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부터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크고 작은 공공미술 행사와 프로젝트들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작가 혹은 기획자 그룹이 주도하는 독립적인 예술활동 외에, 정부 부처에서도 적극적으로 공공미술 관련 사업과 기금을 운영하고 있죠. 서울시의 예를 들면, 올해는 ‘2018 서울은 미술관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지역의 역사를 담은 거대 벽화 ‘만경청파도’를 제작하고, 미디어아트 플랫폼 ’서울로 미디어 캔버스’ 운영을 통해 영상 작가와 일반 시민의 다양한 작품을 대형 스크린에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공공미술축제 퍼블릭X퍼블릭’ 등을 기획하여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좀더 다양한 예술체험을 접할 수 있도록 그 기회를 넓히고 있습니다.
만경청파도
퍼블릭 초커아트
각 프로젝트에서 복잡한 도심을 비집고 일부 공간을 일시적인 미술의 장으로 전환하고, 이전보다 시민 참여를 더욱 격려하는 취지는 긍정적입니다. 다만 전시 장소와 작품 간의 연계성, 선정 작품을 공모 방식 등 앞으로 보완해나가야 할 점도 있는데요. 좀 더 역동적이고 시사점이 분명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번 글에서는 도시 공간을 충분히 활용한 공공미술 전시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독일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회적, 문화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히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분명 앞으로 더 의미 있는 행사와 프로그램을 만들어가기 위해 이 프로젝트가 가진 장점을 눈여겨보는 것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대략 이렇습니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도쿠멘타’와 함께 유럽 3대 미술 축제로 손꼽히는 권위 있는 현대 조각 전시회입니다. 여름과 가을에 걸쳐 약 네 달간 뮌스터시 전역의 다양한 야외 공간과 공공 공간에 작품이 설치되며, 방문객은 작품을 찾아다니면서 자연스레 이를 둘러싼 도시를 함께 구경합니다. 전시는 전통적인 조각상은 물론 이제 영상, 설치, 퍼포먼스 작업 역시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시 특성상 별도의 입장권도 필요하지 않아서, 미술 분야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죠. 가장 큰 특징으로는 10년을 주기로 개최된다는 점인데, 앞서 말한 유럽 3대 미술축제가 모두 열렸던 2017년에는 제 5회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를 보기 위해 더욱 많은 이들이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행사가 벌어지는 뮌스터는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에 위치한 약 인구 30만 명의 중형 도시로, 독일인들에게 종교와 대학, 그리고 자전거의 도시로 여겨집니다. 평소에는 돔 지붕을 얹은 중세시대 고건물이 곳곳에 보이는 다소 조용한 동네이지만,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가 열리는 해에는 도시 상주인구보다 두 배가량 되는 방문객이(2017년 기준 65만 명) 찾아와 도시 전체가 떠들썩해집니다.
공공미술의 가치를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시작된 전시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가 기획될 무렵인 오십여 년 전, 뮌스터 시민들에게 미술은 현재와는 다르게 전혀 달갑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1974년 뮌스터시는 도시 환경을 새롭게 꾸미고자 조각 작품을 몇 점 구매하기로 했습니다. 작품 선정은 당시 베스트팔렌 시립미술관의 큐레이터 클라우스 부스만(Klaus Bussmann)이 맡게 되었고, 그는 미국 조각가 조지 리키(George Rickey)의 키네틱 조각 한 점을 골랐습니다. 지역 언론에 이 계획이 보도되자 뮌스터 시민들은 거세게 반대했습니다. 시민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낯선 조각품을 13만 마르크라는 세금을 들여 구매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죠. 그도 그럴 것이, 당시까지 시내에 20세기 동시대 추상 조각이 설치된 적이 전무했습니다.
부스만은 이러한 상황이 현대미술에 대한 시민들의 몰이해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몇 달 동안 방송에 출연하는 등 현대 조각, 공공미술에 대해 관심을 끌고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연장 선상에서 더욱 장기적인 공공미술 교육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야외 조각 전시회를 제안하게 되었고, 1977년 부스만과 큐레이터 카스퍼 쾨니히(Kasper Koenig)가 함께 9명의 작가를 초청해 개최한 것이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의 시작이었습니다. 즉, 시민들에게 공공미술 작품을 일방적으로 들이밀기보다, 적절한 방식으로 이해시키고 소통하려 했던 노력이 이후 시민들은 물론 세계인에게까지 사랑받는 행사를 낳은 것입니다.
Ayşe Erkmen, On Water
특징으로 짚어보는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1) 현지에서(In situ) 이뤄지는 작품의 제안과 구현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기획 과정에서 전시 주제를 설정한 뒤 작품 아이디어를 공모하지 않습니다. 대신 적절한 작가를 선정하고 초청하는 데에 공을 들입니다.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암시하듯이 이 행사는 단순히 작가가 이미 만든 ‘완성품’을 보여주는 전시회가 아니라 예술과 공공장소, 도시환경의 관계를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미학적, 도시공학적 관점에서 탐구하고 질문하며, 그 과정을 작품으로 실현하는 데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시에 초대받은 작가들은 직접 뮌스터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작업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그에 적절한 장소를 찾습니다. 이때 작가들은 뮌스터라는 도시의 역사성, 장소성, 지형에 대한 연구하며, 도시 특성과 동시대의 이슈를 함께 반영하는 작업을 고안합니다. 장소가 정해지면 작가는 그곳에 맞게 작품을 디자인하고, 모델이나 스케치를 만들어 최종 작품 계획안을 제출합니다. 이 아이디어 중에는 실제로 제작되어 설치되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때로는 비용이나 기술적인 문제로 수정되거나 아예 실현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작가와 기획자 간 장시간의 의견 교환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를 통해 그들은 현대 공공미술의 의미와 형식을 심도 있고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습니다.
Jeremy Deller, Speak to the Earth and It Will Tell You (2007–2017)
작가는 2007년에 텃밭을 가꾸는 뮌스터시 내 공동체들에게 기르는 식물과 날씨 등의 일지를 10년간 기록해달라고 요청했으며, 2017년에 여러 권의 장서로 묶어 전시했다.
2) 민-관의 적극적인 협조
공공미술 작품 구현을 위해서는 비용과 공간 사용 허가 등의 사안을 두고 여러 주체의 협업이 필수적입니다. 예컨대 어떤 작품이 특정 개인의 사유지에 설치되어야 한다거나, 전시 기간 내내 특수한 관리를 필요로 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작가가 제안한 아이디어를 최대한 구현하기 위해,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를 주최하는 LWL미술관과 디렉터팀을 주축으로 뮌스터시, 베스트팔렌주, 독일연방문화재단은 물론 여러 기업과 기관, 일반 시민들은 긴밀하고도 지난한 의사소통 과정을 수행합니다. 끊임없는 설득과 협의의 과정을 거치는 한편, 이 전시가 도시 및 기업마케팅의 수단으로서 어떠한 정치적 압력도 받지 않게끔 그 독자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전시의 구현은 이미 그 자체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공적 기금의 도움으로,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사회문화적 공존을 위한 대체불가하고 경제적 이익에 종속되지 않는, 다양성 넘치는 장으로서의 공공 공간의 중요성을 지시합니다.”
Michael Smith, Not Quite Under_Ground
작가는 타투샵을 거점으로 젊은이의 문화인 타투를 노인들과 나누는 워크샵을 진행했다.
3) 자전거와 그룹워크샵
뮌스터는 자전거의 도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독일 내에서 자전거 이용자가 유독 많은 도시입니다. 실제로 뮌스터의 상주인구 수의 두 배에 가까운 약 50만대의 자전거가 있을 정도이며, 시내를 빙 두른 원형 숲길처럼 곳곳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기 완벽한 코스들이 있습니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서는 이 특징을 살려 자전거를 타고 전시를 관람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합니다. 관람객은 미술관 옆에서 자전거를 저렴하게 대여할 수 있으며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지도 또는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확인하면서 시내 중심부에 있는 작품들부터 외곽쪽으로 몇 킬로 떨어진 작품까지 무리 없이 이동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전거는 작품들을 이동하는 동안 탐험하듯 적극적으로 도시를 관찰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한편 전시의 문턱을 낮추는 또 하나의 장치로, 주최 측은 또 관람객의 연령대, 국적, 배경 지식 수준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그룹 워크샵을 마련합니다. 각 작품에 연계된 워크샵이 있는가 하면 작품을 함께 돌아보는 그룹 투어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워크샵들은 작품에 대한 기본 정보 제공 후, 관람객의 생각과 의견을 위주로 두 세시간가량 토의를 진행합니다. 이러한 공공미술 교육을 통해 넓은 범위의 관람객들이 저마다 작품과 전시로부터 구체적으로 의미 있는 순간을 하나씩 가지고 돌아가게 됩니다.
4) 도시를 조각하는 조각들, 퍼블릭 컬렉션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사실 네 달여의 전시가 막을 내리더라도 끝나지 않습니다. 각 회마다 전시에 선보여진 작품 중 몇몇이 시민들에 의해 영구 소장용으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퍼블릭 컬렉션’에 속한 이 작품들은 이후에 ‘조각 프로젝트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공공기금을 통해 지속적으로 관리 및 유지됩니다. 결과적으로 작품이 담아내는 당대 사회적 이슈와 기억이 도시에 남게 되고, 뮌스터시 곳곳에 서로 다른 시점의 십 년의 흔적들이 층층이 쌓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겨진 38점의 작품들은 이렇듯 도시경관을 바꾸어 왔고 뮌스터 시민들의 생활 속에서 매일 새롭게 경험되고 있습니다.
Nicole Eisenman, Sketch for a Fountain (2017)
2017년 5회 전시작 중 퍼블릭 컬렉션으로 선정 되었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의 십 년이 말해주는 것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무료전시이지만, 수많은 관광객의 소비 덕분에 많은 부가수익을 창출합니다. 혹자가 이것을 이유로 전시를 5년에 한 번씩 개최하자고 말하자, 초창기 때부터 줄곧 디렉터를 맡고 있는 쾨니히는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가 고집스럽게 지키고 싶어하는 십 년이라는 시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물론 쾨니히는 ‘십 년 주기는 첫 프로젝트를 끝내고 다음 프로젝트를 계획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주기’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10년의 주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생각하기에 좋은 시간이며, 아울러 잊혀진 자리에 새로운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시간의 단위”라고요.
지도는 1977-2017 사이 뮌스터시에 위치했던 작품들을 나타낸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가 유지하고 있는 리듬은 놀랍게 느껴집니다. 만약 공공미술 행사를 포함해 문화예술 분야의 다양한 콘텐츠, 프로그램, 행사, 전시가 이러한 시간 단위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획득하게 된다면, 어떻게 달라질까요? 짧은 시간 내에 결과물을 내야하는 압박에서 벗어났을 때 보일 내용은 분명 더욱 헐겁고, 그래서 흥미로운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한편,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가 시작하기 전후 냉랭한 반응을 보였던 시민에게 예술을 주입하는 태도 대신 설득, 이해, 공유의 장을 열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내 공공미술 행사와 프로젝트가 더욱 성숙하기 위해서, 그 대상인 일반 시민을 위한 대중적인 공공미술 교육이 분명 필요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앞에서도 말했듯 장기적인 안목이 필수적이겠지요. 우리나라도 공공미술에 대한 인식개선과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시도 하고 있습니다. 10년, 아니 5년 후를 내다보고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와 같은 담대한 프로젝트가 진행될 수 있는 토양이 다져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