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질 수 없는 디자인
지금까지 3D 디자인의 핵심은 실물화할 수 있는 제품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비트와 화소로 표현된 화면 속 디자인은 그 자체로는 쓸모가 없는, 그저 실물화되기 위해 필요한 중간 단계에 불과했다. 물성이 없으면 제품이란 범주 안에 속하기 어렵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작금의 시대에서 디자인의 핵심은 재현과 실물 가능성이 아닌 탈실물화로 이전하는 듯 보인다. 현실 같은 가상이라는 슬로건 아래 증강현실, NFT, 블록체인 그리고 메타버스(Metaverse)가 현실 세계를 가상의 세계로 확장시키고 있다.
컴퓨터 언어로 표현되는 디지털 세계가 또 하나의 현실로 인정되는 기술 혁신 시대에서 제품의 실물화만 고집하는 것은 트렌드뿐 아니라 기술 발전의 시류를 거스르는 듯 보인다. 디지털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과 교류는 전원을 Off 하는 즉시 사라질 가상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이제 고리타분한 것이 되었다. 지금은 현실과 가상을 구별하기보다 자신의 경험과 교류에 집중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내는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탈실물화를 핵심으로 내건 메타버스의 성장은 이러한 인식의 변화와 함께 팬데믹이라는 상황적 조건까지 맞물리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친구나 가족 모임, 졸업식, 입학식 심지어는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까지 업무의 경중을 따지지 않는 비대면으로 전환되는 세상 속에서 메타버스는 마치 한 줄기 희망처럼 보인다. 비대면으로도 사회/경제/문화적 교류를 지속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아바타를 이용해 비대면으로 세계와 접촉할 수 있다는 감각은 메타버스 열풍을 만들었다. 심지어 페이스북은 회사명을 ‘메타(Meta)’로 바꾸었으며, 메타버스 게임 플랫폼인 ‘로블록스(ROBLOX)’는 2021년 3월 뉴욕 증시 상장 하루 만에 시가총액 42조 원을 돌파했다. 그러나 혁신적인 기술이라는 찬사와 함께 이름만 새롭게 만든 뜬구름 잡는 개념이란 비판적 인식도 공존한다.
영미권의 저명한 게임 전문지 PC Gamer에 PC게임 전문가 Wes Fenlon이 기고한 메타버스는 헛소리다(The mataverse is buxxshxx)라는 기사는 메타버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잘 드러낸다. Fenlon은 메타버스는 이미 있었으며 그것을 우리는 인터넷이라고 부른다(The metaverse is buxxshxx because it already exists, and it’s called the internet)고 말한다. 해당 기사에서는 메타버스는 전혀 새롭지 않으며, 이미 많은 게임에서 활용한 아바타를 통한 활동과 인터넷을 이름만 바꿔 부르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새로운 기술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메타버스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공존함에도 메타버스가 탈실물화를 통해 이미 수익을 창출하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락다운된 토론토에서 미디어 아티스트 크리스타 킴(Krista Kim)이 완공한 마크 하우스는 메타버스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집이지만 NFT 아트 플랫폼인 슈페레어에서 288ETH(약 5억 6,000만 원)에 판매되었다. 집마저 탈실물화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처럼 실물화되지 않은 제품이 수익을 보장할 수 있으며, 제품을 실제로 생산하지 않고도 판매가 가능하다는 생각의 전환은 기업들이 메타버스 세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또한 디지털 세계에서의 소유권을 판매할 수 있다는 NFT 기술 또한 메타버스의 성장을 가속화시켰다. 현실과는 다르게 디지털 세계에서 원본과 복사본의 위계는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무엇이 원본인지 복사본인지 구별할 수 없었고, 그럴 필요 또한 없었다. 누구나 복제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의 지적대로 복제가 가능하다면 원본의 아우라는 자연히 상실된다. 그러나 NFT는 디지털 세계 속에서 원본과 복사본의 구분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NFT는 디지털 세상에서 작품에 원본의 지위를 부여해 원본의 아우라를 회복하게 만든다.
이러한 NFT의 기술력에 기업들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하다. 원본의 위계를 되찾는 것이 곧 사람들의 소유욕을 자극하는 현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디지털 세상 속에서 희소성과 유일성을 보장하는 NFT의 기술은 패션 브랜드들의 새로운 전략이 되고 있다.
GUCCI X Metaverse
구찌는 2020년 8월, 공간 가상 체험 이벤트 Gucci Garden Virtual Tour를 선보였다. 실제 피렌체에 위치한 구찌의 전시 공간을 VR로 옮겨 온 Gucci Garden Virtual Tour는 층별로 부티크, 서점, 컬렉션룸 등이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공간을 이동할 때마다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와 실제 매장에서 발생하는 소음, 외부의 풍경 소리 그리고 가상 현실 속 피렌체 광장과 오브제는 마치 실제 전시 공간을 거닐고 있는 듯한 효과를 자아낸다.
팬데믹으로 입출국이 자유롭지 않은 해외 고객을 위해 VR 전시 공간을 기획한 구찌는 가상 공간에서 제품의 구매가 가능하도록 묘수를 냈다. 심지어 직접 피렌체의 구찌 가든 매장에 가야만 구매할 수 있던 익스클루시브 제품까지도 가상 투어를 통해 살핀 후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구찌의 지난 컬렉션을 볼 수 있는 컬렉션룸 또한 돋보였다. 팬데믹 시대, 바이러스로부터 고객들을 보호하며 오프라인 매장을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으로 VR 전시를 택한 것이다. 안전과 방역에 충실하면서도, 전시 공간의 고유성을 그대로 드러낸 VR 전시는 구찌가 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던 듯 보인다.
구찌는 실제 스토어의 공간을 VR을 통해 보여주는 거울 세계 메타버스 GUCCI GARDEN Virtual Tour기획 이외에도 메타버스 플랫폼 자체에 집중하는 중이다. 네이버의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Zepeto)와 협업해 다양한 가상 제품들을 생산했으며, 2021년 S/S 컬렉션뿐 아니라 MZ세대를 겨냥한 도라에몽X구찌 컬렉션 등 60가지 넘는 제품을 선보이며 40만 건 이상 판매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러한 제품들은 제페토의 아바타를 통해 착용할 수 있다. 또한 구찌 빌라라는 월드맵을 추가해 피렌체를 연상시키는 공원 등 가상 공간을 구현하기도 했다. 구찌 가든 매장과 유사한 디지털 가상 공간인 구찌 가상빌라에서는 아바타가 실제 매장에 방문해 시착하는 것처럼 제품을 착용해 볼 수 있다.
제페토의 형식을 빌린 구찌는 RPG 게임과 같은 이벤트도 기획했다. 구찌 제품을 착용한 사진을 찍거나, 구찌 빌라에서 사진 찍기 같은 이벤트를 통해 구찌의 아이템을 획득할 수도 있다. 이렇듯 제페토 내에서의 다양한 경험은 다시 SNS를 통해 재생산되었고 출시된 지 10일 만에 40만 건 이상의 포스트가 쏟아졌다.
구찌는 제페토뿐 아니라 로블록스와도 협업해 다양한 제품을 출시했다. 로블록스에서 한정판으로 출시된 가방 Gucci Dionysus Bag with bee는 35만 로벅스(로블록스 화폐)로 4,115달러에 달한다. 이 가격은 구찌의 실물 디오니소스 가방보다 약 700달러 더 싸다. 놀랍게도 실물 제품보다 디지털 제품의 수요가 예측을 뛰어넘는 고가에 판매된 것이다. 디지털 속에서만 존재하는 가방이 실제 가방보다 비싸게 팔릴 수 있다는 구찌X로블록스의 사례는 기업들의 판매 전략이 메타버스 플랫폼으로까지 확장된 이유를 보여준다.
BURBERRY X HARRODS & NFT
버버리 또한 메타버스를 통한 마케팅을 진행 중이다. 버버리는 올림피아 백 출시를 기념해 영국의 Harrods 백화점과 협업해 가상 플래그쉽 스토어를 런칭했고, VR 방식을 통해 구현했다. 제품 홍보를 위해 가상 공간의 스크린을 통해 다시 버버리의 캠페인 영상을 재생하는 액자식 구성 방식을 취했다.
또한 버버리는 다양한 게임 회사와의 콜라보도 진행하고 있다. 버버리는 2021년 8월 미국의 블록체인 게임 플랫폼 미시컬게임즈(Mythical Games)와 협업해 버버리 액세서리 NFT를 발행하는가 하면, 블록체인 기반의 게임 블랭코스 블록 파티와의 협업을 통해 NFT 캐릭터인 샤키 B(Sharkey B)를 런칭했다. 블랭코스 블록 파티는 NFT를 통해 자신의 캐릭터를 버버리로 스타일링할 수 있도록 했다. 750개 한정으로 출시된 샤키 B는 299달러의 NFT를 통해 소유할 수 있으며, 버버리의 시그니처 패턴인 모노그램 패턴으로 장식되어 있다. 캐릭터뿐 아니라 버버리의 제트백, 풀 슈즈, 암밴드 등 다양한 스타일링 아이템이 제공된다. 299달러에 한정 판매된 샤키 B는 출시 후 30초 만에 매진되었으며, 리셀 가격이 1,100달러까지 치솟았다. 이는 디지털 세계에서의 소유가 무용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하이엔드 브랜드의 핵심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유욕은 디지털 세계에 접목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원본과 복제의 위계가 설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복제품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또한 하이엔드 브랜드 제품은 단순 제품을 넘어 브랜드의 이미지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대량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세계로의 진입 자체가 브랜드 이미지 실추와 곧장 연결될 수 있단 위험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NFT는 이러한 위험을 상쇄시키고 하이엔드 브랜드에게 디지털 세계로의 통로를 열어주었다. 이름 자체에서 대체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NFT는 디지털 세계 속에서 고객들이 하이엔드 브랜드를 소유할 수 있게 만들었다. 디지털 세계에 결여되어 있던 희소성과 유일성을 부여하는 수단인 NFT를 통해 하이엔드 브랜드 제품을 선보이는 것은 제법 성공적인 전략인 듯 보인다.
VALENTINO INSIGHTS 2
스타트업 회사 Virtual이 설계한 VALENTINO INSIGHTS 2에는 구찌, 버버리와 같이 가상 플래그쉽 스토어가 존재한다. 그러나 구찌와 버버리의 가상 플래그쉽 스토어가 브랜드 제품 홍보와 브랜드 컬렉션을 선보이는 데 주력한 반면, 발렌티노는 브랜드 홍보뿐 아니라 NFT 자체에 집중했다. 전시룸과 테라스, 그리고 히든 룸으로 구성된 가상 공간 자체가 흥미로우며, 첫 번째 공간인 NFT 작품전용관은 가히 이번 기획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NFT작품 전용관에는 NFT 아트가 걸려있다. 여기 걸린 작품은 시카고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Chicago), 밴쿠버아트갤러리(Vancouver Art Gallery), 퀸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Künstlerhaus Bethanien) 등에서 전시를 진행한 미국 출신 작가 사라 루디(Sara Ludy)가 발렌티노의 로만 팔라초 컬렉션을 재해석한 아트들이다. 해당 작품은 관람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이더리움 블록체인 플랫폼인 Foundation을 통해 가상 공간의 관람객이 경매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실제로 사라 루디가 발렌티노를 위해 작업한 Astral Garden 작품은 파운데이션에서 5.4이더(당시 가격으로 18,000달러)에 판매되었다. 결과적으로 발렌티노는 단순히 메타버스 플랫폼을 통해 브랜드 마케팅을 진행한 것이 아니라 NFT를 통한 작품 구매를 유도하면서 NFT 아트에 대한 실험을 진행한 셈이다.
발렌티노의 이번 기획은 NFT 아트라는 실험적 성과를 보여주는 동시에 메타버스의 사이-공간적인 성격 또한 드러낸다. 가상 플래그십 스토어에 걸린 작품들은 융합 소재를 통해 실재와 가상 공간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으며, 매개될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또한 동시에 새로운 공간 이미지를 창조한다. 지속해서 비물질성과 의식에 관해 탐구해 온 사라 루디를 이번 가상 공간의 작가로 초청한 점에서도 발렌티노의 의도가 엿보인다. 비물질은 과연 실재가 아닐까? 우리의 의식이 경험한 것들이 비물질적이라고 해서 비-실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발렌티노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VALENTINO INSITGHTS 2는 어떻게 브랜드가 NFT를 통해 디지털 세계 속으로 확장될 수 있으며, 가상공간 속에서 전시를 가능하게 만드는지 그 잠재력을 보여준다. NFT는 작가의 작품과 브랜드 제품을 디지털 속에서 대체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으며, 메타버스는 말 그대로 우주를 넘어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
현실의 확장으로서 메타버스
메타버스를 활용하는 브랜드에는 구찌, 버버리, 발렌티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돌체앤가바나(DOLCE & GABBANA)는 NFT 익스클루시브 컬렉션을 만들어 경매에 올렸으며, 랄프 로렌(Ralph Lauren)은 로블록스에서 매장을 오픈한 바 있다. 자라(Zara)도 아더에러(ADER ERROR)와 협업한AZ 컬렉션을 런칭해 제페토에 입점했고, 발렌시아가(Balenciaga) 또한 메타버스 사업부를 출범시켰다. 나이키는 NFT 기반의 의류 기업인 아티팩스(RTFKT)를 인수했으며, 아디다스는 NFT 컬렉션을 출시했다.
이처럼 메타버스 시장에 진입하지 않은 브랜드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브랜드가 메타버스 플랫폼을 인수하거나 활용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메타버스 열풍의 거품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그들조차 NFT 시장의 수익성만큼은 쉽게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수익을 창출하기에 NFT와 메타버스가 무조건 유용한 전략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NFT는 디지털 세계에서 원본값을 부여해 디지털 소유권이라는 전략을 창출했지만, 이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소유욕을 자극한 하이엔드의 고전적인 마케팅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다. 메타버스 속에서 현실에 존재하는 브랜드의 이미지가 지속해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상 현실에서조차 빈부격차를 가속화한다는 비판이 제시되고 있다.
또한 메타버스에서 판매되는 브랜드 제품들이 지나치게 브랜드의 이미지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도 메타버스를 통한 마케팅의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만약 현실 속에서 브랜드의 이미지가 실추된다면 그것은 곧 메타버스 내 브랜드의 이미지 하락과 직결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본다면 메타버스가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는 아직까진 섣부른 판단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브랜드 메타버스가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이미지’에만 의존하는 전략이 아닌 실질적인 기능을 담보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실제로 앞서 살핀 브랜드의 가상전시에서 실제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메타버스를 사용한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탈실물화와 실물화의 연결은 불가피함을 알 수 있다.
아시아 디자인 프라이즈 2022에서 수상한 ROUNZ는 가상으로 안경을 피팅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해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비스를 결합하는 데 성공했다. 안경뿐 아니라 옷까지 가상으로 피팅할 수 있게 만든 FXMirror의 기술은 2015년부터 꾸준히 발전해 오고 있다. 실물화된 제품에만 집중하는 것이 시대의 기술과 트렌드를 100%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가상 세계에만 집중하는 것 역시 현실의 실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메타버스의 시대가 전혀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으로 여겨지기보다는, 확장된 현실로서 실질적인 기능을 담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여는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