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서울문화재단은 서울을 이루는 지역들이 각각의 지역문화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N개의 서울>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동네의 문화 자원을 발견하고, 연결하는 과정, 동네의 문제X이슈를 문화적으로 접근하는 시도, 동네를 바꾸는 움직임을 통해, 동네 곳곳에서 만드는 새로운 서울X문화를 기대합니다.


 

미아리 고개는 성북구 동선동과 돈암동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한 많은 미아리 고개라는 표현은 이곳에 슬픈 역사가 있음을 직감하게 한다. 사실 이 고개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인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이다. 죽은 자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고개이자, 산 자의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라고 하여 ‘미아리 고개를 넘어간다’라고 하는 말이 생겨났다. 이 표현은 단장(斷腸,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슬픔)의 생이별을 뜻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 당시 서울의 최후 방어선이었던 미아리 고개는 남북의 치열한 교전으로 많은 사람이 죽은 곳이다. 또, 북한군이 서울을 수복했을 때에는 많은 사람을 끌고 가서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슬픈 역사는 한 많은 미아리 고개라는 표현을 낳았고, 1956년 발표된 노래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통해 후대에 전해졌다.

1958년 이장 계획이 추진되기 전 미아리 공동묘지의 모습 Ⓒ 서울사진아카이브

1960년대 초에는 미아리 공동묘지가 이전되고, 남북으로 옹벽이 만들어지며 굴다리가 생겼다. 미아리 고개의 어둡고 낮은 곳에는 시각장애 역술인들이 모여들었다. 원래 남산 양동 판잣집 촌에 모여 있던 시각장애 역술인들이 재개발로 쫓겨나면서, 교통이 편하고 집값이 쌌던 미아리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그렇게 굴다리 밑에는 시각장애 역술인들의 노점이 생겨났다. 시각장애 역술인 이도병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으며 미아리 고개의 점성촌은 부흥하기 시작했고, 70년대와 80년대 최전성기를 맞았다.

 

미아리고개 너머엔 일본 강점기에 조성된 한국인 전용 묘지가 있었다. 예로부터 사람의 영혼은 북으로 드나든다고 믿었는데, 서울의 북북동에 해당하는 미아리고개는 영혼이 다니는 길목이었던 셈이다.

– 심남용(대한맹인역리학회 학술이사), 한겨레21 인터뷰(2005) 중

 

영혼이 다니는 길목이라는 미아리 고개는 점성촌으로 유명했지만, 미신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차별의 시선을 계속 받았다. 이후 고가도로 하부는 20년간 쓰레기 집하장이 되어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곳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2015년, 이 공간은 미인도라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자율방범대 초소가 있던 곳은 주민의 쉼터이자 마을 소식과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는 주민 스토리 공간으로, 환경미화원의 자재 창고로 사용되던 곳은 다양한 공연과 워크숍이 열리는 다목적 공간으로 바뀌었다. 한 많은 미아리 고개로 불리던 슬픈 역사의 공간은 현재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주민들의 쉼터이자 예술가들의 영감이 되는 곳,
고가도로 하부 공간 미인도

미인도는 미아리 고개와 사람(人), 길(道)을 조합한 단어다. 방치된 미아리 고개의 고가도로 하부를 주민들의 쉼터와 문화예술공간으로 바꾸는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했다. 2015년 개관 후 다양한 공연과 마켓, 전시를 열면서 주민들이 다양한 모임과 놀이를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지난 12월 5일부터 8일까지, 미인도에서는 공간의 이름을 딴 전시 ≪미인도≫가 열렸다. ‘빈 공간의 생존법, 보이지 않는 도시의 힘’이라는 주제로 1명의 기획자와 4명의 작가가 모인 공동 기획전이었다. 기획자 유희정을 비롯한 박동명(사진), 이지영(설치), 정기황(건축), 허혜윤(회화)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미인도의 현재 모습과 공간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을 담아내고자 했다. 박동명, 이지영, 정기황은 미아리 고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예술가이고, 허혜윤 작가는 성북구 마을예술창작소 월장석 친구들 소속 예술가이다. 특히 정기황 건축가는 미아리고개 재생 프로젝트의 총괄 기획자로 복합문화공간 미인도의 기획부터 설계까지 참여했다.

 

≪미인도≫의 참여 작가들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자신들을 이곳에 불시착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다양한 이유로 미아리 고개에 불시착한 예술가들이 미인도라는 공간에 모였으니, 그 공간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을 그대로 전시에 담기로 했다. 그들은 공간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고, 미인도라는 소재 외에 하나의 주제로 작품을 통일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다만 어둡고 소외된 공간이 누군가를 만나 변화하는 과정을 충분히 공유했다. 또한 전시를 통해 관객들이 모두 다른 해석을 가져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품에 대한 설명은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시를 보지 못한 관객들을 위해, 참여 작가의 기획 의도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은 사람들이 미인도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찾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만나 즐거워하고, 무엇보다 이곳에서 사람과 만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좌측부터 정기황, 유희정, 이지영, 허혜윤, 박동명. 참여 작가들이 오프닝 파티 전에 모여 함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정기황, <땅>
수많은 노력 끝에 땅 위로 피어난 아름다움

정기황은 미인도의 건축을 담당한 총괄 기획자로서, 미아리 고개라는 동네와 미인도라는 공간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다. 그는 5년 동안 미인도라는 공간에서 진행된 수많은 전시를 지켜보며 <땅>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땅>은 미인도가 생기기 이전의 바닥 모습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작품이다. 바닥에는 이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작성했던 각종 제안서와 공문 등 서류들이 깔려 있고, 그 위로는 새로운 꽃이 피어있다. <땅>은 현재 미아리 고개의 도시적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도시는 오직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활동의 가치를 들여다보자는 의미에서 맨바닥을 드러냈다. 정기황은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가 사실 밑에서 엄청난 발놀림을 하는 것처럼, 미인도도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땅>은 미인도를 만들어 내기 위한 수많은 노력이 있었기에, 그 위로 미인도라는 아름다운 공간이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박동명 <집하장>, <미인도>
공간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박동명은 지난 20년간 쓰레기 집하장이었던 미인도의 공간을 새롭게 바라보자는 의미에서 <집하장>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사실 미인도가 생긴 후에도 옛날의 습관대로 같은 곳에 쓰레기를 버리는 동네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그는 그 쓰레기를 클로즈업으로 찍어 투명 필름에 인쇄했다. 색이 입혀진 투명 필름은 빛을 받아 반짝이고, 미인도 근처에 쌓여있는 쓰레기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집하장>은 쓰레기 집하장이었던 미아리 고개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완전히 새롭고 아름다운 시선으로 미인도를 바라보게 만든다.

 

그의 작업은 미인도라는 공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미인도라는 내부 공간 자체에 집중해 공간을 이루고 있는 기둥과 가벽, 커튼을 사진으로 담았다. 미인도의 기둥 사진은 다시 봤을 때 새삼 다리 밑이라는 공간의 가장 큰 특징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 <미인도> 시리즈의 또 다른 사진들에도 미인도라는 공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개인적인 시선이 머문다. 그는 미인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가리는 가벽과 미인도의 안과 밖을 나누는 커튼에 답답함을 느꼈다고 한다. 어둡고 음습한 장소로 유명했던 미아리 고개 다리 밑으로 미인도가 빛을 비추길 바라지만, 가벽은 미인도의 모습을 가리고, 커튼은 빛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다. 그런 의미에서 가벽의 모서리를 확대해 낯설게 보이게 했고, 커튼이 닫힌 모습과 커튼이 열린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모습을 마주 보게 배치했다. 작품 <미인도>를 통해 이 공간을 새롭고 낯설게 바라보며 미인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정기황 <땅>, 2019, 3.3제곱미터, 혼합재료
image박동명 <집하장>, 2019, 90cmx210cm, uv프린트

이지영 <먹고 사는 것>, <meal>, <집>
예술가의 먹고사는 이야기

이지영은 오랫동안 미인도에서 활동해 온 작가다. 그는 이번 전시의 작품들을 통해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공간에서, 그 공간을 통해 예술가로서 자신이 먹고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먹고사는 이야기는 모두에게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다만 이지영의 작품에서는 어떤 재료가 사용되었는지 흥미롭게 지켜보면 좋겠다. <먹고사는 것>은 포대 자루로 만들어졌다. 전시에 온 사람들은 그 위에 앉거나 누워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meal>과 <집>은 손수레에 각각 밀가루와 시멘트로 만든 정육면체가 담겨있다. 제목과 함께 손수레, 밀가루, 시멘트, 그리고 그 형태에 대해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자유롭게 자신만의 먹고사는 이야기를 그려볼 수 있는 작품이다.

 

허혜윤 <경계에 닿았네>, <그들은 자라서>, <누구를 만났을까>, <어디로 갔을까>
경계 밖 공간의 상상

허혜윤은 동네를 산책하면서 풍경을 재발견하는 과정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는 재개발 지역을 가리기 위한 천막 너머의 풍경이 궁금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경계 너머 존재하는 낯선 공간에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남아있는 무성한 식물들은 어떤 이야기를 가졌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관람객에게 자유로운 상상의 여지를 주면서, 오랫동안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으로 방치되다 도시 재생으로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간으로 재탄생한 미인도를 떠올리게 한다.

이지영 <먹고사는 것>, 2019, 가변크기, 혼합재료
허혜윤 <경계에 닿았네>, 2019, 150cmx210cm, 장지에 아크릴

일제 강점기의 공동묘지에서 한국 전쟁의 교전지로, 맹인 역술인들의 점성촌에서 버려진 쓰레기 하치장까지 미아리 고개는 노래의 가사처럼 한 많은 시절을 지나왔다. 그렇게 어두운 기억이 가득하던 곳이 주민들의 희망을 담아 따뜻한 빛이 있는 공간, 미인도로 재탄생했다. 여전히 이곳은 쓰레기가 버려지고, 지나는 차들의 요란한 소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미인도에서 활동하는 지역 예술가들은 더는 어둡지 않은 미아리 고개를 꿈꾼다. 미인도에 모여든 주민과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공간을 재발견하고 그 의미를 되새긴다. 또, 다양한 인연을 맺으며 그것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 많은 미아리 고개가 아닌 ‘사람’과 ‘길’이 만나는 새로운 미아리 고개를 만나보고 싶다면, 복합문화공간 미인도를 찾아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