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피티(Graffiti)는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벽에 낙서처럼 그린 그림이다.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 Graffito가 어원이다. 그래피티는 고대 동굴 벽화나 이집트의 유적까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거리의 예술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거장인 사이 톰블리(Cy Twombly, 1928~2011)는 휘갈겨 쓴 낙서처럼 보이는 캘리그래픽적 양식을 선보였고,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도 낙서의 표현법에 관심을 보였다.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장 뒤뷔페(Jean Dubuffet) 또한 아웃사이더 아트로서 낙서에 주목했다.
이러한 예술가들의 관심과 더불어 현대의 그래피티는 1960년대 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탄생했다. 당시 필라델피아 지역에는 콘브레드(Cornbread)와 쿨 얼(Cool Earl)이라는 서명을 남긴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활동했고, 뉴욕 브롱크스 지역에서도 많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속도감 있게 그려진 문자와 그림들은 유쾌하고 상상력 넘쳤지만, 도시 미관의 입장에서 보면 골칫거리였다.
그래피티가 도시 문제에서 현대미술로 인정받게 된 것은 바로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1960~1988)의 공이었다. 바스키아의 그래피티는 기존의 것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는 자전적 이야기를 시로 쓰거나 다양한 기호를 덧붙여 그래피티를 그린 뒤 SAMOⓒ(세이모)라는 문구를 남겼다. 당시 뉴욕 예술계에서는 세이모가 누구인지에 관한 관심이 뜨거워졌고, 바스키아는 등장과 동시에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그는 27세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8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3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고, 2017년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그의 <무제(Untitled)>(1982) 작품이 1억 1천50만 달러(약 1천 2백억 원)에 팔리는 등 미국 작가 작품 중 최고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바스키아의 생애
장 미쉘 바스키아는 1960년 12월 22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이티 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어와 스페인을 구사한 어머니는 바스키아에게 두 언어를 가르치고, 바스키아와 함께 뉴욕의 여러 미술관을 다녔다. 1968년 바스키아는 차 사고로 비장을 심하게 다쳤는데, 입원 당시 어머니는 그에게 해부학의 고전인 『그레이의 해부학(Gray’s Anatomy)』을 선물했고, 바스키아는 책을 통해 인체의 구조에 매료되었다. 바스키아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뼈와 해골, 인체 그림은 이때 해부학책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바스키아가 7살 되던 해 부모가 이혼하게 되면서 아버지와 충돌이 잦아졌고, 그는 가출을 반복한다. 당시 친구인 알 디아즈(Al Diaz)를 만나 뉴욕 소호 거리를 누비며 곳곳에 스프레이로 흔해 빠진 낡은 것이라는 뜻의 세이모(SAMO, Same Old Shit)에 저작권 기호를 붙인 SAMOⓒ라는 문구를 남긴다. 세이모라는 문구와 그래피티로 표현된 그들의 철학적 시가 주목을 받으면서 1980년 그룹 전시인 <타임 스퀘어 쇼(Times Square Show)>를 통해 호평을 받고, 바스키아는 1981년 <SAMO>라는 이름으로 첫 개인전을 열게 된다. 이후 PS1,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 다양한 공간에서 전시를 개최했으며, 이외에도 카셀 도큐멘타 7, 휘트니비엔날레 등에 참여하면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거리, 영웅, 예술
바스키아의 대표작으로는 <기도하는 사람>(1984), <흑인>(1986), <피렌체>(1983), <천국>(1985), <재즈>(1986) 등을 꼽는다. 바스키아의 그림은 미국 뉴욕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주요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현재 롯데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장 미쉘 바스키아 – 거리, 영웅, 예술》(~2021. 2. 7.) 전시에서도 그의 원화 150점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작 중 1981년에 그려진 <뉴욕, 뉴욕(New York, New York)>은 바스키아 초기작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바스키아는 아크릴, 오일 스틱, 스프레이 페인트, 종이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텍스트와 드로잉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스키아가 문자를 쓰고 지운 흔적이 보이는데, 그 자체가 작품을 구성한다. 텍스트와 드로잉을 한 화면 안에 배치하는 작업 방식은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 1914~1997)의 글씨를 쓰고, 지우고, 재배열하는 컷 업(Cut-up) 기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텍스트와 드로잉의 조합을 통해 뉴욕 풍경을 묘사하고 자신의 내면을 표현했다.
“나는 더 잘 볼 수 있게 하려고 단어들에 선을 그어 지워버린다.”
– 장 미쉘 바스키아 –
바스키아의 <잡 애널리시스(Job Analysis)>는 만화적 요소가 들어있는 작품이다. 당시 미국 사회는 할리우드 영화가 인기를 끌고 텔레비전이 각 가정에 보급되었으며, 영화와 만화가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파된 시기였다. 바스키아는 어린 시절 만화가가 되길 원했다라고 말한 것처럼, 만화를 숭배하며 자신의 작품에 만화적 요소를 다양하게 등장시켰다. <잡 애널리시스>에서는 워너 브라더스의 <루니툰>에 나오는 포키(Porky) 캐릭터를 그렸으며, 이처럼 바스키아는 만화와 대중매체 이미지를 차용하면서 자신의 그림을 문화적 기호로써 표현했다. 그는 또한 이 작품에서 만화 제작사인 UPA 프로덕션 로고를 작품 하단에 배치하고, 작품 곳곳에 만화와 관련된 텍스트를 넣기도 했다.
<무제, 옐로우 타르 앤 페더즈>는 바스키아가 LA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그림이다. 이 작품은 기법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으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기법적 측면으로, 바스키아는 이 작품에서 제록스, 콜라주, 아상블라주 등의 기법을 사용한다. 다른 작품에 붙여 재사용하는 제록스 기법은 자신이 창조한 이미지를 무한 반복할 수 있는 방식이자 반복된 도상들을 각인시키는 바스키아만의 독특한 전략이다. 또 이미지들을 오려 붙이는 콜라주, 냉장고, 문짝, 창문틀 등 일상용품이나 폐품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아상블라주 기법은 2차원 평면의 캔버스를 3차원 공간으로 확장한다.
<무제, 옐로우 타르 앤 페더즈>는 내용으로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바스키아 재단의 이사로 재직 중인 큐레이터 리처드 마샬(Richard Marshall)은 바스키아의 작품 주제를 여덟 가지 범주로 나누는데, 자전적 이야기, 흑인 영웅, 만화책, 해부학, 낙서, 금전적 가치, 인종주의, 죽음이 그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흑인 영웅과 인종주의의 주제가 드러난다. 여러 패널을 이어붙인 이 작품은 크게 상단부와 하단부로 나누어진다. 먼저 작품의 상단부에서는 검은색 왕관을 쓴 젊은 유색 인종 영웅이 등장하고, 정의의 저울을 들고 있는 사람과 천사의 모습도 눈에 띈다. 작품의 하단부에는 붉은색의 강렬한 터치가 눈에 띄는데, 새의 공격을 당한 잔인한 모습을 극대화하여 표현했다. 바스키아는 작품을 통해 인종차별을 당하는 유색인종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결과적으로는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진정한 영웅이 된다는 서사를 담고 있다.
바스키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더 필드 넥스트 투 디 아더 로드(The Field Next to the Other Road)>는 소비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뼈가 고스란히 드러난 인간이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을 그렸다. 앙상한 인간과 끌려가는 소가 대비적으로 표현돼 있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바스키아는 인간이 동물을 점유하고 독점하는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지구가 인류세로 접어들며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는 현재 시점에서 다시금 곱씹어 볼 만한 작품이다.
앤디 워홀과의 만남과 죽음
바스키아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이다. 바스키아는 1982년 처음으로 워홀을 만났고, 그와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다양한 공동 작업을 진행했다. 워홀이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작업을 하면 바스키아가 그 위에 드로잉과 텍스트를 덧입혀 작품을 완성하는 방식이었다. 바스키아가 미술계의 관심을 끌기 위해 워홀과의 공동 작업에 나선 것도 있었겠지만, 미국 회화와 아프리칸-아메리칸 문화유산을 중복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 회화의 유산에 그의 정통성을 덧입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낸 것이다.
하지만 바스키아에게 예술적 동지이자 아버지와 같은 버팀목이었던 워홀이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큰 충격에 휩싸인다. 1987~1988년 사이 그의 작품을 보면 붕대를 두르고 눈을 지워 버린 두상이나, 뼈대와 내장기관이 보이지 않는 인물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그의 후기 작품에는 환멸과 패배의 메시지가 드러나며, 자기 죽음을 예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그는 마약 남용으로 27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바스키아의 삶과 예술
1980년대 서구 미술에서는 기존의 모더니즘에 반발하여 포스트모더니즘 경향과 해체주의, 절충주의, 다원주의 등이 나타났다. 당시 신표현주의나 트랜스 아방가르드로 분류되는 예술가들은 개인적 감정의 표현을 중시하는 뉴 페인팅(New Painting)으로 나아갔다. 뉴 페인팅은 거대한 캔버스에 거친 붓질과 원색의 색채를 사용하고, 폭력, 죽음, 성(性), 꿈, 신화 등의 도상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비주류의 흑인 화가 바스키아는 뉴 페인팅의 방식으로 인종주의에 대해 저항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창조했다.
바스키아의 작품은 자신의 일생을 그대로 담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누구를 만나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가 드러난다. 사회적 편견과 인종 차별에 저항하는 에너지를 담아 거리 예술을 현대미술로 확장한 바스키아. 비록 그의 생은 짧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에 대한 여운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바스키아의 삶은 작품 그 자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