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3 Dots

▪ 프라모델을 대형 조형물로 구현한 “프라모뉴먼트”가 일본 프라모델의 주요 생산지인 시즈오카의 랜드마크로 떠오르고 있다.

▪ 프라모델은 시즈오카 지역 경제를 견인하는 산업으로서 타미야, 반다이, 하세가와 등 민간 기업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공공의 문화 자산으로 발전했다. 내수 시장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 프라모뉴먼트는 <Good Design>을 포함한 다수 디자인 및 광고 어워즈에서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일관된 디자인적 요소를 바탕으로 시즈오카를 하나의 도시 브랜드로 각인시켰다. 

 


 

문방구 벽면 한편에 빼곡히 쌓인 프라모델 박스들은 어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니카부터 비행기, 함선, 로봇 모형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러너(Runner)라는 틀에 여러 부품이 연결된 프라모델은 각각의 부품을 떼어 조립하는 장난감이다. 하나의 결과물로 완성하는 일련의 과정은 많은 아이들의 창의력을 깨웠다. 그 때문일까? 어른이 되어서도 그때의 재미를 기억하고 취미 생활을 이어가는 마니아가 적지 않다.

 

프라모델의 고장, 시즈오카(Shizuoka)에서 프라모델의 위상은 취미 그 이상이다. 일본에 출하되는 프라모델의 80% 이상이 시즈오카에서 생산될 정도로 해당 산업이 지역을 꽉 잡고 있는데 미니카로 유명한 타미야(Tamiya), 건담으로 알려진 반다이(Bandai), 하세가와(Hasegawa) 등 일본의 대표적인 프라모델 제조사가 이 도시에 모여 있다.

 

박스 크기가 작다고 해서 프라모델을 작은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여기면 오산이다. 프라모델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과 결합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며 세계적인 콘텐츠로 자리매김해 왔다. 1979년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이 나오면서 반다이는 건프라(건담+프라모델)를 출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를 시작으로 여러 애니메이션의 세계관과 프라모델이 결합되면서 타깃층을 넓혔고, 팬덤을 세계적으로 확장했다. 마치 K팝이 스타성 있는 아이돌을 콘서트, 굿즈, 팬덤 등 다양한 콘텐츠와 결합해 음악 장르를 넘어 IP 산업이자 한류를 대표하는 국가 문화적 자산으로 만든 흐름과 비슷하다.

대표적인 프라모델 모형 중 하나인 건담 ⓒUnsplash
시즈오카 도시 브랜딩의 상징 프라모뉴먼트 ⓒHello Navi Shizuoka

도시 정체성의 상징화

프라모델의 성지와 다름없는 시즈오카시는 이를 알리고자 프라모델을 형상화한 대형 조형물을 도시 곳곳에 세웠다. 사람들은 이를 프라모뉴먼트(Plamonument)라 부른다. 조형물이 보여주려는 요소를 프라모델처럼 부품으로 구현해 제작했는데, 2025년 3월 기준 시즈오카에는 총 15개의 프라모뉴먼트가 설치되어 있다. 제1호 프라모뉴먼트에 적힌 모형의 세계 수도란 문구에서부터 자부심이 느껴진다. 눈에 띄는 외관과 누가 봐도 프라모델에서 착안한 것처럼 보이는 공공물은 흥미를 끌기 충분하다.

 

프라모뉴먼트가 동상이나 기념비처럼 무언가를 기리기 위해 제작된 것만은 아니다. 일부 조형물은 실제 쓰이는 집기와 결합되었다. 시즈오카 청사 앞에 위치한 빨간 우체통 프라모뉴먼트에서는 편지를 부칠 수 있다. 일본 최대 통신사인 NTT와 협력한 공중 전화기 역시 실제 전화를 걸 수 있으며, 시즈오카 역사 안에 설치되어있다. 흡연 구역에서도 프라모뉴먼트의 역할은 톡톡히 드러난다. 반투명 벽면 사이에 프라모뉴먼트와 재떨이를 결합한 공공 조형물은 시각적으로 눈에 띈다. 이처럼 시즈오카시는 공공장소에서 시의 상징물을 지속적으로 노출해 지역 주민에게는 프라모델을 시즈오카의 상징으로 각인시키고, 관광객을 위한 필수 코스도 마련하는 중이다.

프라모뉴먼트 우체통 ⓒJDN
프라모뉴먼트 공중 전화기 ⓒJDN

흥미로운 점은 다양한 민간 기업의 참여로 특색 있는 프라모뉴먼트의 개수가 점차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음료 기업인 선토리(SUNTORY)는 자판기와 프라모델을 결합했는데,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옆에서 마시고 갈 수 있도록 벤치를 프라모델의 일부로 표현했다. 캔과 플라스틱병을 연상시키는 구성품, 병따개를 연상시키는 곡선의 형태를 추가해 디테일까지 챙겼다.

 

프라모델에 진심인 호텔도 대형 사이니지로 프라모뉴먼트를 활용했다. 시즈오카역 인근에 있는 호텔 윙(Hotel Wing)은 욕조, 캐리어, 침대 등으로 부품을 표현했다. 호텔 윙은 프라모뉴먼트뿐만 아니라 호텔 내부에도 프라모델을 활용한 경험적 요소를 마련했다. 내부 사이니지도 프라모델 디자인을 차용했으며, 프라모델 조립에 집중할 수 있는 전용 공간(Modeler’s room)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프라모뉴먼트는 탄탄한 산업적 기반을 바탕으로 새로운 형태의 문화 콘텐츠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이다. 동시에 공공적 가치를 더해 시즈오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기도 하다.

프라모뉴먼트 벤치와 자판기 ⓒSUMPU-WAVE
프라모뉴먼트 호텔윙 사이니지 ⓒHotel Wing

프라모델로 도시 조립하기: 플라스틱 모델 프로젝트

프라모뉴먼트는 일회성 캠페인의 산물이 아니다. 시즈오카시에서 추진하는 플라스틱 모델 프로젝트(Plastic model project)의 일환이자 가장 대표적인 활동으로 꼽힌다. 프라모뉴먼트의 맥락을 알기 위해서는 플라스틱 모델 프로젝트의 이해가 중요하다. 이 프로젝트는 2020년 2월 시즈오카시, 일본의 대표적인 광고회사인 하쿠호도의 시즈오카 지사(Shizuoka Hakuhodo), 하쿠호도 그룹 산하의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인 하쿠호도 케틀(Hakuhodo Kettle)이 3자 협약을 맺으며 시작되었다.

 

시즈오카는 인구 70만의 도시로, 당시 관광객 감소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했다. 오랜 고민 끝에 지역의 주력 산업인 프라모델을 중심으로 시즈오카를 부흥시키고,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플라스틱 모델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프라모뉴먼트가 환경 조성 차원에서 주축을 담당한 것처럼 이와 연계된 인적 자원 개발, 콘텐츠 생산 관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병행했다. 고등학생 대상의 프라모델 경진 대회, 프라모델 제조자의 시내 초등학교 파견 등 프라모델 홍보와 체험 기회를 제공했다.

 

2023년, 프라모델에 특화된 아이돌을 홍보대사로 임명한 것도 흥미롭다. 걸그룹 링클 플래닛(LINKL PLANET)은 건프라로 유명한 기업 반다이 그룹의 반다이 스피리츠(BANDAI SPIRICTS) 주도로 기획되었다. 프라모델이 부품과 부품을 이어 하나로 완성되는 것처럼 “프라모델, 팬, 더 나아가 세상을 연결하고 싶다”는 의지를 이름에 담았다. 프라모델을 언박싱하거나 조립하는 영상을 공개하고, 제조공장에서 싱글 앨범 재킷 사진까지 찍었다. 이렇듯 시즈오카시는 프라모델을 엔터테인먼트 요소와 결합하며 기존 팬뿐만 아니라 관심이 없던 이들에게까지 다가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렇게까지 프라모델에 진심인 이유는?

역사적 배경을 함께 알면 프라모델이 시즈오카의 문화적 아이콘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더 선명히 이해된다. 시즈오카 일대는 산이 많고 우수한 목재가 생산되는 지역이었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번영했던 에도 시대(1603~1868) 때부터 목공이 발달했으며 목공에 기반한 전통 가구, 건축, 칠기 공예로도 유명했다. 당시 에도 시대를 연 최고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Tokugawa Ieyas)는 쓰루가 성(시즈오카 성)을 성대하게 재건하기 위해 목수, 금속공 등 여러 장인을 시즈오카에 정착시켰다. 많은 장인이 모인 만큼 해당 산업은 자연스럽게 활성화되었다.

 

1930년대에 일본 항공 기술이 발전하면서 시즈오카에 모형 비행기를 만드는 업체가 생겼다. 목재를 사용한 비행기 모형이 인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전에는 목재 모형 비행기가 학교에서 비행기 구조를 가르칠 때 쓰일 정도였다.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외국의 플라스틱 프라모델이 일본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는 플라스틱 제조 기술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투입되는 인적 자원, 제조 비용 등에 많은 변화가 동반되며 목재에서 플라스틱 중심으로 제조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플라스틱은 생산성 측면에서 매력적인 소재였다. 목재보다 훨씬 가벼운 데다 틀에 찍어내는 방식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정밀한 부품 제작에 용이했다.

 

이때부터 타미야, 반다이, 하세가와 등의 기업이 6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프라모델 산업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타미야는 목재 모형 제조에서 출발했으나, 1960년대 들어 첫 프라모델 제품으로 1/800 스케일의 야마토 전함을 내놓더니 전차, 전투 비행기 등 밀리터리 모델을 출시해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1980년대 사륜구동 미니카를 선보이며 붐을 일으킨 주역이기도 하다. 하세가와 역시 목제 모형 중심의 기업이었으나 1961년 “글라이더”란 첫 프라모델 제품을 출시했다. 정교한 비행기 모형을 다수 만들어 “비행기의 하세가와”라는 별명까지 붙었으나 지금은 다양한 라인으로 확장됐다. 반다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1980년대 건프라를 출시했으며, 출시 6개월 만에 100만 개 이상 판매했다. 기존에는 전차, 군함 등 실물을 축소 재현한 모델이 주를 이뤘다면, 건프라 등장 후 캐릭터 중심의 시장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런 간략한 히스토리만 들여다보면 기업들이 앞다퉈 경쟁만 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즈오카를 거점으로 성장한 만큼 각 기업은 지역과 협력하여 프라모델 시장 활성화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시즈오카 관광 명소 중 하나인 하비 스퀘어(Hobby Square)에 각종 제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매년 5월 열리는 프라모델 모형 중심의 전시회 <시즈오카 하비쇼(Hobby Show)>도 놓쳐선 안 될 중요한 이벤트다. 하비쇼는 올해로 63회를 맞이해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며 2018년 방문객 수만 7만여 명에 이를 만큼 각국의 마니아와 기업이 방문한다. 

프라모델 모형 전시회 "시즈오카 하비쇼(Hobby Show)" ⓒexcite.shizuoka
프라모델 모형 전시회 "시즈오카 하비쇼(Hobby Show)" ⓒexcite.shizuoka

이처럼 지역 정부 차원에서 다방면으로 노력한 결과, 시즈오카만의 프라모뉴먼트는 눈에 띄는 성과를 이뤘다. 디자인적 가치와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다양한 어워드에서 수상했다. 특별히 2023년에는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일본 유명 광고대행사인 덴츠 광고 대상에서 종합 상을 받기도 했다.

 

 

프라모뉴먼트가 포토존 같은 체험 요소이자 관광 자원의 역할을 해내는 건 기본값이다. 관광객이 관련 장소를 방문함으로써 시내 체류 시간과 관련 소비를 늘릴 수 있으며 지역 내수 시장에도 도움이 된다. 동시에 거주민에게는 지역 이미지와 도시 활성화에 대한 자부심을 부여하고 각종 활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산업은 생산품을 통해 단순한 경제적 이익 실현을 넘어 도시의 맥락과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을 보다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러한 구조와 문화를 만드는 것은 장기적으로 기업에도 이득이다. 비즈니스를 지속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수익으로 일부 이어지니 일종의 선순환을 만드는 셈이다. 브랜드적 관점에서 보면 프라모뉴먼트는 지역산업의 핵심 제품을 구체적인 상징물로 재현해 시즈오카의 이미지를 끌어올렸다. 일관되고 통일된 요소를 활용해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도시 전역에 전파하며 도시를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하도록 견인한다. 도시 브랜드는 원래 가지고 있던 자원뿐만 아니라 관광객, 투자자, 트렌드 등의 외적 요소가 맞물려야 단단해진다.

 

멋진 캐치프레이즈 한 줄만으로는 도시 브랜드를 만들 수 없다. 산업이 도시 브랜드이자 국가적 문화 자산으로 자리 잡기까지 민관과의 협업을 통한 유의미한 활동이 필요하다. 동시에 도시 브랜드를 이끄는 문화적 요소는 지역 밖으로 널리 알려지고 또 다른 콘텐츠로 재생산되어야 지속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시즈오카의 행보는 좋은 사례로 보인다. 앞으로도 창의적인 프라모뉴먼트가 확산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