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라이프치히 빛의 축제

 

남북한 사이 대화가 단절된 지 어언 10년. 지난 4월 1일 평양에서는 다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울려 퍼졌다. 긴 겨울을 지나와서 그랬을까, 통일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이제는 너무나 생경할 정도다. 하지만 남북대화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땅에 드디어 평화가 오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 고개를 드는 것도 같다.

 

지난 1990년, 독일도 그랬다. 아무도 쉽사리 통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각자의 자리에서 자유와 평화, 그리고 교류를 이야기했다. 그렇게 작은 목소리가 모여 촛불이 되었고, 촛불은 들불처럼 번져나가 두 독일을 하나로 합쳤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라이프치히 빛의 축제>에서 그 역사를 기억한다.

1989년, 동독 사람들은 왜 촛불을 들었을까

‘라이프치히 빛의 축제’는 독일 통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 평화시위를 기념하는 행사다. 한때 구동독에 속했던 작센(Saxon)주 도시인 라이프치히는 인근 지역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사회주의 아래 있었다. 지금의 우리리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노동과 국가가 최우선인 당대 시스템 안에서 개인의 삶은 대단히 경직되어 있었다. 주도 세력인 당과 지도부에 대한 비판은 반역 행위로 여겨졌고, 시민권리 주장 운동 또는 예술 활동은 국가에 의해 철저히 금지되었으며 이에 따른 구금과 추방 역시 흔했다. 특히 ‘슈타지(Stagi)’라고 불리는 국가보안부 등이 매일 국민의 일상을 촘촘하게 감시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불안 속에 살던 때였다.

 

이런 정황 속에서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St. Nikolai kirche)는 1982년부터 매주 평화기도회를 가졌다. 오후 다섯시가 되면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평화와 자유를 소망하며 기도를 드렸다. 교회는 비교적 정권의 통제를 덜 받는 장소이기도 했던 덕분에, 이들은 기도회를 마치고 함께 정치 문제를 토론하고 교회 주변을 걸으며 작은 묵언 시위를 벌였다. 한때 열 명 남짓했던 기도 모임은 찾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어느덧 천 명 단위에 이르렀고, 이들의 움직임을 견제하려는 정부의 감시와 탄압도 점차 거세어졌다.

 

1989년 10월 9일, 이날 평화기도회 및 월요시위에는 7만여 명 이상이 참여했다. 중국 정부가 민주주의 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천안문 사태의 여파로 이미 드레스덴, 베를린, 플라우엔 등지에서도 동독 정부의 무력 동원에 대한 저항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기도회에 참여한 이들 중 다수는 오늘밤 자신이 안전히 귀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하고 나온 상태였으며, 교회의 방침에 따라 경찰과 군인을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단단히 했다.

 

그날 다 함께 비폭력, 자유, 정치범 석방을 외쳤던 그들 손에는 무기 대신 촛불과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고 적힌 현수막이 들려있었다. 당시 경찰과 군대는 각각 ‘인민 경찰’, ‘인민군’이라고 불렸는데, 그들이 탄압하려는 자신들이 그 인민임을 겨냥한 말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모두의 예상과 달리 정부는 경찰과 군대에 무력 진압 대신 퇴각 명령을 내렸다. 두려움을 이겨낸 연대자들이 외려 두려워진 탓이었을까. 누군가에 의해 녹화된 이 날의 평화로운 시위 풍경은 방송을 통해 전 동독 지역에 전해져 평화를 향한 열망을 더욱 고취시켰다. 이후 10월 16일 시위에는 경찰과 군인까지 포함해 12만 명이 거리를 행진했고, 이틀 후 동독 사회주의 권력의 핵심이었던 에리히 호네커 수상이 물러났다. 이윽고 3주 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리고 이듬해 1990년 10월 3일, 독일의 통일이 공식 발표되면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분단과 대치상태가 평화롭게 막을 내렸다.

해마다 그곳에 다시 모이는 촛불들

‘라이프치히 빛의 축제’는 매년 10월 9일, 역사적인 평화 시위의 현장인 아우구스투스광장(Augustusplatz)에서 당시의 마음을 되새기길 제안한다. 2009년부터 Leipzig Tourism and Marketing GmbH가 주최하는 이 행사는 이미 이루어낸 성과를 기념하는 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평화혁명의 정신과 가치를 다음 세대 및 다른 공동체와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여긴다. 해마다 평화와 관련된 키워드를 선정하는데, 지난 2017년의 주제는 “시작 – 책임 – 개방(Aufbruch – Verantwortung – Offenheit)”이었다.

 

기본적인 프로그램 구성은 이렇다. 먼저 평화시위의 전통 그대로, 축제에 앞서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오후 5시부터 기도회가 있다. 예배가 끝나면 같은 장소에서 초청된 정계 인사 및 전문가가 민주주의를 주제로 별도의 강연을 진행한다. 이후 8시부터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면서 야외무대를 중심으로 토크, 미디어아트 매핑 및 무용과 음악이 어우러진 다채로운 공연이 약 한시간 가량 이어진다.

토크 프로그램의 초청 게스트는 평화 혁명에 걸친 기억을 나누면서 다양한 논의를 진행한다. 저널리스트, 잡지 편집장, 영화감독 등 다양한 직업군의 인물이 선정되는데, 사회주의 체제 하에 있었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들려주면서 과거와 현재의 독일, 유럽 내 정치적 상황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에서 의견을 주고 받는다. 한편 무대 위로는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과 영상이 흐르거나, 그 당시 감정과 분열상황을 재현하는 다원예술 공연, 재즈 연주 등이 선보여진다.

 

5시면 완전히 해가 지는 독일의 가을밤, 광장 곁에 선 고층 빌딩은 이날 창문을 통해 ‘89’라는 숫자를 파사드에 밝힌다.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도 행사의 마지막 순서로 저마다 들고 있던 촛불을 한데 모아 숫자 89의 모양을 함께 완성하면서, 1989년에 평화를 지지하기 위해 집 밖을 나서던 그 용기를 기억하고 친구, 가족, 특히 자신의 어린 자녀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그 마음을 오래 간직하길 염원한다.

집회와 축제 사이 :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라이프치히 평화시위의 촛불로부터 우리 머릿속에 많은 것이 떠오른다.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정권이 교체되는 최근 몇 년 동안,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나와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민 주권을 행사하는 경험을 몸소 실천해보았기 때문이다. 컵을 그을리며 타는 초, 머리 위로 휘날리는 깃발, 오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두터운 옷차림, 활발해진 발언의 장과 다양한 집회 공연까지, 우리는 저마다 선명한 장면과 감정을 기억한다. 지난 4월 16일 4주기를 맞이한 세월호 사태를 기리기 위해 올해에도 많은 사람이 노란 리본 이미지를 공유하며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재차 다짐했다. 이제 촛불과 노란 리본은 의분과 슬픔,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소망의 상징이 되었다.

 

앞서 거론된 사건 중 어느 것도 쉽게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 없다. 때마다 시민들은 변혁을 요구하기에 앞서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내걸어야 하는 두려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좌절감 및 무력감을 이겨내야 했다. 모두 혼자일 때는 힘이 없던 개인이 소리를 모으고 함께 운동하는 법을 배우며 용기와 끈기, 연대와 실천이 무엇인지 보여준 값진 사례들이다. 건강한 시민사회를 구축하는 과정으로서 각 사건에 대한 공동 기억은 그렇기에 더욱 오래 기억되어야 한다.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거꾸로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일, 그 속에서 가졌던 생각들. 시간이 흐를 수록 흐릿해지거나 단편적으로 편집될 위기에 놓인 이 기억의 총체를,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공동체의 장기 기억력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특히 해당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다음 세대에게는 어떻게 종합적인 기억과 교훈을 생생히 전달할 수 있을까? 훗날 역동적인 시대로 기억될 현재를 통과하는 우리이기에 지금 이 고민이 매우 절실해 보인다.

라이프치히 빛의 축제는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질문을 남긴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 축제가 점점 상업적, 관광용 이벤트로 변질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시민들이 해마다 같은 날짜, 같은 장소에 모이는 본질적인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그 당시 광장에서의 연대를 재현하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현장에 있었던 이가 없었던 이에게, 어른이 아이에게 그 날의 기억과 풍경을 들려주고, 각자의 언어로 평화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복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년 전 사람들이 모여 기도했던 그 마음, 개인적 서사와 그 총체가 만들어낸 거대한 흐름 위에 이 축제가 있었기에, 역사는 글자가 아닌 이야기로 전승될 수 있었다.

 

언젠가 우리도 통일을 기념하는 행사를 보게 될까? 그때 우리는 어떻게 역사적 순간을 기억하고 즐겨야 할까.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종교, 직업, 경제 계층, 정치적 성향을 초월한 모든 이가 다 함께 더 많은 평화와 자유를 바랐던 독일의 어떤 시위, 그리고 그 시위를 기억하는 한 축제에서 다시 한번 작은 촛불의 힘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