곳을 안겨 주는 행화탕에 잘 가라고 안녕을 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