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21년 전, 아무것도 모르던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 나의 생활 반경은 동네였다. 그땐 휴대폰도 없었고, 인터넷도 전화선을 연결하여 사용하던 시절이라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진 한 장을 다운로드하는데도 10분이 넘게 걸렸으니 긴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자연스레 집 밖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초등학생이 갈 만한 곳은 놀이터, 시장, 골목길, 동네 하천 옆 공원 정도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만큼 쌓인 추억도 많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의 경험은 현재의 나에게 여전히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땐 몰랐다. 매일 걷던 그 골목길이, 매일 보던 시장 풍경이, 매일 흙장난 치며 놀았던 놀이터가 이렇게 그리워질 줄 말이다. 보고 듣고 느꼈던 가지각색의 경험이 앞으로 살아갈 날의 방향성과 삶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렇게 동네에서 보낸 시간들을 잠시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서울의 한 동네가 재개발로 인해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야 문득 궁금해졌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나의 동네는 어떻게 변했을까?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찾은 동네의 상황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했던 동네는 오랜 세월 때 묻은 흔적을 지우려는 듯 재건축과 재개발을 앞둔 상황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집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아파트 단지였다. 처음에는 다소 생소한 풍경이었던지라 위치를 잘못 찾은 줄 알았다. 그나마 담벼락을 함께 공유했던 테니스장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집이 있던 곳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시절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때의 시간, 풍경, 장소, 사람.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오직 기억만이 남았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있었다. 과거는 사라진 채 현재만 남은 시점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공간이었던 동네의 변화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까?
#88올림픽과 집장사 그리고 <버블 패밀리>

[Photo : ⓒ마민지]
동네가 변한다는 것은 결국 동네가 속한 도시가 변한다는 것과 같다. 마민지 감독의 다큐멘터리 <버블 패밀리>는 한 가족사를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의 개발사를 보여준다. 감독은 자신의 부모와 갈등을 풀어나가며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도시 개발의 욕망과 마주하게 된다. <버블 패밀리>는 감독이 부모님의 욕망을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와 사회에 담긴 욕망을 읽어내고, 자신이 가진 욕망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기록은 국가 정책으로 변화한 동네와 도시의 모습이 개인에게 어떤 경험으로 남는지 잘 보여준다.
"영화 전반적으로 부모님의 욕망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리고 부모님의 욕망이 사회적인 것들을 어떻게 움직였는지 양가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냥 메시지를 드러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 위치에 갔을 때는 어떤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컸던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 마지막에 제 땅을 보러 가면서 제 욕망을 스스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어요."
- 마민지 감독 인터뷰 내용 중

[Photo : 오예스스튜디오]
일명 '집장사'라고 불렸던 이들이 88 올림픽 개최와 함께 서울의 주택난 해소를 명분으로 '다세대주택'을 짓기 시작하면서 부동산 시장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마민지 감독의 부모님도 시장에 뛰어들었고, 그 결과 많은 부를 얻었다. 감독은 올림픽 개최와 함께 마련된 아파트에서 나고 자라 부유한 삶을 경험하며 성장했다. 부모님은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꽤 큰 면적의 토지를 구매하였지만, '한국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경제 위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곧장 정부는 개발 제한 정책을 발표했고, 가족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런데도 감독의 부모님은 여전히 그 시대를 살고 있다. 어느 동네의 개발 소식을 듣고 땅을 사고(물론 딸을 위해 마련한 것이지만) 부를 얻을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며 언젠가 그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마민지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런 부모님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으며 연결고리를 만들어 온 자신의 삶을 살피고 있다. 우리는 이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

정부 정책으로 시작된 도시개발은 IMF 경제 위기에 잠시 주춤했지만 누군가에게는 행운을, 누군가에게는 시련을 안기며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동네와 도시의 변화는 그곳에 머물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오래된 목욕탕 대신 24시 사우나가 등장했고, 슈퍼와 시장 대신 대형마트가 들어섰다. 빠르게 변하는 부동산 정책,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동네의 모습, 그에 맞춰 달라지는 사람들의 일상. 과연 어떤 욕망이 그러한 변화에 불을 붙였을까? 그리고 그 욕망 때문에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는 가치는 무엇이 있을까? 동네는 점점 우리가 '사는(live) 곳'이 아닌 '사는(buy) 곳'이 되어가고 있다. 삶의 터전이 일상을 살아가는 곳이 아닌, 투자 가치로 평가받는 물건이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동네라는 공간과 끈끈한 인연을 맺고 살고, 그 기억을 통해 삶의 중요한 경험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사는(live) 동네를 더 잘아야 한다.
#남의 동네에서 찾는 맛집
그만큼 중요한 삶의 공간인 동네,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오늘 너희 동네 근처에 갈 것 같은데 혹시 맛집 아는 데 있으면 좀 알려주라."
"글쎄... 나도 우리 동네는 잘 몰라서."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핫 플레이스 투어', '맛집 투어'를 떠올려 보면 자신이 거주하는 동네보다 생활 반경에서 벗어난 다른 동네가 먼저 떠오른다. 왜 그럴까? 특별한 장소에서 보내는 그 시간도 특별해지길 바라서일까? 정작 자신이 사는 동네에 대한 정보를 물으면 머뭇거리게 된다. 또, 지금 당장에라도 어떤 공간들이 있는지, 어떤 풍경들이 존재하는지 생각해 보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실제로 몇몇 사람들과 함께 자신이 사는 동네의 풍경을 그려 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기억을 못 하거나 막막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매일 지나치는 동네라 당연히 잘 알 것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이다. 어제 본 풍경과 오늘 본 풍경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어디가 맛집인지, 내가 좋아하는 동네의 장소는 어디인지, 이런 것들에 집중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다 보면 동네를 바라보는 시선이 분명 달라질 것이다.
# 코로나19와 함께 시작된 동네 탐구생활
코로나19는 일상의 많은 것들을 바꿔 놓았다. 사람들은 이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네에 머물렀다. 머무른 시간만큼 익숙하던 동네가 새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수도 없이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동네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떤 공간들이 있는지 탐색하기 시작했다.
[Photo : 이소]
"예전에는 스치기만 하던 동네의 공간들을 내 일상의 영역으로 들여오기 시작했다."
"동네 상점 소비생활 - 싱싱 마트에 가면 내 필요에 맞는 물건들이 의외로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파게티를 많이 해 먹는 편인데 관련 소스를 생각보다 많이 팔고 있었다거나, 큰길가의 다이소까지 가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커피 종이가 여기서 판다는 걸 알았다거나."
"아파트 베란다에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베란다 음악회'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파트에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담당자에게 문의했습니다. 한번 실시했답니다. 연주를 가까운 데서 들으려고 베란다에서 나오는 이들이 있더랍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할 수 없어서 일단 보류 중이라고 했습니다. 동네를 한번 살펴보세요. 사회적 거리를 지키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전씨는 코로나19가 국내에 확산하고 나서야 탄천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요즘 전 씨 가정에서는 인라인스케이트나 자전거를 타고 온 가족이 함께 즐기는 라이딩이 중요한 주말 일정이 됐다. 전 씨는 "갈 곳이 마땅치 않은데, 만약 탄천마저 집 주변에 없었다면 매 주말이 너무 지루하고 막막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새로 산 자전거를 매일 같이 타고 나가 땀범벅이 돼서야 돌아왔다. 전 씨 부부도 10여 년 동안 한 번도 신은 적 없는 인라인스케이트를 신발장에서 꺼내어 깨끗이 닦았다. 두 아이들과 함께 바퀴를 구르며 탄천변의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면 감염병에 대한 걱정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저 스쳐 지나기만 했던 동네의 공간들이 일상의 영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왜 우리는 그동안 동네의 공간들을 스치기만 했을까? 동네의 공간들은 왜 특별해질 수 없었던 것일까? 왜 동네는 늘 '재발견'되어만 했을까?
# "제 고향은 둔촌주공아파트입니다"
엄연히 따지고 보면 동네는 아니지만 동네와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둔촌주공아파트 단지다. 둔촌주공아파트에 살던 어린 꼬마 아이는 어른이 되어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어른이 된 꼬마 아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제 고향은 둔촌주공아파트예요."
사람들은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떻게 아파트가 고향이 될 수 있지?' 하지만 잘 곱씹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고향이라는 것은 '나고 자란 곳'이라는 물리적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심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정서적 장소이기도 하다. 어른이 된 꼬마 아이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를 그저 아파트로만 보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정서적 공간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고 특별했다.
1980년에 완공되어 40년이 된 둔촌주공아파트는 재건축 대상으로 지정되어 곧 철거될 예정이었다. 철거가 시작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기에 이곳에서 함께 나고 자란 동시대의 친구들과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과 모여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고 현재의 추억을 만들어가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파트가 철거된 이후 그 상실이 우리에게 미칠 영향력이 너무나도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나는 둔촌주공아파트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앞서 언급했던 나의 동네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진 것을 목격한 후 느꼈던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함께 했다. 아파트 단지 길을 산책하듯 걷고, 어떤 풍경들이 있는지 천천히 바라보고, 경비 아저씨와 인사도 나누고, 건물 높이만큼이나 자라난 나무들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몸소 깨달았다. 참으로 소중한 순간이었다.
# 처음과 끝을 함께 하는 삶의 터전, 동네

"이야기하고 보니깐 진짜 우리 재미있게 놀았다. 쌍문동에서."
"에이~ 그때 그걸 알면 어른이게."
"주말에 쌍문동 한번 가볼까?"
"야 거기 싹 바뀌었어. 주상복합 들어서고 그랬어. 에이 너 가면 충격 받아요. 나 10년 전에도 가봤거든? 그때랑 또 달라."
우리를 감싸고 있는 동네의 환경과 공간, 그리고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우리의 삶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유심히 살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추억의 공간과 사람들에 대한 상실을 겪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삶의 터전이 가진 가치, 그리고 그 가치가 우리의 삶에 미쳤던 영향을 기억한다면 오직 물질적인 이해관계만 남은 무차별적인 개발을 멈출 수 있다. 지금은 개발을 멈추고, 무엇이 중요한지 기억해야 할 때다.
누군가에 의해 동네를 재발견하는 것은 그만하고, 스스로가 애정을 가지고 동네를 자세히 살핀다면 우리의 삶은 좀 더 풍부해질 것이다. 동네의 가치는 부동산 전문가의 분석이나 핫플레이스를 찾아내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동네를 '고향'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삶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치가 바로 그 동네의 진정한 가치가 된다. 당장 오늘부터 우리 동네 탐구 생활을 시작해보자. 내가 사는 동네를 잘 알게 된다는 건, 나와 우리를 조금 더 잘 알게 된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