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브랜드, 전시의 대상이 되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렸던 패션 전시 중 역대 최다 관객을 기록했던 전시는 <중국:거울 나라의 앨리스>였다. 존 갈리아노와 크리스찬 디올의 드레스로 시작해서 중국이 서양 패션에 끼친 영향으로 끝나는 방대한 전시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최다 관객의 명예는 영국을 대표했던 비운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의 2011년 회고전 <Savage Beauty>가 차지했을 것이다. <중국:거울 나라의 앨리스>展에는 80만 명 이상이, <Savage Beauty>展에는 66만 명 이상이 관람을 기록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전시장 속 패션을 보러 박물관으로 기꺼이 걸음 한다.
사람들은 전시장에서 만나는 패션을 즐거워한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패션을 코앞에서 보는 것도 즐겁지만, 백화점이나 쇼 윈도우, 혹은 잡지에서나 보던 패션이 전시장에 들어와 우리 앞에 버젓이 놓인 것을 찬찬히 뜯어보는 것도 새로운 재미와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런 트렌드를 반영이라도 하듯, 자신들이 직접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는 럭셔리 브랜드가 늘어나고 있다. 서울과 교토에서 열리는 전시의 주인인 샤넬, 루이뷔통, 반클리프 아펠이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CHANEL at 디뮤지엄 <마드모아젤 프리베 서울(Mademoiselle Priv é Seoul)>
언제나 샤넬에 따라붙고 샤넬을 장식하는 수식어. ‘모든 여성들의 꿈’. 가브리엘 샤넬과 칼 라거펠트은 샤넬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다. 지난 6월 23일부터 7월 19일까지 한 달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한남동의 디뮤지엄에서는 그들의 컬렉션, 소장품 등 샤넬의 미적 세계, 샤넬의 영감 원천, 전반적인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렸다.
지금까지 샤넬은 2012년 청담동 비욘드 뮤지엄에서 <The Little Black Jacket>展, 2014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Culture CHANEL>展을 열었으며, 올해 진행된 <마드모아젤 프리베>는 한남동 디뮤지엄에서 만날 수 있었다. 당대에 가장 트렌디하고 화제를 불러모은 장소에서만 샤넬을 보여주는 모습, 과연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멋진 것을 추구하는 럭셔리 브랜드다운 전략이다.
디지털을 활용하여 샤넬의 가치를 나누다
샤넬의 지난 전시는 트위드 재킷을 입은 100명의 사진, 영감을 준 장소의 이미지 등 시각적인 일방적 전달에 그쳤다면, 이번 전시는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해 시대적 상황에 발맞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관람은 무료지만 마드모아젤 프리베 애플리케이션으로 사전 예약을 해야 전시를 볼 수 있는 것도 특징이다. 1층의 도빌(Deauville) 전시실은 그래픽으로 전체적인 공간을 구성했고, 관람객이 스마트폰으로 샤넬 애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켜 벽을 비추면 증강현실(VR) 비디오가 나타나는 등 패션과 기술의 다양한 결합을 꾀했다.
1918년 캉봉가 31번지 매장, 1921년에 태어난 전설의 N˚5 향수, 가브리엘 샤넬의 생일인 1883년 8월 19일 등 샤넬의 특별한 숫자와 역사로 채워진 커다란 로봇 조형물도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했다. 구 뿐만 아니라 샤넬의 장인들이 120시간, 1200시간씩 걸려 만든 드레스 등 패션의 판타지라고 봐도 무방한 샤넬의 완벽한 오트쿠튀르가 한 켠에 있고, 가브리엘 샤넬이 손수 디자인했지만 단 한 번 공개됐던 하이 주얼리 컬렉션 ‘비주 드 디아망(Bijoux de Diamants)의 리에디션도 볼 수 있으니, 샤넬의 가치를 그 어떤 순간보다도 강하게 어필하던 전시다.
Louis Vuitton at DDP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Volez, Voguez, Voyagez)>
루이뷔통도 샤넬에 뒤질세라 메종의 164년 역사와 미래를 여행하는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展을 개최한다. 전시의 시작은 창업자인 루이뷔통이 시골에서 파리까지 두 발로 걸어 떠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발로, 그다음은 마차로, 그 다음은 기차와 비행기로... 교통수단과 여행의 발전에 발맞춰 루이뷔통의 트렁크는 함께 진화하며 당대 사람들의 니즈와 요구에 충실히 응답하는 모습을 전시장에 담았다.
인간의 여행사를 함께한 예술품과 더불어 예술가들과 협업한 제품도 함께 전시한다. 루이뷔통에게 영감을 주는 오브제와 도큐멘트, 파리 의상장식박물관 팔레 갈리에라(Palais Galliera)의 소장품, 프라이빗 컬렉션들은 루이뷔통의 정체성을 관람객들에게 각인시키는 효과적인 매개체다. 게다가 전시 끝부분에는 루이뷔통의 제품들이 장인의 손에서 태어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관객에게 하나의 패션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다
루이뷔통은 재작년 이미 광화문 D타워에서 3D 영상과 거울, 사진 콜라주, 비디오 등의 작품을 미장아빔 기법을 통해 한차례 전시를 마쳤다. 그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 전시에서도 루이뷔통이 초점을 맞춘 것은 바로 ‘관객’. 패션 디자인이 컬렉션에 세워져 런웨이 쇼가 끝나기까지의 프로세스를 관객에게 친절히 알려주는 것, 전시를 통해 관객이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느낄 수 있는지가 루이뷔통이 고민하는 숙제다.
패션 전시에 능하기로 소문난 올리비에 사이야르(Olivier Saillard)가 기획을, 무대 디자이너 로버트 칼슨(Robert Carsen)이 디렉팅한 이번 전시는 이미 파리를 거쳐 작년 여름에 도쿄의 키오이 초에서 열렸었다. 일본의 여러 예술가와 협업한 작품을 선보여 일본과의 유대 관계를 강조했던 구성 그대로, 이번 한국 전시에서는 가야금을 위해 특수 제작된 가방이나 김연아 선수를 위한 스케이트 가방 등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섹션을 제시한다. 브랜드와 국가의 관계를 돈독하기 위한 좋은 플랫폼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루이뷔통이 전시 타이틀로 내건 것처럼, 관람객들은 루이뷔통의 전시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비행하고 항해함으로써 특별한 여행을 체험할 수 있다. 이 전시는 6월 8일부터 8월 27일까지니, 막이 내리기 전에 관람하시길 추천한다.
Van Cleef & Arpels at 교토 국립현대미술관 <마스터리 오브 아트(Mastery of an Art)>
100여 년 전 파리의 아르테코 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부터 명실공히 명품 주얼리 메종으로 인정받는 반클리프 아펠은 예술작품과도 같은 하이 주얼리와 시계를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반클리프 아펠의 자산은 황금손이라는 뜻의 맹 도르(Mains d’Or) 주얼리 장인들이 가진 독창적 세공 기술을 통해 탄생한 컬렉션들. 하나하나가 마스터피스같은 이 컬렉션을 바탕으로 세계 각국에서 자신들의 헤리티지 컬렉션을 주최하는 반클리프 아펠이 이번에 호흡을 춘 상대는 1200년 전통 공예 역사를 가진 일본의 교토다.
교토의 전통 산업은 현재 통산성 전통공예산업 추진 법률에 따라 직물, 자수, 도예, 칠기, 돌공예, 인형, 부채 등 17항목이 공식 인정되기도 했다. 일본 특유의 섬세한 미적 감각과 고도의 기술을 갈고 닦은 숙련된 장인들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걸작으로 가득한 교토는 분명 반클리프 아펠과 맥락을 같이 한다. 바로 반클리프 아펠만의 독보적인 예술혼과 장인 정신.
“우리만의 닫힌 세계에서 ‘우리는 최고이며 우리만이 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예술 분야와의 교류를 지향하고, 그 과정을 통해 선별된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어필하려고 노력합니다.”
- 니콜라스 보스(Nicolas Bos), 반클리프 아펠 CEO
이 전시는 프랑스 공예 예술과 장인 정신을 압축해놓은 듯한 반클리프 아펠의 작품 250여 점 옆에 일본의 다양한 국보급 공예품 60여 점을 한자리에 놓았다. 염색 기법의 국보 모리구치 구니히코(Moriguchi Kunihiko), 목공예 중요무형문화재 나카가와 기요쓰구(Nakagawa Kiyotsugu), 옻칠 장인 핫토리 슌쇼(Hattori Shunsho) 등 내로라 하는 일본 공예 장인들의 작품이 2012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건축가 소우 후지모토(Sou Fujimoto)가 만들어낸 검고 투명한 공간에 놓여 예술 전시의 대미를 장식한다. 전시장을 찾아온 관람객들은 예술의 정점에 오른 프랑스와 일본이 서로 나누는 교감과 대화를 볼 수 있는 셈이다.
판매제품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다
브랜드의 정체성과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다.
럭셔리 브랜드는 판매용 제품을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전시하지 않는다. 그들이 전시하는 것은 자신들의 가치와 역사, 그것들을 유려하게 풀어낸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텔링이 담긴 제품들은 이 브랜드가 얼마짜리 상품을 파는지가 아니라, 얼만큼의 가치를 가진 예술품을 제시하는지 어필한다. 혹은 이 브랜드를 만들어낸 사람의 일생과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물론 그 이야기는 화려하거나 매력적이어야 한다.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풀어낸 스토리텔링은 참신함과 신선함으로 무장한 신생 브랜드를 누를 수 있는 관록의 무기이자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대외적으로 정립할 기회이기도 하다.
“브랜드가 판매하는 것은 그냥 비싼 상품이 아니라, 전시회를 할 수 있는 성격과 깊이를 가진 문화적인 상품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미수로간, 박물관이 원래 전시를 통해 대중들의 감성과 감식안을 교육시키는 공간인데, 패션 브랜드는 이런 전시회를 열면서 ‘우리는 그런 교육을 시킬 수준의 문화가 있다’며 브랜드에 문화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 김홍기, 패션 큐레이터
사실 소비자 입장에서는 화려하면서도 쉽고 재밌는 내용에 티켓까지 무료인 럭셔리 브랜드의 전시를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직접 명품을 사는 소비 만족도에 미치진 못할지라도, 명품 브랜드의 컨텐츠를 소비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간접 경험의 만족도는 제법 높다. 전시를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SNS에 내걸며 경험 인증에 대한 욕구도 충족시킨다. 무엇보다도 명품과 관련된 전시 관람은 소비자에게 단순한 명품 구매와는 아주 다른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전자는 문화의 향유, 후자는 사치와 과소비다.
아시아권에 럭셔리 브랜드가 연이어 펼쳐지다
디지털 디바이스와 컨텐츠 활용에 익숙한 아시아
그렇다면 왜? 아시아권에서 럭셔리 브랜드의 전시들이 연이어지는 것일까. 인터넷과 스마트 디바이스 보급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아시아권은 사람들의 활발한 SNS 활동으로 발생하는 파급 효과 덕에 큰 힘 들이지 않고도 전시를 수월하게 홍보할 수 있다.
또한 아시아권 사람들이 디바이스에 친화적이다 보니, 전시를 네트워크나 애플리케이션의 사전 예약으로만 제시해도 어렵지 않게 찾아온다. 애플리케이션을 깔고, 회원으로 가입하고, 사전 예약하고, 앱으로 브랜드의 컨텐츠를 두루 탐한다. 브랜드와 아트, 비즈니스를 네트워크와 기술로 묶어 제시할 때 가장 소화력이 뛰어난 시장이 아시아다.
한국 소비자들의 취향이,
한국이 새로운 트렌드와 디자인을 실험하는 장으로 주목받게 하다
게다가 애초부터 럭셔리 시장에서 아시아는 중요한 지역이다. 가령 영국의 시장조사 기업 유로모니터인터내셔널이 2016년 12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적인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한국 럭셔리 마켓은 강세다. 유달리 ‘고급스러움’을 추구하는 한국 소비자들의 까다로운 취향 덕에 서울이 새로운 트렌드와 디자인을 실험하는 테스트 베드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고급스럽고 까다로운 소비자들의 입맛을 맞춰주기엔 예술과 헤리티지를 말하는 아트 마케팅이 적격이다. 럭셔리 브랜드들이 자신들의 역사부터 세계적인 예술가와의 협업까지 아울러가며 아트 마케팅을 내걸고 아시아를 찾아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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