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는 사람들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선택하는 길이다. 그런데 도피주의는 대체로 부정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기에 도피를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길을 잃었다는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그런데 도피주의를 도리어 포용하고, 반전시키고, 다른 방식으로 연결할 방법을 모색한 예술적 실천이 있다. 바로 《하루하루 탈출한다(One Escape at a Time)》라는 제목으로 열린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도피주의를 매개로 사회정치적 사안에 대항하는 대중 미디어를 다루었다. 대중 미디어의 전략을 추적하면서 도피주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재편하고, 파편화된 현실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서울시에서 2년에 한 번 개최되는 전시로, 서울시립미술관이 주최한다. 2000년 미디어_시티 서울이라는 명칭으로 개막한 뒤, 2014년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타이틀에 걸맞게 동시대 미술 중 미디어아트 분야를 주로 다루며, 예술과 미디어와 도시 사이의 연결 고리를 탐색한다. 지난 20여 년간 예술가들의 교류를 확산하고, 예술에 대한 접근성을 확장하는 행사로 자리매김해 왔다.
제11회를 맞은 이번 비엔날레의 전시 제목 《하루하루 탈출한다》는 미국 시트콤 <원 데이 앳 어 타임(One Day at a Time)>에서 왔다. 이 프로그램은 쿠바계 미국인 가족이 하루하루씩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시트콤 형식을 취하면서 인종,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 정체성, 이주, 젠트리피케이션, 폭력 등 오늘날의 사회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담아낸다.
이러한 기획 의도에 걸맞게 《하루하루 탈출한다》에는 정치사회적 사안에 대해 발언하는 작품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번 비엔날레는 코로나19로 연기되어 3년 만에 개최되었으며, 지난 9월 8일부터 11월 21일까지 국내외 작가 41명/팀의 작품 58점을 선보였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예술감독 융 마(Yung Ma)는 코로나 팬데믹과 경제 위기로 침체된 시대 풍경을 예술로 전유하여 돌파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신작들을 소개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의 장기화로 현실 도피와 고립이 일상화된 근래의 시대적 풍경을 예술의 언어로 풀어낸 작품들을 다루었다.
비엔날레 참여 작가들은 불안, 두려움, 불확실성, 슬픔 등과 같은 감정을 나름의 예술적 언어로 표현하면서 도피주의를 비평적 도구로 삼아 미래로 나아가는 힘을 모색했다. 비엔날레에 소개된 리처드 벨(Richard Bell, 1953~)의 세 가지 영상 작품 <호주인 긁기(Scratch an Aussie)>, <브로큰 잉글리쉬(Broken English)>, <디너 파티(The Dinner Party)>가 그 예다.
리처드 벨은 호주 원주민 출신의 예술가로, 원주민 예술 집단인 proppaNOW의 창립자 중 한 명이다. 리처드 벨은 스스로 나는 미술가로 위장한 활동가이다라고 표현할 만큼 원주민 인권 문제, 인종 차별, 사회 정의, 토지 소유권 문제 등을 주요하게 다룬다.
<호주인 긁기>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정형화된 백인 호주 남성들을 심리 상담하는 상황을 보여주면서 호주 사회에 만연한 백인 우월주의와 원주민에 대한 차별적 고정 관념을 드러냈다. <브로큰 잉글리쉬>에서는 호주의 역사를 바라보는 원주민과 백인의 시각 차이를, <디너 파티>에서는 사회적 관습과 허위의식을 폭로한다. 이 세 편의 영상은 《승리를 상상하기》라는 제목의 전시에 포함돼 호주 전역을 순회한 바 있다.
예리한 시선과 도발적인 유머로 호주의 사회적 상황을 비판한 리처드 벨의 작품 옆에는 중국 후베이 출신의 리랴오(Li Liao, 1982~)의 영상 작품 <모르는 채로 2020>이 설치되어 있다. 이 작품은 코로나 팬데믹이 확산되던 2020년 초 중국 후베이에 머물던 작가가 봉쇄된 도시에서 제작한 퍼포먼스 영상이다.
작가는 손바닥 위에 기다란 장대를 놓고 균형을 잡으면서 텅 빈 광장과 공원을 누빈다. 장대 끝에 걸린 빨간 비닐봉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묘기에 열중하는 모습은 도피라는 전시의 주제와 잘 맞아떨어진다. 힘든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다른 행동에 몰입하는 경험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폴린 부드리(Pauline Boudry)와 레나테 로렌츠(Renate Lorenz)의 퍼포먼스 영상 설치 작품 <(No) Time>도 춤을 매개로 도피주의를 표현한다. <(No) Time>은 시간 (없음)이라는 뜻으로, 시간이 과거-현재-미래라는 흐름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가다가 멈추기도 하고 되돌아오기도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다양한 장르의 춤을 보여주는 영상 밖에는 세 개의 블라인드가 설치되어 있는데, 블라인드는 영상의 내용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블라인드 나름의 안무를 보여 준다. 이 같은 방식은 안과 밖의 경계를 흐리고, 퍼포먼스의 범위를 확장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경험을 다양하게 표현한다.
전시장 2층 입구에는 아이사 혹슨(Eisa Jocson, 1986~)의 신작 <슈퍼우먼: 돌봄의 제국〉이 자리 잡고 있다. 아이사 혹슨은 이주 노동 뮤지션에게 영향을 받아 2019년 필리핀 슈퍼우먼 밴드를 결성하고, 대중음악의 원곡을 차용하면서도 이를 비틀어 식민주의적 상황을 비판한다.
이 작품은 팬데믹 시대 의료서비스 종사자들이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지만, 실제로는 기본적인 처우도 받지 못하는 필리핀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무대 속 여러 의상을 갈아입고 춤을 추는 댄서들의 모습은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무대 밖에서는 도피하고 싶은 그들의 현실을 보여 준다.
이번 비엔날레의 특징적인 프로그램은 유통망과 메아리 프로젝트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미술관 안과 밖을 아우르면서 다양한 경로로 현대미술을 전파하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먼저 유통망 프로젝트는 카페, 서점, 클럽 등 서울시의 다양한 문화 거점에 비엔날레의 다양한 작품들을 설치하고 소개하는 내용이다.
삼성동 코엑스 앞 케이팝스퀘어미디어라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도 작품이 전시된다. 이는 미술관이라는 테두리를 넘어 현대미술이 시민의 일상과 공존하는 방식을 탐색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서울 시내 100여 곳에 달하는 유통망 거점에서는 비엔날레 포스터, 영상, 사운드 트랙, 오브제를 올해 말까지 살펴볼 수 있다.
이 같은 유통망 프로젝트는 비엔날레의 또 다른 공공 프로그램인 메아리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메아리는 온·오프라인 채널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는 비엔날레의 공공 프로그램이다. 메아리 프로그램으로는 온라인 상영회, 미디어 캔버스, 독립 미술 공간과의 협업, 퍼포먼스, 강연, 워크숍, 전시 투어 등이 있으며, 서울시 전역을 네트워크처럼 연결하면서 현대미술을 향유하는 다양한 경로를 제시한다.
나아가 유통망에서는 비엔날레 현장의 목소리와 작가의 인터뷰를 실은 매거진 「노선도」를 무료로 배포한다. 비엔날레라고 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매거진 「노선도」가 비엔날레의 길잡이로 기능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불안과 공포가 만연한 가운데 도피주의라는 개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팬데믹이 시작된 이래 수많은 사람이 고립된 채 자발적/비자발적 도피의 형태를 경험했고, 한편으로는 인종차별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가 도드라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최된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하나하나 탈출한다라는 주제는 대중매체에 나타나는 현실 도피적 경향이 변화를 위한 하나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코로나와 현실의 여러 제약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개인의 욕망을 예술적 상상력으로 연결한 이번 비엔날레의 시도는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며, 타자와 공감하는 통로를 확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