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닐 스티븐슨의 소설 <스노 크래시>에서 메타버스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가상 세계는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 같았다. 낮에는 피자를 배달하는 주인공이 밤에는 메타버스라는 온라인 세계에서 슈퍼 히어로로 산다는 설정부터가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초월이라는 의미의 메타와 우주라는 뜻의 유니버스를 합성한 메타버스(Metaverse)는 말 그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온라인 세계를 의미한다. 그 맥락은 현재에도 이어지는데, 비대면 세계에서도 활동이 자유로운 메타버스의 특징은 글로벌 빅테크(Big tech, 대형 정보기술 기업) 기업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메타버스의 세계관을 코로나바이러스로 물든 현재의 혁신적인 이상향으로 여기며 다양한 연구 개발에 돌입했다. 덕분에 우리는 집 안에서의 여가부터 업무까지 모든 게 가능한 세상, 메타버스에 발을 내디뎠다.
사적인 유희에서 나아가 공적인 효율성으로
다양한 연구 개발에 돌입한 빅테크 기업들 때문에 메타버스는 먼 미래가 아닌 보통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덕에 과거 사적인 영역에서 주로 사용되던 아바타의 역할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바타는 우리 대신 가상 세계에서 총격전을 하거나,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잔디 위에서 친구와 휴식을 보내는 등 사적인 유희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었다. 메타버스 안에서 즐거움이라는 가치는 충분히 획득할 수 있는 반면, 효율성이라는 측면은 눈에 띄게 부족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메타버스 오피스 플랫폼들의 연이은 등장으로 인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미국의 이엑스피월드테크놀로지(eXp World Technology)의 자회사인 버벨라(VirBELA)는 온라인 협업 플랫폼인 오픈 캠퍼스(Open Campus) 서비스를 시작했다. 실감형 원격 VR 플랫폼인 오픈 캠퍼스는 원격으로 진행되는 교육과 회의, 전시, 인재 채용 등에서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용자의 용도와 취향에 맞게 VR 오피스를 구성할 수 있다. 영상통화도 가능하기 때문에 유용성이 뛰어나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12월, 전남대학교에서 열린 심포지엄 디지털 혁신과 교육의 미래에서 버벨라 플랫폼을 이용해 한·중·일 3개국의 참가자가 원격으로 대화한 적이 있다. 이렇듯 오픈 캠퍼스는 학교와 관공서 또는 종교단체 등 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는 분야가 다양해 국내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Everything from home!
메타버스를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데는 페이스북(Facebook)의 공이 무척 크다. 페이스북은 메타버스의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꽤 오랫동안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역량을 키워왔다. SNS 시스템을 통해 메타버스에서 중요한 인적 인프라를 만들었으며, VR 기기 개발업체인 오큘러스를 인수해 메타버스의 현실화까지 도모했다.
그뿐만 아니라 페이스북의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는 5년 후 페이스북은 SNS가 아닌 메타버스 기업이라고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하며,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하나 던졌다. 바로 Everything from home! 친구를 만나 쇼핑을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회의를 진행하는 것도 집 안에서 가능토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가상 현실의 제약을 없애고 일상을 통째로 기계에 옮겨 담겠다는 그의 의지가 엿보였다.
2019년부터 페이스북은 VR기기를 이용하여 접속하는 가상현실 소셜 네트워크 플랫폼인 페이스북 호라이즌을 비공개로 테스트해왔다. 그리고 지난 8월 18일, 오큘러스 퀘스트(Oculus Quest)2 VR 소프트웨어의 베타 버전인 호라이즌 워크룸(Horizon Workrooms)을 공개했다.
호라이즌 워크룸은 페이스북의 VR 헤드셋과 컴퓨터만 있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가상 일터다. VR에서는 사용자의 모든 행동이 오큘러스 아바타를 통해 보이는데, 마치 게임 속에 들어온 듯 흥미롭다. 오큘러스 헤드셋 카메라가 사용자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때문에 손을 흔들어 인사하거나 무언가를 가리킬 수 있다. 또한 오큘러스 컨트롤러를 이용하여 메모를 남기면 그 내용이 VR 화면으로 빠짐없이 전해지니 일의 능률도 유지된다고. 호라이즌 워크룸 안에서 구글 독스(Google Docs)나 슬랙(Slack) 같은 다양한 문서 도구를 이용할 수 있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큰 장점이다.
호라이즌 워크룸의 공개와 더불어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은 앞으로 우리가 하는 많은 업무를 VR에 담아내려 한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함께 할 수 없을 때도 VR을 통해 실재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메타버스 오피스 시장에서의 그들의 힘찬 발걸음을 기대하게 했다.
메타버스 오피스 시장을 타깃으로 겨눈 것은 페이스북만이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도 메타버스 실현을 위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동시 개발 중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5년부터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헤드셋 홀로렌즈를 개발해왔는데, 최근에는 VR/AR 플랫폼 MS 메시(Mesh)를 공개하며 기업용 메타버스 시장에 성큼 뛰어들었다. MS메시는 홀로렌즈를 이용해 타인과 대화하거나 업무를 공유할 수 있어, 향후 사업의 확장성이 주목받고 있다고. 구글도 AR 기기 구글 글래스와 구글 어스의 VR 체험 서비스 제공 등 메타버스 사업의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다.
국내 메타버스 오피스 시장과 미래는?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SK텔레콤은 메타버스 서비스 이프랜드(ifland)를 출시하며, 국내 기업 최초로 메타버스 공간에서 기자 간담회를 개최했다. 코로나19 시대 속 비대면 트렌드를 선도하겠다는 SK텔레콤의 이프랜드는 기존의 국내 메타버스 플랫폼들에 비해 사용 영역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프랜드보다 이전에 출시된 네이버의 제페토는 3D 아바타를 기반으로 한 가상 세계 플랫폼으로 친구들과의 게임이나 파티, 콘서트 등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에 집중했다. 모바일 게임인 샌드박스의 로블록스 역시 메타버스 공간에서의 패밀리를 구성하여 일상생활을 즐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에 비해 이프랜드는 가상 공간 속 회의 진행 및 모임 주최 기능에 조금 더 특화되어 국내 메타버스 아바타의 능력을 확장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다만 아직 메타버스에서의 일상을 어색해하는 대중도 많기 때문에, 이프랜드의 대중화라는 과제가 남아 있다. 향후 이프랜드는 메타버스 내부의 마켓 시스템을 도입하여 아바타 간 자유 거래가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고, K-pop 팬 미팅 등 MZ세대를 사로잡을 수 있는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제법 순조로워 보이는 국내 메타버스 시장에도 우려되는 지점은 있다. 바로 이용자 보호 관점에서의 규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행위 주체자가 아바타인 비대면 서비스라고 하더라도 결국 개인 간 상호관계를 기반으로 하므로, 모욕이나 비하 등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메타버스에서 아바타의 움직임에 대한 사생활 침해도 우려된다. 타인의 아바타가 꾸려 놓은 사적 공간에 들어가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거나, 상대방의 아바타에 폭력적인 언행을 보이는 등 현실 세계에서의 문제가 메타버스에서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바타의 능력이 점차 확장되어가는 만큼, 메타버스 뒤편에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 제도적이고 윤리적인 대응 방안이 필요하다.
메타버스는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가 아닌 우리의 일상을 이어나가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이용자의 책임과 의무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메타버스가 기회의 땅이라는 점이다. 이용자인 우리가 어떤 아바타를 만들어 어떤 꿈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메타버스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무엇이든 직접 수행해야 했던 일들을 나의 아바타가 가상 세계에서 대신해 주는 효율성과 편리함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를 지운다. 무한하게 성장할 수 있는 메타버스의 가능성이 개인의 가능성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여가 생활부터 업무까지, 모든 것이 가능한 메타버스 아바타의 능력이 앞으로도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