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의 아트마케팅, 공간에 문화예술 트렌드를 펼치다
"예술, 문화, 대중, 트렌드를 한 공간에 담아낸 대림그룹"
“미술관의 경쟁 상대는 다른 미술관이 아닌 모든 여가수단이 되어야 한다”
- 토마스 크렌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관장
예술 작품을 보기 위해 미술관 앞에서 줄을 서는 해외 미술관 사례는 그리 낯설게 들리지 않는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퐁피두 센터는 어마어마한 대기줄로 이미 악명이 자자하고, 관람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15분 간격으로 일정 인원만 들여보내는 우피치 미술관 앞에서도 사람들은 수 십분이건 수 시간이건 기다린다. 사람들은 명성에 걸맞은 세계적인 작품들을 보기 위해 기꺼이 기다리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 이해하고 소화하는 과정에서 얻는 기쁨과 만족감, 예술에 대한 욕구. 예술은 분명 사람들에게 커다란 즐거움과 삶의 경험을 선사한다.
대중이 보고 싶고, 대중이 겪어보고 싶은 것을 펼치다
<대림 미술관>
2002년 개관 당시 주택을 개조한 서촌의 한 공간에 들어서며 ‘사진 전문 미술관’이란 타이틀을 내걸었던 대림미술관. 2010년 영국 패션 디자이너 폴 스미스(Paul Smith)의 수집품 전시회 <인사이드 폴 스미스>전은 대림미술관의 행보를 바꾸는 기점이었다. 이후 샤넬의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 사진작가 라이언 맥긴리(Ryan McGinley), 가구 디자이너 핀 율(Finn Juhl)처럼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시가 연이어졌다. 대중들은 패션, 가구, 디자인 작품을 보기 위해 길게는 서너시간을 기다렸고 대기줄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학술적 가치가 응집된 전시, 전문적인 배경지식을 요하는 전시를 추구하는 미술계의 일반적인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예술전시회를 예술콘서트로 만들다
작품을 보고 나온 관람객들을 맞이한 것은 예술이 묻은 즐길거리였다. 마치 아름다운 소품과 생활용품을 사는 것 같은 아트 머천다이징은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소유욕과 과시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새로운 전시가 시작되면 오프닝 리셉션에 특별한 칵테일과 공연, 퍼포먼스가 함께하는 파티로 이목을 끌기도 했다. 헨릭 빕스코브 전의 경우 미술관을 직접 찾아온 전시 주인공에게 사인받기 위해 한차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예술 전시회라기보단 영리한 예술 콘서트 같다.
예술, 문화, 대중, 트렌드를 한 공간에 담아내는 디뮤지엄의 마케팅
하지만 본래 주택이었던 대림미술관 공간은 규모가 있는 전시를 열기에 다소 버거웠다. 전시와 교육, 문화프로그램의 확장을 위한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대림은 2015년 12월, 서울의 작은 국제도시로 불리는 한남동 독서당로에 D뮤지엄을 새롭게 개관했다.
기둥 없이 설계된 전시실은 작품과 전시별 컨셉에 맞게 구조를 완전히 변형할 수 있어, 천장이 낮은 대림미술관에서 전시할 수 없었던 작품들이 D뮤지엄에 놓였다. 공연이나 강연, 패션쇼는 지하주차장 구조 변경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단순한 미술관이 아니라 복합문화공간이란 목적으로 세워진 D뮤지엄은 틀에 박힌 전시와 공간에서 벗어나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행사로 미술계의 새로운 입지를 다졌다.
여전히 대중의 입맛에 맞추면서도 트렌드를 놓치지 않는 콘텐츠를 고집해 자신들만의 구성 방식으로 D뮤지엄을 장식했다. 조명과 빛으로 유려하게 공간을 채우거나 아름다운 색의 작품, 영상, 설치물로 오감을 자극하는 트렌디한 전시장으로 급부상했다. 통상적인 미술관 규칙인 사진 촬영금지는 D뮤지엄같은 최고의 사진 촬영지에 적합하지 않았다.
D뮤지엄의 관람객들은 작품과 공간을 자유롭게 찍는 과정을 통해 예술적 경험의 시각화가 무엇인지 실컷 맛보고, 자신들만의 시선으로 기록한 이미지를 다양한 플랫폼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올렸다. 작은 정사각형 프레임에 담긴 예술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데다 사람들의 모방 욕구를 쉽게 자극한다. SNS 속 이미지를 보고 찾아오는 관람객 수는 계속해서 불어갔다.
기업이 운영하는 박물관이니만큼 예술을 통한 이익 산출은 필수적이었다. 경제력과 소비력을 가진 관람객을 끌어오기 위해 넓은 스펙트럼의 복합문화 콘텐츠를 선보였다. Class 7pm, Meet Up, 클래스, 아티스트토크, 콘서트, 워크샵, 마켓 등 관람객을 ‘충성고객’으로 만들면서도 지갑을 열게 하는 아트 프로그램과 머천다이징은 또다시 사람들의 휴대폰으로 기록되어 SNS에 등장했다.
대림미술관의 아트샵처럼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작가들의 콜라보레이션 상품을 전문으로 하는 뮤지엄 샵까지, 관람객을 지루하게 할 틈 없는 리테일 공간이 뮤지엄 옆을 차지했다. D뮤지엄의 4개 동을 연결하는 건물과 건물 사이 채광 유리벽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없앴다. 가로막는 장애물 없이 자유롭게 이어지는 동선은 사람들이 예술작품이 있는 공간과 상업시설이 있는 공간, 문화시설이 있는 공간을 산책하듯 둘러보고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젊은 세대의 라이프스타일과 관심사, 취향을 완벽히 맞춘 덕분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셈이다.
예술적 경험의 시각화, 기록, 전파가 가능한 공간
D뮤지엄은 예술과 공간을 관람의 대상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기록과 파급력의 매개체로 접근할 수 있도록 시각적으로 강렬하거나 트렌드와 맞는 작품을 선정하고, 작품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하고, 사진 촬영을 장려했다. 이 안에는 예술의 요소와 실질적인 문화소비 트렌드에 대한 이해가 숨어있다. 멋진 경험과 공간이 담긴 사진을 공유해 취향을 드러내는 시대의 흐름은 미술관과 박물관의 흥행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국내 미술관 최초로 사진 촬영을 허용한 기저에는 시각적 이미지와 소셜 네트워크, 소비 트렌드가 갖는 시너지를 간파한 판단력과 공간에 대한 자신감이 있던 셈이다.
상업공간의 문화공간화 방향을 제시하다 <광화문 D타워>
D-MUSEUM에서 확인한 문화/아트 마케팅의 성공은 대림의 사업 확장 방향에도 영향을 끼친 듯하다. 광화문 교보빌딩 뒤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대한 블록이 쌓인 듯한 독특한 건물은 바로 대림이 오피스 빌딩과 문화/아트 요소의 결합을 시도한 지상 24층 규모의 D타워다.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대림미술관의 디스플레이에도 관여하는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 조수용 JOH 대표가 공간을 맡았다.
건물은 오피스 빌딩인데, 입주한 회사에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위한 로비는 엉뚱하게도 지하에 있다. 로비가 있어야 할 자리엔 광화문을 오가는 시민들을 위한 시설이 대신한다. 조수용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광화문 주변의 언론사, 공공기관 직장인과 청계천, 교보문고, 세종문화회관을 찾아온 유동인구를 끌어들이기 위한 ‘계산된 친근성’이다.
D뮤지엄의 리테일 브랜드 리플레이스(replace)의 2호점이란 이름 아래 자리를 차지한 패션과 코스메틱 브랜드는 전형적인 오피스 빌딩에서 벗어난 모습이다. 통상적인 오피스 빌딩 지하 내 식당가는 찾아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남의 사무실에 찾아온 이방인 눈치를 주지만, D타워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개방적인 분위기다.
건물을 잇는 폭 3~4m의 소호길은 과거 피맛길이던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해 역사적 흔적을 지키면서도 트렌디한 식당으로 채워져 문화 스팟 역할을 한다. 리테일과 F&B의 적절한 균형 덕에 지속적인 인구 유입이 이루어졌고, D타워의 5층께까지 놓인 각 식당 앞에는 대기 명단이 붙어있다. 기다리는 모습이 마치 D뮤지엄에서의 대기줄처럼 보이는 건 기분탓일까.
“새로운 공간에 젊은 사람들이 반응을 한다면 그건 아마 일하는 방식, 사는 방식이 변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사람끼리 소통하는 방식이 변화하면 공간도 여기에 맞춰야 한다.”
– 조수용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
빌딩 내부는 1층부터 4층이 이어지는 캐스케이드 에스컬레이터와 햇빛이 듬뿍 들어오는 전면 유리창, 천장이 탁 트인 오픈 테라스로 일반적인 오피스 빌딩과는 완연히 다른 독특함을 보여준다. 통유리창 커튼월로 쏟아지는 햇빛과 조명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무너뜨려 야외의 공간감을 그대로 전달한다. 김도균 사진작가의 Space Faction 시리즈와 영국 천재 아티스트 Troika의 ‘질서와 혼돈(Order and Chaos)’ 작품은 사람들로 하여금 카메라를 들게 하고, SNS 속 D타워의 이미지는 멋지고 예술적인 문화 공간으로 머릿속에 각인된다.
예술, 공간, 대중, 트렌드를 관통하는 스토리텔링이 브랜드의 힘을 키운다
대림산업 명예회장 이준용은 한국메세나협회 창립원으로, 누구보다 메세나(Mecenat:문화예술을 통한 사회 기여) 정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젊은 작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기 위해 미술관을 설립했지만, 국내에서 건설사가 갖는 무겁고 경직된 브랜드 이미지를 유하게 만들기에는 문화와 예술만큼 좋은 소잿거리가 없다. 미술관은 대림이 예술을 본격적으로 마케팅에 활용한 시발점이다. 큐레이터 역시 미술사를 전공한 학자 대신 디자이너를 영입했고, 그 덕분에 트렌디한 미술관, 트렌디한 브랜드라는 포지셔닝을 갖게 된 셈이다.
대림은 현시대의 미술관과 상업시설이라는 공간을 선물박스 삼아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모든 문화예술 컨텐츠를 보기 좋은 패키지처럼 담아냈다. 사람들은 선물박스를 구매한 뒤 포장을 풀어 문화와 예술을 즐기고 찍어 자랑하는 데서 만족감을 느낀다. 물론 선물박스에는 전체를 관통하는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한다. 누구나 열어 보고 싶은 선물이여야 더욱 효과적으로 팔린다. 잘 팔린 선물박스는 누가, 어디서, 어떻게 파는 선물박스인지 SNS에 오르내리고, 찾는 사람은 자연히 급증한다. 대림의 공간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프로세스다.
미학적 가치만을 내걸던 기존의 미술관과 업무효율성만을 좇던 기존의 오피스 빌딩에서 탈피해 문화예술체험공간으로 나타난 대림의 공간들은 그들의 공간 자체가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 대림미술관과 D뮤지엄이 미술사의 발전에 보탬이 됐을지는 미지수지만, 대중의 소비 생활과 여가 수단, 예술에 대한 관심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또한 수치화 할 수 없는 강력한 브랜드 파워와 트렌디한 브랜드 이미지, 소비자의 신뢰도를 대림이 얻었고, 그것이 바로 이 공간이 존재하는 목적과 마찬가지다.
예술은 분명 핵심 가치다. 하지만 예술과 공간, 문화, 트렌드를 어떻게 결합하고 전개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그 이상의 시도다. 같은 작품을 어떤 공간에 어떤 모습으로 두는지에 따라 미술관 앞 대기줄의 까마득한 끝을 혹은 파리 날리는 매표소를 볼 지도 모른다. 매력적인 공간과 예술, 긴 대기줄은 대림이 고민한 결과물이다.
☞ 참고사이트
대림미술관 현재 전시 : 토드 셀비의 〈The Selby House: #즐거운_나의_집〉
D뮤지엄 현재 전시 : <Plastic Fantas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