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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SEOULive] 모호한 시간 속, 어느 곳으로의 초대

    2020-11-24


    모호한 시간 속, 어느 곳으로의 초대


    에디터 지은경 사진 조성현


    만약 서울을 배경으로 영화를 촬영한다면 오래된 옛터와 고층 빌딩이 뒤얽힌, 조금은 생경한 이미지 안에서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의 초월을 일삼는 이야기 전개가 잘 어울릴 것이다. 어느 도시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서울 같은 넓은 도시가 오랫동안 품은 역사의 시간을 일상으로 느끼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넓다 보니 모든 곳을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도, 또 걷고 있는 길목을 돌면 어떤 의외의 장소가 펼쳐질지 예측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수도 없이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서울의 곳곳에 판타지를 덧씌운다고 하나 이상할 것 없다. 그러한 서울이 가진, 놀랍도록 의외의 장소들을 발견한다면 '경희궁'의 뒤뜰은 그 순위권에 꼽기에 충분하다.

    서울의 예술영화관 '에무 시네마'는 2010년에 개관한 복합문화 공간이다. 자칭 독립영화와 예술영화, 그리고 작은 극장의 향수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꽤나 유명하다. 서울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작은 극장들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옆에 위치한 오르막길로 올라야만 모습을 드러내는 이 작고도 소박한 극장에서 사람들은 그저 영화만 보고 갈 것이다. 그 누구도 영화관 뒤로 조금만 더 오른 뒤 코너를 돌면 예상치 못한 비밀의 장소가 기다리고 있음을 예상치 못한다.

    자, 이제 코너를 한번 돌아보자. 에무 시네마를 지나 약 15m를 직진하면 왼쪽으로 길 하나가 나온다. 그곳으로 접어들어도 딱히 이렇다 할 특별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길은 다시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안내한다. 그러자 숲이라고 하기엔 작고, 공원이라고 하기엔 가파르고, 또 길목이라고 하기엔 나무가 너무도 예쁘게 우거진 작은 계단길이 나온다. 그 사이로 에무 시네마의 뒷마당도 엿볼 수 있는데, 나무 사이에 앉아 차를 마시면 근사한 기분이 들 것 같다. 계단을 따라 무작정 오르니 눈앞에 빽빽하게 벽을 이루는 나무들 사이로 작은 구멍이 하나 보인다. 머리를 숙여야 겨우 한 사람 통과할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다. 구멍을 통해 환한 빛줄기가 계단 위로 드리워져 있다.


    이 뒷길을 아는 사람들은 이곳을 '토끼굴'이라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을 찾은 방문자로 하여금 마치 토끼 시종장에 이끌려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 앨리스가 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마치 누군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정확히 회상하며 조성해 놓은 길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동그랗게 난 밝은 빛을 향해 계단을 올라 작은 구멍을 통과하면 눈앞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풍경이 놓여있다. 경희궁의 뒤뜰, 술렁이는 기와지붕의 물결과 아름다운 나무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높은 고층 빌딩들, 마치 우리는 과거의 시간 속에 서서 미래의 서울을 바라보는 듯, 환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풍경이다. 게다가 이 작은 토끼굴 효과는 몇 번을 찾아와도 구멍을 지나 만나는 경희궁의 뒤태에 감탄을 불러올 만큼 드라마틱한 전개를 펼친다.



    경희궁은 1617년 광해군 9년 때 착공하여 1623년에 완공된 조선 후기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으로, 많은 왕이 정무를 보던 곳이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서쪽에 위치했다 하여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로도 불렸던 경희궁은 원래 경복궁 크기의 60% 이상을 가진 규모로 한양도성의 서쪽 성벽 일부와 한양 서북부를 차지하던 대규모의 궁궐이었다. 정조와 현종이 즉위식을 했던 숭정문과 숭정전이 있고, 지금은 서초동으로 이전한 서울고등학교의 터도 이곳에 있다.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나무들이 많아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풍경이 색을 달리하며 유혹한다.

    일반적으로는 경희궁의 정문을 통해 진입해 경희궁의 내부를 살피다 돌아가곤 하기에 뒤뜰의 모습과 경희궁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동산의 존재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떠나게 된다. 경희궁의 뒷마당과 오밀조밀하게 설계된 궁의 뒤뜰을 감상하며 오른쪽으로 향하면 소박한 크기의 운동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에서는 산책 나온 동네 주민과 조기 축구회 회원들,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언제나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앞으로는 확 트인 경희궁의 기와들과 반대편에 우뚝 솟은 고층 건물들의 모습 사이 어디쯤인가 존재할 법한 멈춰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나절을 보내는 듯 여유롭고 즐거워 보인다. 그 사이로 나 있는 한적한 숲길이 발걸음을 유혹한다. 숲으로 가려진 계단을 조금만 더 오르면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경희궁은 그 자태를 더욱 뽐내는 듯 넓은 시야를 선사한다. 그리 높지는 않은 작은 언덕에 불과하지만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 우리를 점점 신비한 과거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듯하다. 이곳에서 400년을 꿋꿋하게 지켜온 느티나무의 모습도, 뻐꾸기의 게으른 노래도 만날 수 있다.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길을 걷자니 문득 새삼스러운 의문이 머릿속을 채운다. 이곳은 어디일까? 우리는 어느 시간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한참 동안 언덕 위 숲속에서 길을 헤매도 좋다. 울창한 나무 사이 어디에서건 경희궁의 모습이 나침반이 되어 길을 인도할 테니.


    Local to Seoul

    서울문화재단의 Local to Seoul 프로젝트는 서울 각각의 지역에 존재하는 문화와 정체성을 발굴하고, 새롭게 발견한 '로컬'을 바탕으로 '서울'의 정체성을 확장하려는 시도입니다. 동네 곳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서울 X 문화]의 새로운 모습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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