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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19-12-18 10분 분량

    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창간 50주년을 맞는 한 교양 월간지가 재정난으로 폐간한다는 소식이 화제가 됐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잡지가 사회상과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따라 사라짐을 안타까워한 여론과 적극적 후원에 힘입어 간신히 다시 발간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나름 훈훈한 이야기로 마무리되었지만, 출판시장의 위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스마트폰과 유튜브가 생활과 문화, 그리고 여가의 중심이 되면서 책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런 흐름을 바꿔보려는 노력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번 기사에서는 어느새 멀어진 책 읽기를 다시 우리 곁으로 잡아 오려는 다양한 시도를 소개한다. 

    파주 '지혜의 숲'

    [Photo  : 출판도시문화재단]


    1. 기차를 타고, 지식의 여행을 떠나다

    철길을 따라 아이의 꿈이 자란다. 연인과의 사랑이 싹튼다.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향하는 청년의 도전도 레일처럼 곧게 뻗어 있다. 그래서 기차여행은 설렘과 희망을 담고 있다. 책이 우리에게 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서울을 관통해 경기도를 동서로 연결하는 경의중앙선에는 이색 전철이 다닌다. 주인공은 '독서바람열차'.

    지난 2016년부터 운행을 시작한 독서바람열차는 이름 그대로 전철 안에서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서가를 마련해 놓은 독서열차다. 경의중앙선은 문산역에서 지평역까지 전체 길이만 편도 120km가 넘는다. 수도권 전철 1호선에 이어 두 번째로 길다. 한강을 따라 경기도 파주시에서 고양시, 서울특별시, 구리시, 남양주시를 거쳐 양평군까지 연결한다. 1호선이 충남 천안까지 운행해 수치상으로 가장 길지만, 일반적 수도권의 개념으로 본다면 경의중앙선이 가장 긴 노선이라 하겠다.  

    개통 당시 포스터

    독서바람열차는 이런 경의중앙선의 여건을 감안해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정기 운행 열차 도서관이다. 출퇴근, 나들잇길에 전철에서 스마트폰 대신 책을 보면서 생활의 여유와 정서를 되찾았으면 하는 취지다. 

    열차 이름은 이용객들이 2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스마트폰보다 책 읽기를 바라는 마음과 전국에 독서 열풍이 불기를 희망하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런칭 슬로건은 "떠나자! 155분의 독서 여행"이다. 출판의 도시 파주시와 코레일 그리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과 사단법인 '출판도시입주기업협의회'가 함께 만든 작품이다. 

    한 시민이 독서바람열차 서가에서 책을 고르고 있다

    우선 경의중앙선 열차 맨 앞 1칸을 서가가 있는 작은 도서관으로 리모델링했다. 열차 외관은 독서의 가치를 알리는 문구와 사진으로 꾸몄다. 열차 맨 앞칸에 책 500여 권과 전자책 등을 비치했다. 파주시는 올여름에 약 4년째 운행해온 독서열차를 리뉴얼했다. 노후화된 시설을 정비하고 열차 내부를 새롭게 단장했다.

    새로이 비치된 독서칸과 문학 자판기

    열차 뒤 칸에도 새로 독서칸을 추가했다. 1호 차에만 비치하던 도서를 8호 차까지 양쪽으로 나눠 더 많은 승객이 책을 읽도록 했다. 열차 내부는 '평화 도시'를 지향하는 파주와 경의선의 상징성, 독서를 결합해 '책으로 떠나는 한반도 평화여행'이라는 주제로 단장했다. 대륙으로 나가는 '유라시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의 노선도뿐 아니라 백두산·개성·종묘·제주도 등 남과 북의 대표적 관광지를 일러스트로 표현했다. 


    1호차 내부 벽면과 바닥 랩핑

    또한, '손기정', '나혜석' 등 실제 열차를 타고 세계를 여행한 인물들과 여행기를 소개하고 있다.

    8호차 내부 벽면과 바닥 랩핑

    독서바람열차는 문학자판기 외에 IT기술을 활용해 타는 재미를 더했다. 일러스트에 증강현실(AR)기술을 접목시켜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보고, 나만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독서바람열차는 증강현실 서비스도 제공한다

    또한, 책 읽기 활성화 행사도 수시로 열린다. 어린이, 청소년, 다문화가족 등을 위한 북콘서트가 대표적이다. 저자와의 만남, 책 나눔 행사도 열차에서 진행한다. 열차에는 자원봉사자가 함께 타 책 이용 안내를 돕는다. 독서바람열차는 평일에는 문산에서 지평까지 하루 3회, 주말에는 문산에서 팔당까지 하루 4회 왕복 운행한다. 별도 요금 없이 기존 전철 요금으로 이용할 수 있다. 수도권 전철뿐 아니라 책 읽기로 기차여행의 낭만과 즐거움을 더하려는 열차는 또 있다. 바로 고속열차 KTX와 관광열차다. 

    코레일은 지난 2012년부터 KTX 특실고객을 위해 서가를 운영하고 있다. KTX 특실이 있는 3호 차에서 5호 차 통로에 마련된 'KTX 미니도서관'이다. 소설과 인문교양서를 비롯해 다양한 잡지가 비치되어 있다. 특실 고객은 무료로 30여 종의 조・석간 신문과 함께 매월 새로운 잡지와 단행본을 볼 수 있다.

    KTX에는 특실고객을 위한 책과 잡지가 마련되어 있다 

    최근 기차여행의 꽃인 관광열차에서는 디지털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다. 코레일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과 함께 책 읽는 문화 확산을 위해 전자책을 무료로 대여하는 '책책폭폭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대상 열차는 남도해양열차 'S-트레인', 서해금빛열차 'G-트레인', 중부내륙순환열차 'O-트레인'과 우리나라 유일의 호텔식 관광열차인 레일 크루즈 '해랑'이다. 열차의 카페 객차에 부착된 고정형 단말기, 승무원에게 요청해 휴대할 수 있는 대여형 단말기 두 종류가 마련되어 있다. 열차 고객이면 누구나 이용 가능하며 시, 소설, 자기계발 등 400여 종을 전자책으로 즐길 수 있다. 

    호텔식 관광열차 해랑의 이벤트칸에서 전자책을 보고 있는 여행객

    서해금빛열차 카페칸에 비치된 전자책을 읽고 있는 여행객


    2. 방송 전파를 타고 책이 흐른다 

    스마트폰과 유튜브에 밀린 동병상련 때문일까, 방송 프로그램도 책 길라잡이 역할에 팔을 걷었다. 지상파, 종편 등 TV뿐만 아니라 라디오 책 방송이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TV는 한때 바보상자로 불리던 자격지심(?)을 떨쳐내려는 듯, 그동안 책을 다루는 시도를 줄기차게 해왔다. 하지만 늦은 심야시간대라든지, 작가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는 단조로움으로 시청자에게 외면받은 게 사실이다. 큰 전환점이 됐던 프로가 바로 2000년대 중반 MBC <느낌표>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다. 



    <느낌표>는 온 국민을 독서 열풍에 몰아넣었다. 소개되는 책은 바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따뜻한 사연이 보는 이들을 훈훈하게 했다. 책을 접하기 어려운 곳에 등대처럼 빛을 발하는 '기적의 도서관'이 만들어지는 성과로 이어졌다. 

    <느낌표> 권장 도서로 선정된 「괭이부리말 아이들」

    최근 여러 책 방송이 전파를 타고 있다. 포맷도, 다루는 내용도, 출연진도 말 그대로 이채롭다. 각 분야 전문가가 함께 책을 요약하고, 유명인 패널들이 일반 독자가 되어 질문한다. 스타들이 직접 책을 읽거나 이색 서점을 함께 찾아간다. 그동안의 책 방송과 접근 방식을 달리해 독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있다. 방송의 트렌드가 먹방, 집방(부동산방)에서 책방으로 바뀌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먼저 책과 가장 유사하게 감정을 전달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라디오 책 프로그램부터 살펴보자. 라디오만의 아날로그적 감성은 책의 속성과 잘 맞아떨어진다. 주말 MBC 라디오를 켜면 스타의 목소리로 책을 새롭게 만날 수 있다. 아니 들을 수 있다. 

    MBC 라디오의 <책을 듣다>

    MBC 라디오는 지난 10월부터 연간기획 <책을 듣다>를 방송하고 있다. 스타들의 '낭독'이라는 형식을 통해 30분간 한 권의 책과 만난다. 주말 밤 9시 25분에 방송되는 독서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배우, 아이돌, 가수, 방송인, 아나운서 등 스타 낭독자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책의 안내자가 되어 듣는 이를 책 속으로 이끈다.

    스타들의 낭독

    내년 가을까지 1년 동안 100여권의 책을 소개한다. '톨스토이(Tolstoy)'부터 구독자의 이메일로 수필을 발송해 온 '이슬아' 작가를 다룬다. 또 누구나 아는 고전 작품에서부터 최근 실용서적까지, 다양한 작가의 색깔있는 책이 낭독된다. 방송인 '배철수'가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헤밍웨이(Hemingway)' 생애 최고의 걸작인 「노인과 바다」를, 배우 '이연희'가 '카롤린 봉그랑(Caroline Bongrand)'의 「밑줄 긋는 남자」를, 아나운서 '손정은'이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를 읽는 식이다.

    배철수가 낭독한 「노인과 바다」

    교육 방송은 책 방송에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라디오 <EBS 북카페>는 대표적인 장수 독서 프로그램이다. 현재는 장편소설 「무중력 증후군」, 「밤의 여행자들」과 소설집 「1인용 식탁」, 「알로하」의 저자 '윤고은' 작가가 지난 8월부터 진행하고 있다. '윤고은의 북카페'는 매일 고전과 신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책을 소개한다. 일주일 단위로 한 권을 낭독과 해설을 곁들여 소개하고 요일별로 작가, 교수 등이 게스트로 출연해 소설, 인문학, 과학 등 테마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루 2시간 정오 본방송에 이어 저녁에 재방송한다. 

    최근 책 방송 트렌드 중의 하나가 책방 소개다. 대형 서점이 책방 시장을 장악하면서 동네 책방은 물론 각 지역을 대표하는 유서 깊은 군소 책방이 하나둘 사라져가는 걸 모두 안타까워했다. 책방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다. "두 다리를 움직여 동네 책방을 책을 사러 간다는 것은, 책이 내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라고 소설가 '김훈'은 말한다. 책방은 새로운 세상과 연결해주는 비밀통로고 상상의 세상으로 통하는 마법의 공간 같은 곳이다. 

    또 교육 방송에 주목한다. 이번엔 라디오가 아니고 TV다. EBS의 <발견의 기쁨, 동네 책방>. 매주 목요일 밤이면 '백영옥' 소설가가 책 동무로 우리나라 대표 작가와 함께 전국 곳곳에 자리 잡은 다양한 동네 책방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책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발견의 기쁨, 동네 책방>의 한 장면

    지난 9월 말부터 소설가 김훈과 함께 63년 된 속초의 '동아서점'을 시작으로, 시인 '김용택', 역사학자 '신병주', 건축가 '유현준' 등이 완주의 한옥책방, 서울의 역사책방, 건축책방 등 지역의 숨은 책방을 탐방하고 있다. 색다른 책방 여행을 통해 '길 위의 인문학'을 전한다.


    세계의 유명 책방을 둘러보는 프로그램도 화제다. JTBC 다큐멘터리 <장동건의 백투더북스>는 배우 '장동건'이 진행과 내레이션을 맡아 각국의 명문서점을 중심으로 책 문화를 소개한다. 

    <장동건의 백투더북스>

    10월 말부터 4부작으로 중국, 프랑스, 일본, 한국의 책방을 소개했다. CNN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뽑고, BBC가 세계의 아름다운 10대 서점으로 선정한 도시 랜드마크 '센펑 서점'의 인문학 정신을, 프랑스에서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등의 배경이자 '앙드레 지드(Andre Gide)',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등 세계적 문학가들의 사교장이었던 프랑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의 문학사적 발자취를 조명했다. 일본에서는 그림책 서점 '크레용 하우스(Crayon House)'의 책과 문화에 대한 흔들림 없는 경영 철학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부산, 서울, 속초 등의 헌책방과 동네 책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소개했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와 크레용 하우스

    자기만의 시간에 인쇄된 책을 펼치는 것보다 유튜브 플레이를 터치하는 게 익숙해져 버렸다. 몇몇 책 방송은 책 읽기 활성화에 나선다며 유튜브와 비슷한 형식이다. 실제 읽지 않아도 대략의 내용을 알 수 있도록 압축해서 속성으로 내놓는다. 왠지 책 읽기의 본 맛은 없다. 지식을 꾸역꾸역 채우는 것 같다. 우리가 온라인 세상에서만 살 수 없듯이 오프라인에서 책을 통해 생각을 나누고 눈을 감고 상상할 수 있는 그 매력에 다시 빠져보기를. 정말 가끔이라도 동네 책방의 한구석을 차지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