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의 삶은 수많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눈을 뜬 순간부터 다시 잠드는 사이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여러 공간을 거쳐가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도시마다 다른 문화와 삶이 펼쳐지는 것은 그 안의 공간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공간은 도시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자, 인간의 삶과 원초적으로 직결된다. 우리의 도시가 현시점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공간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
프랑스 파리에서 진행된 리인벤터 프로젝트(Réinventer Paris)로 그 답을 대신해본다. 2014년에 첫발을 뗀 리인벤터 프로젝트, 즉 파리 재창조 프로젝트는 파리 최초의 여성 시장 안느 이달고(Anne Hidalgo)와 파리시 도시계획 책임자 장-루이 미씨카(Jean-Louis Missika)가 주도한 도시 개발 프로젝트이자 민간공모사업이다. 도로 상부, 소규모 공지 등 파리의 크고 작은 수십 개의 부지를 디벨로퍼에게 매각하거나 공공이 직접 개발에 개입하는 구시대적 방식을 버리고, 개발 주도권을 민간과 나눠 도시를 혁신적으로 재창조한 성공적 사례로 꼽힌다. 파리에 가장 필요한 것, 현실적인 재무 전략, 커뮤니티 참여 패키지, 혁신∙효과적인 건축과 운영 방식을 제시한 팀에게 과감히 개발권을 넘겨 얻은 성과다.
리인벤터 프로젝트는 알려지지 않았던 도시 공간에 새로운 생명과 스포트라이트를 부여하며 지역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연장 선상으로 2017년 5월에 리인벤터 프로젝트 II 사업이 다시금 이어졌다. 지하철, 지하터널, 지하주차장 등 34개의 비효율적 공간을 사업 대상지로 선정한 리인벤터 프로젝트 II에는 217개의 공모작이 모였다. 이후 파리시를 포함한 EFIDIS, RATP, Renault et SNCF 등 여러 공공기관이 공동 심사한 끝에 20개의 최종 당선작이 선정되었다. 용수 관리지를 개방해 휴식공간과 주말농장을 더하거나, 센 강변의 지하도로를 스포츠∙친환경적 모빌리티 서비스 업체의 정거장으로 탈바꿈하는 등 시민의 접근성을 대폭 높인 작품들이다. 현재 진행형인 수상작들은 파리에 새로운 실험적 장소성을 부여하며, 파리를 혁신적인 시민 도시로 바꾸어가고 있다.
여의도의 동쪽에 위치한 한강의 노들섬 역시 리인벤터 프로젝트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동승한 곳이다. 공간∙시설 조성부터 운영∙관리까지 민간 대상으로 공모하되, 기존의 물리적인 시설 위주의 현상설계 방식을 버렸다. 우선순위는 공간을 채울 콘텐츠와 운영 프로그램이었다. 이에 적합한 시설을 설계해 운영자가 추구하는 프로그램에 최적화된 공간을 기획한 혁신적인 프로젝트다. 음악뿐 아니라 문화예술, 생태∙환경, 친환경, 상업, 뉴미디어, 개발모델 등 다양한 분야를 담는 노들섬이 되고자 세운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노들섬의 기본원칙
- 물리적 시설은 쓰임을 우선 고려한다.
- 최적의 규모로 제안하되, 대규모 시설을 지양한다.
- 한강과 노들섬의 역사성을 존중한다.
- 노들섬의 생태 가치를 증진한다.
- 노들섬이 가진 경관적 가치를 고려한다.
- 주변 지역의 맥락을 고려한다.
- 대중교통 및 보행 등 친환경 교통체계를 기반으로 한 계획을 수립한다.
개장과 동시에 활력을 더해가는 노들섬은 사실 과거에도 시민이 즐겨 찾는 장소였다. 생태 보호적 측면으로만 접근해 개발하기엔 지금껏 노들섬에 쌓여온 역사와 스토리뿐 아니라 경관, 입지적 요건 등만 따져보아도 잠재력이 분명했다. 우리의 도시에 필요한 노들섬은 시대의 흔적과 퇴적을 담아내면서도, 현재의 충분한 완성도로 미래의 변화에 유연하게 작동하는 공간이었다. 이를 위해 많은 공모작이 랜드마크적 요소보다는 섬의 안을 채우는 작은 단위를 다양하게 결합한 프로그램으로 공간을 구성했다. 과거의 노들섬이 그간 기억되어온 과정처럼, 새로운 노들섬도 과정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 했다. 시설, 자연, 사람의 활동이 새로운 시간에 덧씌워지는 서사적 풍경을 제안한 출품작이 적지 않아, 도시의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고민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러 후보작 중 Studio MMK+의 <재구성된 땅, 노들마을(Reconfigured Ground Nodeul Maeul)>이 도시와 강, 자연을 다루는 명확한 태도와 실현 가능성을 높이 평가받아 당선되었다. 특히 노들섬의 중앙도로가 만드는 고저 차이를 경계 삼아 단순한 볼륨의 상부와 수평적 확장의 하부를 대비시킨 구조의 연장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Studio MMK+가 제시한 노들섬의 상부는 숲을 조망하며 다양한 행사를 담아내는 문화의 광장으로, 하부는 공연장과 창작∙창업 지원시설이 채워진 소통과 교류의 마을로 자리한다. 마을이자 섬으로 존재할 노들섬은 2019년 9월, 개장 축제와 함께 막을 올리며 서울이라는 도시에 정식으로 합류했다.
최고의 랜드마크가 될 작품을 선정하는 일이 아니라, 시민과 다양한 분야가 참여함으로써 경험과 사유가 집적되어 만드는 민주주의 실험과정의 결과물이다.
– 노들섬 국제설계공모 보고서
하얀 모래밭에서 전차가 드나드는 철교의 섬이 되었다가, 공원과 한강 인도 교역이 생기면서 가난한 연인들의 단골 데이트 코스로도 자리했던 노들섬. 노들섬은 이제 음악섬, 한강예술섬, 도시의 섬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05년 8월 처음 섬이 시에 매입된 이래 수차례의 아이디어∙설계 공모와 운영 조례의 제정과 폐지, 사업 보류라는 험난한 여정을 거친 값진 결과다. F.A.가 노들섬의 이야기를 다룬 지 3년 반이 지난 지금, 오랫동안 고립되어있던 노들섬은 어떤 모습과 풍경으로 시민을 맞이하고 있을까. 아직 날 선 바람이 가득한 날씨였지만 노들섬을 찾았다.
일러스트에서 볼 수 있듯 노들섬이 내세우는 캐릭터는 자연과 음악, 음식, 라이프스타일이 더해진 열린 복합문화공간이다. 노들섬에 발을 내디디고 둘러보면 기존의 자연환경과 어우러지도록 설계된 낮은 건축물 사이로 한강대교와 도시의 전경이 들어찬다. 녹빛이 돌지 않는 차가운 겨울에 방문했던지라 여유로운 자연의 섬을 만끽하기는 다소 어려웠지만, 매끈하고 간결한 구조물에서 꽤 현대적인 느낌이 전해졌다.
노들섬의 조경은 섬 전체의 프로그램을 잇는 산책로로 조성되어있다. 여기에 양녕로의 동과 서를 연결하는 도로로 섬에 거대한 연결성을 부여했다. 시야를 방해하는 어떠한 구조물 없이 탁 트인 주변은 노들섬과 서울의 풍경이 어우러지는 확장의 노들마을을 만든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노들숲이 보이는 전망데크부터 노들정, 나루터, 노들 비치, 공연장과 공연 마당, 생태교육센터 등이 나타난다. 기존의 수목을 보존하면서도 여러 기능을 품은 소규모 파빌리온을 섬 하단부에 전반적으로 배치한 점도 눈에 띈다. 노들섬을 찾은 시민들은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제한 없이 섬을 누리는 자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노들섬은 음악섬을 표방한다. 콘서트에 특화된 전문 음향 시설을 완비한 공연장 라이브하우스뿐 아니라, 탁 트인 잔디밭도 3천 명까지 수용 가능한 넉넉한 야외무대로 변신한다. 일상적 음악 공간 뮤직라운지 류는 공연이 열릴 때면 대기 장소로, 평소에는 음악 관련 전시와 아티스트가 큐레이션한 음악이 있는 휴식 공간으로 자리한다. 음악∙문화 산업의 기획사, 프로덕션, 아티스트 전용 업무 공간인 노들오피스는 이들이 노들섬과 협업해 음악 콘텐츠를 활성화하도록 지원하는 입주시설이다. 음악을 중심으로 발효주를 소개하는 발효 라운지 바 복순도가도 음악섬의 정체성에 힘을 보탠다. 스트릿 컬쳐 페스티벌 <올데이 아웃 서울(All Day Out Seoul)>, 노르웨이 뮤지션 오로라(Aurora), 싱어송라이터 홍이삭, 인디뮤지션 버둥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인이 노들섬을 무대 삼아 시민과 만나며 섬에 음악적 색채를 더했다.
자연을 추구하는 노들섬의 생태 가치에 시너지를 내는 콘텐츠 메이커도 다수 입점했다. 네 팀의 초록 크리에이터가 꾸리는 식물 아틀리에 식물도, 원예치료와 관련된 정보와 경험을 나누는 우리애그린, 어반 가드닝 문화를 제안하는 가드닝 편의점 서울가드닝클럽 가든 익스프레스, 식물공간 크리에이티브 그룹 앤어플랜트(and a plant), 식물을 모티브로 향기 작업과 퍼퓸 오브제를 만드는 아뜰리에 생강 등이 노들섬에 녹빛을 더한다. 노들숲 뷰와 함께 강의, 전시, 모임, 콘퍼런스 등 이벤트를 즐길 수 있는 다목적홀|숲, 노들섬 지역의 소규모 메이커가 만든 제품을 전시하는 마켓 스페이스 445(Space 445)도 노들섬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섬 곳곳에서 열린 브리즈 아트페어(Breeze Art Fair), 파티 인센티브(Party Incentive), 해커톤 아이디어경매, 섬섬옥수 섬섬마켓 등의 이벤트는 노들섬에게 문화예술의 정체성을 더해주었다.
노들섬의 숨은 백미는 책문화 생산자와 밀접히 관계를 맺는 콜라보레이션 플랫폼 겸 큐레이션 서점인 노들서가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15여 개의 독립서점과 출판사가 1층의 매대를 하나씩 차지해 나름의 방식으로 책을 소개한다. 큐레이션 콘텐츠는 계절마다 주제를 달리한다. 책을 파는 이와 더불어 만든 이가 직접 책을 소개하다 보니, 책을 만들고 고르는 과정과 노고를 스토리텔링형 매대에 풀어낸 것이 노들서가의 차별점이다.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이 오롯이 담긴 메이킹 북, 에디터가 직접 만든 샘플 북, 작가들이 영감을 받은 오브제 등으로 과정과 결과물을 보여준다.
공간이 널찍하니 수많은 매대와 서가를 두어도 여백이 넉넉하다. 곳곳에 큼직한 나무와 책상, 의자를 비치한 덕분에, 마치 교보문고의 롱 테이블처럼 편안한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다. 노을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는 작지만 시선을 모으는 무대를 두었다. 강연, 북 토크, 독서 모임 등 책문화 프로그램이 열려 다양한 사람의 목소리와 삶이 살뜰히 담기는 곳이다. 서점 한쪽에 비치된 연필과 종이에 글을 써 직원에게 건네면 노들서가의 서재에 전시된다. 노들서가에서는 책과 펜을 잡는 누구나 책문화의 작은 생산자가 되고, 글로써 타인과 연결되는 경험을 누린다.
노들서가의 2층은 읽고 쓰는 탐독의 공유 공간이다. 열람 공간 외에도 작가를 위한 서재와 집필실이 있다. 집필실에는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Brunch)에서 활동하는 작가 중 노들서가 소속의 일상작가로 선정된 12명이 상주한다. 일상작가들은 3개월간 집필실에 머물며 사람들과 교류하고 창작 활동을 지원받는다. 작가가 공간을 이용하는 대가는 글세다. 매월 한 편의 글을 쓴 것으로 월세를 대신하면, 노들서가는 이를 모아 작가가 영감을 받은 책과 함께 <작가의 글세전> 코너를 꾸린다. 이처럼 일상작가는 얼굴 없는 작가처럼 글로써 사람들과 만난다. 한 달에 한 번, 직접 사회 공헌 네트워킹 프로그램으로 작은 소모임을 기획해 노들섬의 손님과 마주하며 마음과 영감을 나누기도 한다.
F.A.가 노들서가를 찾은 초겨울에는 ‘노들서가에 숨은 멍냥이를 찾아서’라는 주제의 <멍냥-위크>가 한창이었다.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복실한 친구들인 개와 고양이를 주제로 한 특별 큐레이션이 매대에 가득했다. 세계의 작가가 사랑한 멍냥이를 비롯해 멍냥이 북 토크와 독서 모임, 고양이 영화 랜덤 상영회, 고양이화 초상화 이벤트, 반려동물 사진책 만들기, 애견과 함께하는 북크닉, 프로 견주 시험 개능시험 등 위트 있는 콘텐츠가 손님을 반겼다. 자신의 반려동물에게 쓴 편지를 걸어두는 편지 트리는 많은 이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우리의 작고 소중한 존재인 반려동물과 공존하는 문화를 따뜻하고도 성숙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하는 유의미한 기획이었다.
한강 위에 떠있는 서점이자 모두를 위한 도서관으로 존재하는 노들서가. 노들서가는 책이라는 하나의 세상을 매개로 다양한 가치와 철학으로 바라보는 여러 시선을 한데 모았다. 이곳에 놓인 책들은 텍스트를 넘어 경험을 전달하는 열린 매체의 역할을 수행한다. 노들서가야말로 노들섬의 정체성을 단순한 음악섬에서 문화예술섬으로 끌어올린 일등공신 아닐까.
노들섬은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를 다채롭게 담고 있는 시민의 도화지 같은 섬이다. 분명 육지와 물리적으로 동떨어져있지만, 노들섬을 찾는 시민들의 심리적인 벽이나 거리감은 그리 높지 않은 듯하다. 노들섬이 특정한 이의 개성이나 의도를 두드러지게 나타내기보다는, 도시의 사람들을 위해 넓고 평등한 공간으로 열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가능해진 배경에는 공간과 콘텐츠를 꾸려가는 주도권이 민간에게 있음을 짚어본다.
노들섬은 조성부터 설계까지 모든 과정이 시민과 문화예술 생산자, 노들섬의 가치를 이해하는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기획되었다. 개장 후의 실제 운영도 동일하다. 초반에 기획한 공간의 역할과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섬의 콘텐츠 전반이 그들의 활동과 삶을 지원하는 뱡향으로 진행됐다. 그 한 가지 예로 노들서가가 시민 독자뿐 아니라 작가, 서점, 출판사 등 책 생태계에 관련된 모든 이의 책문화 생산과 소비를 적극적으로 끌어내는 기획과 운영을 선보이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예측 가능한 방법과 민주적 절차,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로 도시의 공간을 단계적으로 만들어가는 유의미한 경험. 기념비적인 랜드마크가 되기보다,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상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일 수 있는 모두의 공간. 그것이 노들섬에서 이루어지며 서울의 한 축을 조용히 세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