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런던 지하철은 스쳐 가는 곳이 아니다

 

매일, 지하철은 수많은 사람의 발이 된다. 해가 채 뜨지 않은 새벽에 출근하는 직장인부터 부지런히 핸드폰 위에서 엄지손가락을 놀리는 학생들, 무거운 봇짐을 메고 노인석에 앉은 어르신, 전차 천장에 머리가 닿을 듯한 외국인까지. 승객들은 역사와 전차 내에서 표지판을 읽고, 걷고, 계단을 타고, 서고, 앉고, 창밖을 응시하면서 서로 다른 곳을 향한다. 지하철은 출발지와 도착지를 잇는 하나의 교통수단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 복잡다단한 공간으로서 도시인의 구체적인 일상을 구성하는 주요 장소이기도 하다.

 

프랭크 픽(Frank Pick)은 일찍부터 이 사실을 인지해낸 사람이었던 게 틀림없다. 1863년 세계 최초로 지하철도가 건설된 런던에서 그는 1908년부터 런던교통청의 매니징 디렉터로 일했다. 그가 해낸 기획들은 디자인 역사에서도 제법 굵직한 업적으로 남았는데, 그중 하나가 당시 중구난방이던 여러 지하철 노선의 광고물, 교통시스템 디자인 등을 시각적으로 통일성 있게 정한 것이다.

 

또 하나는 여러 예술가와 다양한 협업을 진행하면서 지하철 역사 내 공간을 활용해 대중이 예술을 접할 기회를 늘린 것이다. 물론 그는 디자이너도, 예술가도 아니었다. 다만 승객을 실어 나르는 지하철이 수많은 이들이 시간을 보내는 열린 공간임을 진지하게 고민했고, 디자인과 예술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비전은 현재까지도 런던 지하철, ‘런던 언더그라운드(London Underground)’의 운영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Art On The Underground)>는 특히 그의 정신이 어려있는 유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하에 숨겨진 미술관, <아트 온 더 그라운드>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는 런던 교통청과 런던 교통 박물관 산하의 시각예술 플랫폼이다. 2000년 ‘플랫폼 포 아트 (Platform for Art)’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런던 지하철에 속한 다양한 공간에 선보일 현대미술 작품을 공모하고 전시해왔다. 이들의 미션은 뛰어난 현대미술 작품을 그들의 독특한 ‘관람객’인 승객과 직원, 런던 소재의 다양한 공동체에 소개하고, 기존 공간을 새롭게 상상케 하고 도시를 경험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해 승객의 여정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는 이미 명성 있는 거장부터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한 신진작가까지 다양한 인물과 협업해왔으며, 런던 전역을 가로지르는 지하철도 네트워크는 이제 특수성을 띤 공공영역으로서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실험적으로 확장하는 거대한 장이다.

1933년 해리 벡이 다시 디자인한 노선도

지하철 포스터 디자인이 예술표현으로 확대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앞서 소개했듯 런던 지하철이 일찍부터 디자인 및 예술과 깊이 연을 맺어온 역사가 있다. 예컨대 땅속을 달리는 지하철이 아직 대중에게 낯설고 두렵게 여겨지던 시절, 지하철에 편안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어주고자 디자이너와 예술가가 의뢰를 받아 다양한 스타일의 포스터를 작업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나면서 포스터의 주제는 지하철 선전 혹은 지역 및 행사 광고에서 보다 자유로운 예술 표현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용자 경험의 측면에서 살피면, 1913년에는 서체 디자이너 에드워드 존스턴(Edward Johnston)이 빨간 원에 남색 가로 막대를 가진 ‘라운델(Roundel)’ 로고를 고안하여 이후 이를 활용해 멀리서도 쉽게 역 이름을 읽을 수 있게 사인물을 제작했다. 또 1933년에는 전기회로도에서 영감을 받은 해리 벡(Harry Beck)이 읽기 복잡하던 당시 노선도를 실제 지형과 상관없이 수직, 수평, 45도 사선만으로 새롭게 정리해 깔끔하게 도식화해냈다. 이렇듯 런던 지하철의 발전은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디자인 및 예술과 행보를 같이 했고, 그 역사는 자연스럽게 보다 전문적인 시각예술 플랫폼인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가 탄생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전시 한 눈에 둘러 보기

 

어쩌면 아직 위 설명만으로는 서울 지하철 역사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좋은 글귀 혹은 시화 포스터가 게시된 벽면 정도만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전시는 공간 활용 및 참여자의 공헌 면에서 보다 역동적이고 입체적이다.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는 비교적 일시적인 기획 전시와 함께 영구히 보존되는 상설작을 공모하며, 이들 중에는 노선별 혹은 특정 지역, 특정 테마를 주제로 정기적으로 이어지는 기획 시리즈도 있다. 이들이 제공하는 전시 ‘공간’은 한 뼘 만큼의 지하철 노선도 표지 지면부터 포스터 게시판 및 빌보드(대형광고 구조물), 전철 역사 내 유휴공간 등 매우 다양하다.

1. 데이&나이트 튜브 포켓 맵

 

런던의 지하철은 보통 ‘튜브(Tube)’라고 불린다. ‘튜브 포켓 맵’은 270개의 역으로 구성된 런던 지하철 총 11개의 노선을 한눈에 보여주는 작은 지도로, 일반 낮 시간대와 주말 밤 시간대에 다르게 운행되는 열차 안내를 위해 두 가지 종류로 만들어졌다. 매일 수백만 번의 여정이 이루어지는 런던 지하철에서 튜브 포켓 맵은 아주 광대한 인원에게 배포되는 여행안내서이자 각 개인이 직접 소지할 수 있는 하나의 물건이다.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는 2004년부터 현대 예술가에게 해당 책자의 겉표지를 위한 작품 제작을 의뢰해왔다. 그동안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리암 길릭(Liam Gilick), 야오이 쿠사마(Yaoi Kusama) 등 저명한 작가들이 드로잉과 사진 작업 등으로 참여했다.

The 23rd edition of the pocket Tube map: Tomma Abts

2. 전철 역사 건물 내외 면적을 활용한 평면 전시

 

여러 동네에 흩어진 전철역 중 일부가 각 역사 건물의 특징을 살려 저마다 다른 방식의 전시를 주최한다. 예컨대 2001년부터글로세스터로드(Gloucester Road) 역은 사용하지 않는 열차 플랫폼을 활용해 일 년에 네 번 전시를 연다. 빅토리아 시대의 아치 기둥이 놓인, 70여 미터에 이르는 플랫폼이 바로 그곳인데, 2003년 데이비드 쉬리글리(David Shrigley)의 사진전, 2007년에는 브리안 그리프스(Brian Griffiths)의 커다란 판더 조형물 등이 전시되어 이목을 끌었다.

Gloucester Road st.

한편, 사우스워크(Southwark)역은 22미터에 이르는 장엄한 빌보드를 활용해 삭막한 도시풍경에 재미를 더할 작품을 공모한다. 2010년부터 2년여간 전시된 드리덴 굿윈(Dryden Goodwin)의 작품 <Linear>는 쥬빌리(Jubilee) 노선의 직원들을 그린 거대한 연필 드로잉 60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는 직원들의 근무지에서 선묘로 초상화를 그리는 한편, 직원과 나눈 대화를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과 함께 영상으로 기록하여 그들이 일터에서 보낸 시간을 하나의 시각적인 내러티브로 엮어냈다.

3. 스크리닝 프로그램

 

무채색의 단조로운 지하철 내부에 영상을 영사하면 어떨까? 2012년에 시작된 <카나리 워프 스크린(Canary Warf Screen)>은 동명의 역사에 위치한 거대 프로젝션 스크린을 이용한 스크리닝 프로그램이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세 달가량 매일 지정된 시간대에 다양한 영상 작품을 전시하며 누구나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Film and Video Umbrella, Animate Projects 등 런던에서 활동하는 무빙 이미지 단체가 직접 참여해 시즌별로 주제와 프로그램 일정을 구성했다.

4. 영구 소장 작품 커미션

 

특정 역사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투자 프로그램의 일부는 런던 지하철을 위한 영구 소장 작품 의뢰에 사용한다. 2011년부터 현재까지 총 여덟 가지의 소장 작품이 만들어졌는데, 이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2013년에 마크 월 링거(Mark Wallinger)가 런던 지하철 15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작품 <Labyrinth>가 있다.

 

<Labyrinth>는 270개의 역마다 서로 다른 미로 이미지를 설치한 작품으로, 런던 지하철의 전체 네트워크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프로젝트로서 여겨지고 있다. 세계 각지의 다양한 전통에서 미로는 공통으로 정신적인 여행을 의미하는데, 작가는 이것이 튜브를 타고 여행하는 승객들의 ‘운반되는 상태’와 유사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시작점인 빨간색 X로부터 중심부까지 들어갔다가 거꾸로 되돌아 나오는 과정을 경험을 제공하는 이 미로들은 간결한 그래픽 이미지로 표현되어 주변에 놓인 역사 내 표지판과 통일감을 이룬다.

Bank st.

5. 역사 건물을 매개로 진행되는 지역 연계 워크숍

 

역사 내 공간 일부를 활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여전히 지하철이 이동수단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철도가 닿는 지역사회와 연계해 진행되는 워크숍 활동도 있다. 의뢰를 받은 작업으로는 2017년 매튜 로(Matthew Raw)와 그룹 어셈블(Assemble)이 함께 운영한 워크샵 ‘Clay Station’이 있다.

 

이들은 진행에 앞서 십여 년 동안 버려진 세븐 시스터스(Seven Sisters St.) 역 내부 공간에 가마를 설치했다. 이곳에서 인근 지역 주민과 역사 직원은 작가들로부터 도자기 제작 기법을 배웠고, 현장에서 그들이 만든 창의적인 도자 타일 작품은 세븐시스터스 역사 건물의 외관을 재단장하는 데에 활용되었다.

Clay Station, Seven Sisters St

막 열차가 떠난 승강장의 고요함은 마치 미술관처럼

 

대표적인 대중교통수단인 지하철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어떤 공간이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는 조건은 곧 공고한 제한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 함께 이용하는 공간에서 서로에게 불편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약속은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허용되지 않는 행위가 존재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의 행적은 놀랍다. 지하철 공간 내에 온갖 규정과 제약이 산재해 있을 텐데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예술가에게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를 통해 특정 장소에서 의미 있는 공공미술이 성립하기 위해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이 지원금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다룬 일부 사례들만 살펴보더라도, 각각의 프로젝트가 완료되기까지 런던 지하철 및 런던 교통청 등 기관 관계자들이 예술가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권한을 내어주어야 했을 상황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다. 가령, 작가가 현직 직원 60명의 사무실에서 그들과 일일이 이야기 나누며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고 제안했을 때, 절차 및 일정상 얼마나 많은 동의를 구했을까? 작가가 지하철 역사 내에 도자기를 구울 불가마를 설치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 아이디어에 따른 시간적, 경제적 비용과 안전이 과연 처음부터 모두에게 설득력이 있었을까?

 

물론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라는 독립된 플랫폼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일 수도 있지만, 지하철을 운영하기 위해 매일의 업무를 감당하는 실무자들이 정해져 있는 일과와 행정적 권한을 비집고 들어오는 예술 프로젝트들을 제한하기보다 받아들일 태도를 갖추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결국, 공공장소에서 나타나는 예술 작품은 예술가 개인의 역량뿐만 아니라 작가와 함께 발맞춰줄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그 사회 구성원의 사회적, 문화적 인식을 보여주게 된다.

한편 지하철은 도심을 가로지르며 중심부와 외곽지역을 동시다발적으로 연결하는 공간이다. 지난 2013년,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는 런던 지하철 개시 150주년을 기념한 이벤트로 런던 교통 박물관에서 <포스터 아트 150– 런던 언더그라운드 최고의 디자인(Poster Art 150–London Underground’s Greatest Designs)>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열어 화제가 되었다. 전시는 1908년부터 디자이너와 예술가에게 의뢰해 제작된 포스터 5000여 점 중 150점을 선보였는데, 흥미롭게도 한 세기 동안 런던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또 런던을 살아가는 도시인들이 어떠한 인식 변화를 겪었는지 직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어 호평을 얻었다.

 

그런가 하면 2017년에는 런던 지하철 내에 존재하는 벽화, 조형물, 전시 정보를 모아 ‘아트맵’을 제작했다. 예술가들에게 커미션을 준 역사가 긴 만큼 지하철 노선 곳곳에 20세기 초반부터 최근까지의 조형물들이 어지러이 있는데, 이를 보기 쉽게 정리해서 또 하나의 런던 여행 방법을 제안한 것이다. 두 사례 모두, 지하철이라는 공간이 도시의 모습을 차곡차곡 기억하는 보고(寶庫)로서 잠재성을 지녔다는 것을 인지한 효과적인 결과들이다.

지하철은 수많은 시민의 발이다. 하지만 이를 간단히 ‘지나쳐야 하는 과정’인 이동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이 자체가 내부에 자잘한 층위의 공간들이 연결된 물리적 장소임을 인식한 것이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와 수많은 예술 프로젝트의 초석이 되었다. 무엇보다, 예술이 모두의 일상을 새롭게 조각한다는 믿음이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른다. 이를 바탕으로 지하철을 이용하는 이들이 누구이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 지하철을 통과하고,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에서 움직이는지 등에 대한 관찰이 해당 장소에 어울리는 예술 활동을 활발하게 촉진시킨다. 대중교통이 공공 영역으로서 해당 사회의 기술 수준과 공공적 가치관이 드러나는 공간이라면, 지하철 시스템이 위치한 서울 및 다른 광역시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무엇일까?

 

2012년 미국의 한 매체가 서울 지하철을 편리한 시스템 측면에서 세계 1위로 선정했다고 하는데, 과연 문화적인 수준에서도 우리는 앞서고 있을까. 지하철 역사 내 지하 보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하는 ‘임대문의’라고 적힌 유휴공간, 모바일 게임과 연예인 사진으로 현란한 광고판, 그리고 이제껏 우리가 이용할 생각조차 않았던 다른 모든 공간을 더 재미있게 활용할 방안이 있지 않을까. 아무‘멋진’ 예술 작품을 가져와 공간을 장식하는 시도 대신, 전철역이 위치한 지역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거나 지하철 네트워크를 역동적으로 재활용하는, 장소의 맥락을 이해한 작업이 더 많이 등장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공 영역에서 뛰노는 예술 작업들이 우리의 삶을 다르게 가꾸어간다는 믿음을 모두가 함께 가질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