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3 Dots

▪ 문화역서울284는 대한민국 서울의 옛 관문으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역사적인 장소다.

▪ KTX 20주년 기념 철도문화전은 미디어, 조각, 설치,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10여 명의 신진‧중진 작가와 협업해 철도를 재해석한 예술작품을 선보였다.

▪ KTX로 대표되는 철도가 추구해야 할 비전을 과거-현재-미래의 흐름 위에서 작가들의 예술적 상상력과 창조성을 더하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94년 6월 28일(고종 31년), 공무아문(工務衙門)에 철도국이 설치됐다. 우리나라의 성장 동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철도는 우리 가까이에서 대한민국 근현대사 전반을 아우르며 다양한 변화를 이끌었다. 그중에서도 올해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기관이 생긴 지 130년이 되었을 뿐 아니라 수도권 전철 개통 50주년(1974년 개통), 시속 300km 속도 혁명을 일으킨 KTX 개통 2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나라 철도사에 있어 뜻깊은 2024년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만큼 문화역서울 284에서 KTX 20주년 기념 철도문화전(3월 29일-4월 21일)이 열렸다. 이전에도 철도문화전이 개최된 적이 몇 차례 있으나 이번처럼 큰 규모로 오랜 기간 진행된 것은 처음이라 안팎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이번 철도문화전이 열린 문화역서울284는 과거 서울역으로 쓰이던 건물로, 서울 거주자뿐만 아니라 여행자들 사이에도 눈에 많이 익은 건물이다. 1925년부터 80여 년 가까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로 들어서는 관문이자 고단한 근현대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2004년 KTX가 개통하며 지금의 서울역이 지어지기까지 실제로 열차를 탑승했던 역사로 사용되었다.

 

경성역이란 이름으로 시작된 과거의 이 건물은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던 경양식 집과 티룸 등을 갖춘 신문물 집결지였다. 서양 문물이 막 들어오기 시작하던 시점에 모던 보이, 모던 걸이 자연히 모여들 수밖에 없던 핫플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할 때, 또 시대를 앞서간 화가 나혜석이 남편과 세계 여행에 오를 때 국제 열차를 탔던 장소이기도 하다. 고향을 오가는 사람들이나 수학여행, 기차 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의 추억에 더해 역사적인 인물들의 거대한 발자취도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은 문화공간으로 활용되며 과거-현재-미래를 잇고 아우르는 역사적 장소가 되었다. 일반적인 기차역 그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 공간이 된 셈이다.

문화역서울284 전경 ⓒ 코레일
철도문화전 포스터 ⓒ 코레일

뻔하다고? 아니 한없이 펀(fun)해

이번 철도문화전의 주제는 “Journey Beyond Plus: 여정 그 너머”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 공예트렌드페어 등에서 예술 감독을 역임한 강신재 공간디자이너가 이번 전시의 총감독을 맡았다. 강신재 감독은 이번 주제와 관련해 “플러스를 나타내는 기호 ‘+’는 힘과 향상, 잠재력의 서사로 KTX가 촉발한 장소 간의 물리적인 연결을 넘어 우리의 일상생활에 더해진 가치와 미래에 대한 열망을 상징한다. 이때 KTX는 동서남북을 잇는 교통수단이자 사회와 시간을 이어주는 통합의 수단으로서 탐구된다”고 밝힌 바 있다.

 

특별히 강신재 감독은 이번 전시의 성격이 “KTX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철도사 130년여의 스토리를 작가들과의 협업을 통한 전시, 체험 등 다양한 콘텐츠로 풀어내는 아트 컬처 프로젝트”가 될 거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단순히 철도 하면 떠오르는 철도박물관의 소장품과 유물, 차량, 전기, 시설·장비, 부품 등 기술 분야의 전시품에 그치기보다 미디어, 조각, 설치,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신진 및 중견 아티스트들을 초대해 철도사와 예술이 어우러져 의미와 심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제대로 된 아트 프로젝트로 풀어냈다. 이러한 기획 의도는 탈 것, 또는 이동 수단으로서의 철도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전시물이 아닌 색다르게 재해석된 철도의 이야기와 오브제를 상단에 배치한 것만 봐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전시장은 문화역서울284가 지닌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가치를 잘 드러내도록 시대에 따라 세 파트로 구성되었다. 과거를 상징하는 첫 번째 파트에서는 철도가 가져온 권익에 대한 아카이브 전시가 진행되었다. 오늘날까지 KTX와 코레일이 시민의 삶에 가져다준 권익과 그 안에 담긴 희로애락(喜怒哀樂)들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소장품, KTX와 각종 열차 모형 등을 배열했다. 전시장 1층 귀빈실과 서측 복도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첫 파트는 긴 시간을 달려오며 국가와 개인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들을 미쳐 온 철도의 지난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현재를 상징하는 두 번째 파트는 “철도의 사명과 다짐”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술·문화·디지털 전시로 꾸려졌다. 많은 탈것이 개발되었지만 오늘도 여전히 시민들이 다양한 방향으로 꿈을 펼치며 자신의 삶을 일구어 갈 수 있도록 이동을 돕는 동행자로서의 코레일을 그려냈다. 여러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연출된 이 섹션은 1층 3등·1, 2등 대합실, 그릴 등에 배치되었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철도의 내일을 그린 세 번째 파트의 주제는 “철도의 고차원적인 비전”으로, 환경을 비롯한 사회 문제를 다루는 공기업의 비전을 제시하는 작품들이 전시됐다. 단순한 철도 사업을 넘어 종합 모빌리티 기업으로서의 전환을 꿈꾸는 미래 철도의 모습을 1층 메인홀, 2층 소식당, 구회의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강신재 작가의 「퓨처 디오라마」 ⓒ 직접 촬영
3등 대합실에 놓인 김신아의 「연결의 속도」 ⓒ 직접 촬영

전시장 입구이자 중앙 메인홀에 위치한 강신재 감독의 「퓨처 디오라마」는 이번 전시의 주제 작품의 역할을 했다. 철도문화전에 온 것을 직감할 수 있게 만드는 지름 5m의 대형 구가 로비 공간을 꽉 채웠다. 그 위로 미래의 지구를 상징하는 구를 감싸며 달리는 KTX, ITX-새마을, 무궁화호 같은 여객 열차와 컨테이너를 줄줄이 실은 화물 열차가 8개의 레일 위를 가로지른다. 거울처럼 제작된 이 작품은 네오 르네상스 건축양식의 100년 전 경성역 내부를 그대로 비추고 관람객 역시 반사되도록 연출했다. 눈앞에서 출발한 열차가 지구를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오는 동안 한 세기를 넘는 근대사의 흔적들이 시공간을 초월해 흡수되고 투영된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모빌리티 기업으로서 미지의 세계로 도약하는 KTX의 열망을 상징한다.

 

김신아 작가의 「연결의 속도」는 수많은 철길 위로 폭풍처럼 질주하는 증기기관차를 관통하는 터널형 설치작품이다. 레이어로 수평 대칭, 철도 이미지로 수직 대칭을 구성했다. 철도의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발전 과정을 속도감 있게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관람객은 작품의 정면에서 진입해 기차 내부를 통과하면서 이 여정을 경험하게 된다. 「퓨처 디오라마」와 다르게 관람객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흥미로운 형태다. 마지막에 마주하게 되는 거울을 통해, 작품은 관람객이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선사한다. 철도의 여정뿐 아니라 각자의 삶과 역사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부인대합실에 있는 선점원의 「철도사회」 ⓒ 직접 촬영
역장실을 채운 황선정의 「풍경을 위한 시냅틱 무브먼트」 ⓒ 직접 촬영

선점원 작가의 「철도사회」 또한 시선을 끈다. 인형을 쌓아 올리는 기존의 방식에 KTX 기장, 승무원, 역장, 역무원 등 철도에 근무하는 종사자들의 유니폼과 열차 객실 의자를 엮어 작품을 제작했다. 철도를 통해 이어지는 수많은 인간관계와 그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이야기를 의자라는 매개체를 사용해 형상화함으로써, 그저 목적지까지 운송하는 기능적인 수단을 넘어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고 얽히는 생동감 넘치는 사회적 공간임을 드러냈다.

 

황선정 작가의 「풍경을 위한 시냅틱 무브먼트」는 KTX가 환경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과 접근성을 위한 노력 등 사회적인 주제를 몰입형 미디어와 사운드로 풀어냈다. 작가가 직접 채집한 열차가 달리는 소리와 AI·포인트 클라우드 기술로 구현한 풍경 등 다감각 다채널 사운드와 영상이 송출된다. 합성된 디지털 풍경 안에 놓인 여백이 만드는 깊이감과 잠재적 에너지와 시간의 차원이 점과 점 사이의 연결, 차원과 차원 간의 연결을 상상하게 만들고 사람-자연-지역성을 넘는 상호연결성을 상징한다.

귀빈예비실에 설치된 차민영의 「기억의 파동」 ⓒ 코레일
소식당에 있는 박선기의 「An aggregation 240129」 ⓒ 코레일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기차에 오르며 우리가 들고 있던 가방은 무엇을 기대하고 어떤 우주로 우리를 이끌까. 삶의 다양한 파노라마를 여행 가방에 담아 낸 차민영 작가의 「기억의 파동」은 기차 여행을 함께 떠나는 가방을 통해 KTX의 여정과 승객들의 기억을 파장의 결 너비, 진폭, 속도 등으로 표현했다.

 

2층 소식당 복도에도 인상적인 작품이 놓였다. 박선기 작가는 관람객이 작품 사이사이를 지나다닐 수 있게 만든 「An aggregation 240129」를 선보였다. 물질의 종착지이면서도 불이라는 현상의 출발지이기도 한 숯을 사용해 자연의 순환적 의미와 물질문명의 순환 가치를 끌어내는 열차의 연계성을 보여준다. 작품의 의미처럼 열차는 인적 물적 자원을 더 멀리, 빠르게 이동시키고 세계의 역사를 연결하며 실제적 소통의 길을 닦아주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69개 KTX 역이 전국을 밀접하게 연결하며 자원과 문화가 원활히 순환할 수 있도록 기여한 점을 부각한다.

 

구회의실에 놓인 「49초, 11초」는 철과 기계 장치로 빛을 통해 공간을 그려내는 키네틱 아티스트, 김준수 작가의 작품이다. 열차가 다니는 레일을 모티프로 KTX의 비전을 풀어냈다. 속도와 공간에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 작가는 원형으로 제작된 9개의 모듈을 공간상 원통형으로 배치하고, 원형 가운데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모듈 LED 바를 설치했다. 광원이 원통형 내부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원형 모듈의 형태가 공간 벽면에 거대한 그림자를 만든다. LED 바의 방향성과 DOT의 흐름을 이용하여 KTX의 속도를 표현했다.

구회의실에 놓인 김준수의 「49초, 11초」 ⓒ 코레일

공기업 전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철도문화전의 포스터에는 04부터 24까지의 숫자가 나열되어 있다. 그걸 보고 단순히 KTX 개통의 발자취를 훑거나 또는 철도가 우리나라에 첫 기적을 울린 시점부터의 연대기를 의례적 정리한 전시회로 생각했다면 철도의 문화적 가치와 위상을 적잖이 낮게 본 것일 것이다. 이번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한 강신재 예술 감독과 김미연 큐레이터 그리고 함께 참여한 작가들은 그런 익숙한 접근과 뻔한 인식에 크리에이티브를 앞세운 문화적 죽비를 들었다. 전시 팸플릿에 “이 전시는 단순히 KTX 개통 이후의 20년을 늘어놓은 타임라인이 아니다’’라고 선언적으로 밝힌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전시는 KTX가 국민 생활 편의와 권익 증진에 실질적으로 어떠한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지 고찰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에 속도 혁명을 촉발한 KTX의 의미를 거시적으로 조명하고, 사회와 시간을 잇는 통합의 수단이 된 KTX와 그 안에 탑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미시적으로 탐구한다. 예술적 상상력으로 이전과 다른 차원의 전시를 선보인 셈이다.

 

당초 이번 행사는 KTX 기념일인 4월 1일부터 약 일주일간만 진행하는 것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작가들의 유니크한 기획력과 작품 완성도에 대한 기대 덕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철도 문화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높이기 위해 24일간으로 늘렸다고 한다. 철도가 공기처럼 우리 생활에 스며들었듯 이번 전시 역시 자연스레 철도 문화의 깊이를 한 번 더 다지는 계기가 됐다는 평이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