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3 Dots

▪ 로에베 재단 공예상(LOEWE Foundation Craft Prize)은 2016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너선 앤더슨이 로에베 합류 3년 만에 런칭한 국제 공예상으로, 올해로 10회를 맞았다. “공예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릴 정도로 위상이 높은 이 상은 지난 9월, 서울에서 열린 디자인 마이애미 전시의 주요 파트너이기도 했다.

▪ 한국은 2022년 정다혜 작가가 말총 공예로 첫 수상을 기록한 이후, 꾸준히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전통적인 창작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으며 “전통에 대한 존경심과 현대 사회 고민을 창작 세계에 담아낸다”고 평가받고 있다.

▪ 최근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들이 역대 최악의 위기를 겪는 와중에도 로에베는 “올해 가장 핫한 브랜드”로 꼽힐 정도로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가죽 공방 출신” 브랜드 정체성에서 공예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10년간 진정성 있게 투자해 온 조너선 앤더슨의 전략이 있었다.

 


 

지난 9월 1일부터 14일까지, DDP 이간수문전시장에서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세계 최대 디자인 박람회 중 하나인 디자인 마이애미(Design Miami)가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전시를 개최한 것. 170여 점의 작품들이 공개된 이번 전시는 한국 창작자들의 독창성,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글로벌 시각에서 본 한국의 창의성,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디자이너들, 세계적인 트렌드로 발돋움 중인 K-디자인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토크 세션들도 열렸다.

 

각자의 멋과 아름다움으로 자리를 빛낸 작품들. 그 옆에 적힌 크레딧에 유독 자주 보이는 문장이 있었다. 로에베 재단 공예상 수상작, 로에베 재단 공예상 파이널리스트. 알고 보니 로에베는 이번 전시의 주요 파트너였고, 공예상의 역할과 목적을 주제로 한 대담회도 진행했다. 그런 행보를 보며 궁금해졌다. 왜 로에베는 공예에 적극적일까? 로에베는 공예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 투자해 온 걸까?

젊고 당돌한 수집가 엔리케 로에베

로에베는 1846년, 독일의 엔리케 로에베 로스베르크(Enrique Loewe Roessberg)가 스페인 마드리드에 정착하며 시작됐다. 엔리케는 가죽 전문가이자 완벽함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였고, 마드리드의 가죽 공방은 그런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정도로 뛰어난 제품들을 만들고 있었다. 엔리케는 자신이 독일에서 배운 정교함과 스페인 장인들의 감성을 결합하면 세상에서 가장 정교하게 가죽을 다루는 존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872년 엔리케가 공방에 합류하고 얼마 되지 않아 로에베는 마드리드에서 가장 트렌디한 가죽 제품을 만드는 하우스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로도 로에베는 꾸준하게 성장해 왔다. 1905년에는 스페인 왕실 공식 공급업체로 임명되고, 1940년대에는 커튼을 활용해 제품을 돋보이게 하는 연출을 가미한 매장을 선보였다. 60년대 들어서는 영국 런던에 진출하고, 4개의 “L”을 조합한 모노그램을 선보이며 글로벌 럭셔리 시장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70년대에는 향수와 패션 컬렉션 등을 출시하고, 유럽과 아시아 주요 국가들에 매장을 내며 적극적으로 외연을 확장했다. 그리고 1996년, 창립 150주년에 LVMH 그룹에 인수되며 로에베는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로에베는 이렇게 성장하는 와중에도 장인정신이라는 핵심 철학에 지속적으로 투자했다. 1988년, 창업자 4대손인 엔리케 로에베 린치(Enrique Loewe Y.Lynch)는 무용, 문학, 사진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적 유산을 보존하고 창작가들을 지원하는 로에베 재단을 설립했다. 2002년에는 스페인 최고 영예인 순수 미술 공로상 금메달(Medalla de Oro al Mérito en las Bellas Artes)을 수상하는 등 장인정신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기도 했다.

로에베 재단 설립자 엔리케 로에베 린치와 그의 딸, 실라 로에베 © LOEWE

다시 공예로 돌아선, 조너선의 로에베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로에베는 “길을 잃었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오랜 역사를 쌓아왔지만 무언가 신선하고 남다르다는 인상을 주지 못한 결과였다. 로에베는 멀버리(Mulberry)를 부활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스튜어트 베버스(Stuart Vevers)를 영입하는 등 돌파구를 찾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특히 스튜어트가 맡은 2012년 봄 시즌 컬렉션은 “나이가 드는 건 지루한 일이다(it’s a drag to get older)” 같은 슬로건 등이 시대정신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LVMH 그룹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파격적인 결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조너선 앤더슨(Jonathan Anderson)이라는 점잖지만 과감한 디자이너에게서 찾았다.

 

조너선은 2008년 자기 이름을 내건 브랜드, JW 앤더슨으로 혜성처럼 업계에 나타났다. 젠더 구별을 벗어난 디자인으로 여성스러운 스타일, 남성적인 복식 같은 고정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 업계 관계자들은 “아주 자극적이고 흥미롭다”며 조너선에게 주목했고, LVMH도 그 모습을 눈여겨봤다. 그리고 2013년, 29살의 조너선 앤더슨은 100년이 훌쩍 넘는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를 책임지게 된다.

 

조너선의 남다른 디자인 감각은 어릴 때 느낀 소외감, 외로움에서 출발했다. 북아일랜드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난독증을 겪으며 자란 내성적인 아이였다. 또래들과 다르게 밝은 색감의 트위드 재킷, 프릴(주름장식)이 달린 바지를 좋아하는 특이한 아이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형형색색의 옷들, 화려한 런웨이를 보여준 주간 선데이 타임스(Sunday Times) 패션쇼 부록은 “디자이너”라는 꿈을 불어넣어 주었다.

 

직물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의 할아버지도 큰 영향을 줬다. 꼼꼼하게 재료를 점검하고, 정성 들여 군용 위장 천막을 인쇄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조너선은 “기능과 장식의 양면을 조화시켜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든다”는 공예의 가치를 깊이 깨달았다. 패션업계에서 일하게 된 후에도 그는 20세기 영국 도자기 등 다양한 공예품을 수집해 왔다. 그런 조너선에게 로에베는 전통적인 제작 방식을 고수하고, 과거 의류와 오브제 등을 충실하게 보관해 오며, 공예의 가치를 펼칠 준비를 마친 브랜드였다. 그것이 바로 브랜드 합류하는 동시에 공예상을 기획하고 3년 만인 2016년에 정식 런칭한 이유이기도 하다.

 

“제가 로에베에서 6주 정도 일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게 있습니다. 이 브랜드가 그 어느 곳보다도 가죽을 중심으로 한 장인 정신, 제작 기술의 전통 위에 세워졌다는 거였어요. 스페인 공방을 방문했을 때도 그곳만의 감각적인, 영혼이 깃든 무언가에 매료됐습니다. 진정한 럭셔리의 본질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175년 역사에 녹아든 순수한 장인정신의 정수 말이죠.”

_ 조너선 앤더슨, 영국 공예청 갤러리 인터뷰로에베는 어떻게 공예계의 가장 거목이 되었는가

세상 힙한 요즘의 정성, 로에베 재단 공예상

로에베 재단 공예상은 런칭 직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2017 제1회 공예상부터 3,900여 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한 것. 지원 조건과 시상 기준도 남다르다. 만 18세 이상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독창적인 예술 개념에 혁신적으로 공예를 접목한 작품”이라면 무엇이든 심사 대상이 된다. 이런 개방성은 전 세계 공예 창작가들의 열정에 불을 지폈고, 단 10년 만에 로에베 재단 공예상이 “공예계의 오스카상”이라고 불리게 된 바탕이 되었다. 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신하고 실험적인 작품들도 늘어났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한국 작가들의 약진이다. 2022년 전통 말총공예 작품을 선보인 정다혜 작가를 시작으로, 한국 창작자들은 매년 최종 30인 명단에 꾸준히 이름을 올려왔다. 한지부터 옻칠, 금속 상감, 도자기까지. 다양한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으며, 한국은 “공예 강국”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되었다. 로에베 대표 실라 로에베(Sheila Loewe)는 한국 공예에 대해 이렇게 평하기도 했다.

 

“한국인들의 미는 전통 기법에 대한 존경심처럼 느껴지며, 선조들에 대한 오랜 역사적 유산이자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동시에 현대 사회에 대한 고민과 고뇌에 반응할 줄 알고, 그것을 본인들의 창작 세계에 담고 있는 것이 인상 깊습니다.”
실라 로에베 , 월간한옥 ‘공예란 무엇일까’ 대담에서, 2020

 

올해에도 3명의 한국 작가가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이정인 작가는 100장이 넘는 한지를 켜켜이 쌓아 만든 의자 <A Soft Landscape>를 선보였다. 구름처럼 가벼워 보이지만 구조적으로는 단단한 이 작품은 소비와 폐기물에 대한 성찰을 담아 낭비되는 자재가 전혀 없도록 만들어졌다. 류연희 작가는 구리를 활용해 전통 바구니를 재해석한 <BAGUNI>를, 신선이 작가는 한국 고유의 금속 상감 기법을 주방용품에 꽃피운 <Embracing Lotus>를 선보였다.

 

이처럼 공예의 가치를 조명해 온 로에베 재단 공예상은 지금도 “사람들이 공예 자체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지난 9월, 디자인 마이애미에서 열린 <로에베 재단 공예상의 역할과 목적> 대담에서 전문가들은 “대중이 공예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게 됐다”, “국내 젊은 작가들의 활동이 왕성해지고 새로운 소통의 계기도 찾았다”는 평을 남겼다. 정다혜 작가도 “전통이라고 불리던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발굴해 내는 창구가 됐단 점이 의미가 깊다”며 소감을 밝혔다.

이런 호평이 나오는 이유는 로에베 재단 공예상의 프로그램 구성도 남다르기 때문이다. 매년 10월 말까지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출품을 받으면 다양한 분야(건축, 디자인, 저널리즘, 큐레이션 등)의 심사위원들과 패널들이 몇 달간의 심사숙고 끝에 파이널리스트 30명을 선정한다. 이렇게 선정된 작가들의 작품들은 전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는 박물관들을 여행한다. 런던 디자인 박물관, 파리 팔레 드 도쿄, 서울공예박물관까지. 로에베 재단 공예상 파이널리스트들은 현대 공예의 트렌드와 가치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인정받아 관객들을 만난다. 온라인 전시회도 진행돼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은 물론 제작 과정과 그에 담긴 서사 역시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로에베 재단은 전통 공예 기술 보존과 홍보에도 적극적이다. 2024년 상하이, 2025년 3월~5월 도쿄 하라주쿠에서 선보인 “크래프티드 월드(Crafted World)” 전시는 조너선 앤더슨이 직접 엄선한 공예품들, 브랜드 컬렉션, 그리고 영감을 준 장인들의 작품들을 두루 선보였다. 교토에서 400년 이상 예식용 가마 주전자를 만들어 온 가문을 지원한 기록 영상도 전시됐다. 로에베가 브랜드 차원에서 공예의 가치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지 잘 보여준 이벤트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로에베의 활동들은 모두가 “더 빨리”를 말하는 지금, 사람들이 잊고 있던 공예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일깨우고 있다.

중국 상하이 크래프티드 월드(Crafted World) © LOEWE, NANT
도쿄 하라주쿠 크래프티드 월드(Crafted World) © LOEWE, NANT

2024년,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 업계는 1~3%대 저성장을 기록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구찌를 보유한 케어링(Kering) 그룹은 2024년 2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25% 급감했다. 잘 나간다는 평을 받던 버버리도 매출이 20% 넘게 하락했다. 올해 업계도 “15년 만에 최악의 위기”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상황이 나쁘다. 브랜드들은 가격 인상과 한정판 출시,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영입 등 여러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로에베는 그 와중에도 “올해 가장 핫한 브랜드”로 꼽히는 등 독보적인 성장세를 유지 중이다.

 

로에베의 성장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있지만, 그 중심에 조너선 앤더슨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는 합류 초반부터 장인들에게 ‘여러분이 진심으로 만들고 싶은 가방을 디자인해 달라’고 부탁했고, 가죽 공예와 상품성을 모두 잡은 퍼즐 백(Puzzle Bag) 등 히트작들을 만들어냈다. 이후에도 로에베는 46개의 가죽 조각을 조립해 제작하는 해먹 백(Hammock Bag), 가죽 본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새들 백(Saddle Bag) 등 실용적이면서도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제품을 꾸준히 선보이며 사랑받고 있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공예의 가치를 깊이 이해하고 브랜드 이름을 내건 공모전까지 런칭한 조너선의 세심함과 과감함이 있었다.

 

AI가 모든 것을 대체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진다. 프롬프트 입력만으로 글부터 그림, 음악, 영상까지 못 만드는 게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3D 프린터 기술 발전까지 합쳐진다면 그 파급력은 지금보다도 훨씬 클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온다면 브랜드들은 “명품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로에베 공예상은 그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모범 답안 중 하나다. 공예는 자신의 삶을 기꺼이 투자해 재료와 문화를 공부하고 그 정성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정진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사용자의 안녕과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마음이 담긴 물건. 그것이야말로 시간과 기술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가치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가 잊히지 않게 보존하고 알리는 브랜드라야만 먼 미래에도 명품으로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