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서울문화재단은 서울을 이루는 지역들이 각각의 지역문화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N개의 서울>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동네의 문화 자원을 발견하고, 연결하는 과정, 동네의 문제X이슈를 문화적으로 접근하는 시도, 동네를 바꾸는 움직임을 통해, 동네 곳곳에서 만드는 새로운 서울X문화를 기대합니다.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섬유 노동자 만 오천 명이 뉴욕 럿거스(New York, Rutgers) 광장에 모여 외친 말이다. 생존을 위해 일할 권리인 빵, 인간답게 살 권리인 장미를 요구한 이들의 목소리는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제정하는 배경이 됐다. 112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빵과 장미를 갈구하는 이들이 있다. 작품 활동만으로는 자신의 예술 세계와 생계를 지키는 것이 버거운 예술인들이 그들의 존재와 문래동의 현 위치를 알리고자 작업실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문래창작촌 예술인 예술제 중 하나인 <빵과 장미>는 열흘간 12개 작업실의 주인들이 도슨트로 나서 구석구석을 직접 설명하는 오픈 스튜디오다. 단순한 공간 설명 위주의 오픈 스튜디오와는 거리가 멀다. 관객이 다양한 시선으로 문래를 볼 수 있도록 여러 매체로 기록한 문래동의 모습, 개인적인 창작 활동의 결과물, 워크숍 등 체험 프로그램을 공간별로 구성했다. 무심코 지나쳤던 문래의 철공소 골목에는 어떤 예술인들이 살고 있었을까. 세 개의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Projectroom. doosee
나현정, 송기두

나현정은 책 표지, 잡지 등 다양한 매체에 그림을 그리며 다수 그림책을 낸 일러스트레이터다. 동시에 에세이와 단편소설을 써, 이를 회화로 풀어내는 문학적 예술인이기도 하다. 그녀와 함께 프로젝트룸 두씨(Projectroom. doosee)라는 작업실을 공유하고 있는 송기두는 다양한 구조적 형태의 가구를 만드는 디자이너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과거에 건축사무소에서 일했던 그는 오래전부터 가구가 공간과 맺는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가구의 본질을 기능만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불편하지만 아름다운 의자에 기꺼이 앉아 즐기는 감흥, 일종의 사용성을 가치 있게 여긴다.

 

백색 파티션으로 여러 구획을 만든 이들의 작업실은 언뜻 미로처럼 느껴진다. 이곳 또한 언젠가 재개발로 사라질 것이라는 두 작가는 <빵과 장미>를 위해 작업실을 전시의 개념과 혼재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나현정은 작업실에서 지내며 만난 대상을 에세이와 소설 사이의 글로 풀어내고, 이를 다시 페인팅으로 승화한 작품을 작업실에 전시했다. 송기두 역시 문래라는 지역과 작업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두 작가는 작업실 전시 <23시 9분, 그 두 사람은 어디에 있었나>를 준비하면서, 모티브인 프로젝트룸 두씨에서 직접 작품을 감상해야 작품의 의미가 살아난다고 강조한다. 문래의 지금을 담아낸 입체적인 작품을 보고,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나현정, 송기두 작가

Piece of Peace
천근성, 이석희, 최서우

천근성은 공장을 비롯해 주택, 상가, 작업실 등 문래의 곳곳에서 모은 먼지로 프랙털 구조의 설치 작품을 만들어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전시를 열었던, 독특한 문래의 기록자다. 설치미술작가로 활발히 활동 중인 그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이석희, 작가 최서우와 함께 문래에서 피스 오브 피스(Piece of Peace)라는 작업실을 꾸렸다. 세 사람이 문래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저렴한 임대료, 여러 장르의 작가 간 교류, 밤늦게 공구를 써도 층간 소음 걱정이 없는 환경 때문이었다.

 

피스 오브 피스는 자투리를 매개로 단절 대신 소통을 만드는 작업실이다. 우선 작업 과정에서 나오는 폐기물 중 다시 쓸만한 재목, 원단, 페인트, 각종 금속 부품을 모았다. 이를 동네의 창작가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작업실 한쪽에 자투리 잡화점과 무료 공구 대여 코너를 마련했다. 물론 주변의 반응은 호의적이다. 자투리를 가져다 쓴 누군가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쓰고 남은 재료를 가져와 기부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투리의 자발적 순환, 작가 간의 소통, 새로운 협업의 기회를 만든 피스 오브 피스의 사용법을 세 작가가 오픈 스튜디오 기간 동안 친절히 알려준다. 또한, 작가들이 구상한 새로운 작품과 함께 내부 작업실을 구석구석 소개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최서우 작가
피스 오브 피스의 공간. 뜯고 난 대용량 페인트를 소분한 뒤 직접 디자인한 로고로 리패킹했다.

브띠끄 빈
김홍빈, 유진아

김홍빈은 프로젝트성 의상 작업을, 유진아는 영화 의상을 다루는 감독이다. 마치 듀오처럼 활동하는 두 작가는 최근 파주 광탄의 할머니들과 함께 <광탄몸뻬/광탄패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할머니들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패턴을 만들어 원단에 실크스크린을 찍으면, 이렇게 완성된 원단으로 몸뻬 바지(왜 바지)를 만들어 할머니에게 드리는 워크숍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몸뻬의 탄생지인 일본의 할머니들과 제2의 <광탄몸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다는 김홍빈의 희망은 다른 공동체와의 참신한 협업 활동이다. 그가 새로운 만남을 유달리 반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김홍빈이 원래 지냈던 곳은 낙석이 떨어질 정도로 낡았던 개포동의 작업실이었다. 재개발로 쫓겨나다시피 나온 그는 황폐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예술인들이 모여있는 문래를 찾아 의상실 브띠끄 빈을 차렸다. 하지만 이곳 역시 올해 12월이 되면 비워야 한다. 두 작가가 준비한 <브띠끄빈 이전폐업>은 브띠끄 빈의 끝을 씁쓸히 기념하는 고별전이다. 지금까지의 작업을 입힌 마네킹, 제작 과정을 기록한 영상, 다양한 패턴 전시 외에도 작가가 직접 시연하는 실크스크린 워크숍을 준비했다.

김홍빈 작가

문래의 예술인들은 자신의 작업실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함을 마을에 대한 애정으로 애써 덮으며 살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처럼 마을을 둘러싼 급격한 변화로 인해 문래의 미래를 가늠하긴 쉽지 않다. 문래를, 그리고 자신의 작업실을 지키기 위해 자체적으로 모인 문래마을예술인회의는 예술인이 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을 맞고, 문래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이들이 준비한 <빵과 장미> 또한 문래에 이런 예술인들이 살고 있다고 외치는 진중한 목소리다. <빵과 장미>를 준비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문래를 알고 싶고, 문래의 예술인들과 대화하고 싶은 새로운 이웃이다. 둘의 자연스러운 만남은 새 이웃의 삶에 활력을, 예술인의 삶에는 빵과 장미를 안겨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