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베를린 장벽, 채우고 비워낸 성찰의 공간들

 

봄 날씨만큼이나 남한과 북한 사이에도 봄 기운이 느껴진다. 평창올림픽 남북단일팀의 훈훈한 모습에 이어 지난 4월 1일 평양에서 있었던 남북 평화공연이 모두의 관심 속에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과거에 다소 경직되었던 것과 달리 다채로운 북한 관객들의 호응을 보니, 앞으로 있을 남북간 교류에 대한 어떤 희망과 가능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현재 남북 평화 DMZ에서는 꾸준하게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고 있다. 패럴림픽 기간에 맞추어 열린 문화예술축제 아트페스타, DMZ 자전거 투어, 뮤직페스티벌 피스트레인과 같은 행사들은 DMZ를 찾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가치를 전하며 즐겁고 새로운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분단의 기억을 돌아보다 

 

한반도에 DMZ가 있다면 독일에는 베를린 장벽이 있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은 그야말로 독일 분단과 통일의 시작과 끝을 볼 수 있는 총체적인 기억의 공간이다. 과거 분단의 아픔을 일깨워 주는 성찰의 공간이자 오랜 고생 끝에 쟁취한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서 크나큰 의미를 지니며 베를린에 방문하는 관광객과 자국민들에게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우리는 훗날 DMZ를 어떤 이야기로 채워가야 할까? 우리 보다 먼저 분단과 통일의 경험을 겪었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성공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독일의 경우를 참고한다면 훗날 다가올 평화로운 통일에 한발자국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베를린에서 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돌아보는 유명한 관광지라면 동독과 서독의 통행로였던 브란덴부르크 문과 체크포인트 찰리가 대표적이다. 서울로 치면 광화문 광장과 같이 독일의 역사에서 방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브란덴부르크 광장은 베를린의 크고 작은 행사가 매일같이 열리는 장소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경계에 있던 연합군과 소련군의 검문소로, 검문소 앞을 지키고 있는 소련군과 연합군까지 당시의 풍경을 재현하고 있어 사람들이 필수로 발도장을 찍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주제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부분은 베를린을 둘러싸고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의 통일 전후 이야기다.

©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파브 Bensch / 로이터)

냉전과 독일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건 1961년이다.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게 된 것은 제 2차 세계 대전 말로, 독일이 전쟁에서 패전하자 미국, 영국, 프랑스과 소련이 나누어 베를린을 운영하게 된다. 독일 전역의 서쪽은 연합군이, 동쪽은 소련이 관리하게 되었지만, 문제는 베를린이었다. 동독 땅 한 가운데 위치해있는 베를린은 수도라는 특성상 한 도시가 동독지역에 둘러쌓은 흡사 섬과 같은 도시였다. 당시 독일은 패전으로 말미암아 폐허와 빈터가 많았고 분단으로 인해서 도시는 강압적으로 동서의 구조로 나뉘었다.

 

동독은 서쪽으로 넘어가려고 시도하는 탈주자가 많아지자 이를 막으려고 장벽을 올렸다. 아래 그림처럼 동독은 고립된 섬처럼 높은 장벽으로 서베를린을 둘러 쌓았다. 총 155킬로미터에 달하는 장벽 중 43km는 베를린 도심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르는 장벽으로 구축되었다. 장벽의 구조는 이중 구조로 세워졌으며 각 장벽 사이에는 좁게는 30미터에서 넓게는 500미터에 이르기까지 접근 금지 구역이 형성되었다. 경계구역은 말그대로 무인 지대로 동베를린 측의 군사 경계지역으로도 활용되었다. ‘죽음의 지대’로 불리우기도 하는 이 곳에서 동베를린을 탈출하려던 수백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Tear down the wall!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다

 

1989년 마침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나눴던 장벽이 무너졌다. 장벽이 무너지면서 그 사이를 매웠던 거대한 빈공간이 갑자기 드러나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서쪽과 동쪽, 두 겹의 장벽이 있던 빈 공간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로서 갑자기 드러나게 된 공간은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하는 것이 통일 독일의 주된 관심으로 떠올랐다. 장벽이 과거 베를린의 가장 중심부를 크게 가로질러 위치했던 만큼 비워져 있던 공간의 크기는 굉장했다.

베를린 장벽을 어떻게 할까?

 

도시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남북을 가로질러 남겨진 폐허의 공간은 말그대로 깨끗한 얼굴에 남겨진 상처와 같은 존재였다. 이 공간을 재구성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됐다. 가장 큰 쟁점은 베를린 장벽이 자리했던 공간이 도시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1991년 한스 슈팀만이 베를린 도심의 재구성을 담당하게 되었고, 당시 도시이론가이자 계획가인 디터 호프만-악스트헬름과 함께 ‘비판적 재구성’이란 개념을 도시 재생에 도입했다. 이는 도시를 새롭게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성을 지닌 도시를 다시 복원하자는 방향성을 지닌 유럽적 도시 개발 모델이었다.

장벽이 허물어진 자리를 대체한 현대 건축, 포츠다머 플라츠(Potzdamer Platz)

이러한 개념에 기반해 개발된 지역이 포츠다머 플라츠(Potzdamer Platz)다. 포츠다머 플라츠는 막대한 글로벌 자본이 투입되어 다이믈러 크라이슬러, 소니센터 등의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며 베를린의 핵심 번화가로 거듭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이 설계한 고층 빌딩으로 가득하여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그들의 작품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관통하던 흔적은 찾기 힘들만큼 변모했다. 한편에 조금 남겨진 베를린 장벽만이 이 곳이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자리라는 것을 상기시켜줄 뿐이다.

 

이를 두고 베를린 내에서는 한편으로 반성의 시각이 있었다. 과거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개발된 이 지역은 역사적 기념물로서 의의는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통일 후 베를린 장벽은 분단시대의 흉물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철거되었고 몇 군데 기념물로만 남게 되었다. 베를린시는 이를 뒤늦게 깨닫았다. 2004년부터 베를린시는 다시 베를린 장벽을 역사적인 기억의 상징물로 복원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여 2006년 6월 베를린 장벽에 관한 종합 계획을 아래의 내용과 같이 발표하기에 이른다.

 

1. 현재까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는 모든 장벽을 보호한다. 나아가서 과거에 장벽이 있던 자리의 윤곽을 전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특정구역을 지정하여 복원작업을 시행한다. 베르나우어 거리(Bernauer Straße)를 복원구역으로 지정한다.

 

2. 베를린 장벽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핵심유적지는 베르나우어 거리로 정한다.

 

3. 연방의회의 제안에 따라 브란덴부르크 성문과 국회의사당이 있는 자리에도 분단과 통일의 역사적 기억을 상징화한다.

 

4. 베를린 장벽은 독일역사를 증언할 뿐 아니라 세계사를 증언하는 역사적 상징물이므로 그에 상응하는 역사적 기록을 남겨야 한다. 프리드리히 거리(Friedrich Straße)에 세계사와 관련된 역사기록관을 세운다.

 

5. 시민단체나 개인들이 주도하여 장벽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기리는 활동들을 존중하여 최대한 반영한다.

 

6. 베를린 장벽이 있던 지점들을 연결해주는 ‘베를린 장벽의 길’(보도 및 자전거 도로)를 조성하고, 구간마다 역사적 정보를 제시한다.

 

7. 장벽의 역사와 현존하는 물적 증거자료에 근거하여 다양한 장소들을 그 특성에 맞게 주제화한다.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베를린 장벽과 관련한 개발은 최대한 잔존하는 구역을 그대로 보존하고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베를린의 베르나우어 거리를 핵심 추모지로 지정하고,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공공 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가 하면, 베를린 장벽이 있던 거리를 복원하여 탐방로를 구축하는 등의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비어 있지만 가득 찬 사유의 공간, 베르나우어 거리 (Bernauerstraße)

통일 직후 베를린 장벽을 흉물로 여겨 허물어 버렸기 때문에 원래의 장소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심지어 베를린 시민들도 베를린 장벽이 어디에 있었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할 정도다. 그러나 베르나우어 슈트라세(Bernauerstraße)의 경우는 베를린 장벽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곳 이자 독일 분단의 역사를 성찰해 보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 곳에는 베를린 장벽 희생자들을 기리는 핵심 추모지로 장벽기념관(Gedenkstätte der Mauer)이 함께 위치해 있기도 하다.

도심에서 가까운 빈공간을 그대로 남겨두다

 

이 추모장소가 이례적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도심에서 멀지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장벽이 있던 자리에 1.4키로미터에 달하는 빈 공간을 조성해 놓았다는 점이다. 얼만큼 떨어진 곳에서 보면 허허벌판이라고 할 만큼 널찍한 공간에 일직선으로 세워진 철골만이 늘어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사람들은 장벽을 따라 걸으며 드넓은 거리에 띄엄띄엄 소개되어 있는 전시물들을 보며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베르나우어 거리처럼 장벽 터를 빈공간으로 구성하자고 제안한 것은 도시민들의 의견이었다. 통일 이후 베를린은 도시계획국 산하에 도심 재구성과 관련하여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도시포럼‘을 열었다. 이 곳에서 분단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장벽 주변의 빈 공간이 다른 공간, 다른 기억으로 점유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민의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박물관처럼 폐쇄적인 공간에서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공간에서 당시의 시대상과 베를린 장벽에서 삶을 마감한 희생자를 기리기도 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 공간 한 곳에 오로지 이곳은 과거의 재현, 추모의 공간으로만 기능하기에 더욱 의미를 갖게 되었다. 어떠한 상업적 연계성을 갖지 않은 채 비워진 공간이기에 역사적 의미가 더욱 분명한, 사유의 공간으로 남은 것이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Eastside Gallery), 가장 긴 공공 미술 프로젝트

베르나우어 거리와 같은 의도로 재구성된 곳은 관광지로 유명한 이스트사이드 갤러리가 있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베를린을 관통하는 슈프레 강의 동쪽 강변에 자리한 1.3킬로미터 길이의 장벽 위에 벽화가 그려진 전시 공간이다. 보통 서독과 동독 경계에 설치되었던 베를린 장벽의 서쪽면, 즉 서베를린 쪽의 장벽은 아무런 제약없이 접근할 수 있었기에 수많은 그래피티로 장식됐다. 그러나 이스트사이드 구간의 장벽만은 예외적으로 접근이 어려웠다. 이 구간의 장벽은 동서 베를린읙 경계였던 슈프레강 위에 설치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동베를린 강변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장한 동독 군인들의 감시 속에 보존되어 온 것이다.

베를린 벽화프로젝트의 시작 

 

1990년 봄, 공식적인 통일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이 장벽에 대한 처리 방안이 논의되었다. 그 와중에 서베를린 예술대학 HDK에서 미술을 전공하던 카니 알라비라는 사람이 분단의 상징인 장벽을 예술작품으로 채우는 ‘벽화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이렇게 시작된 벽화프로젝트는 미술을 전공하는 독일 대학생들과 외국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21개국 118명의 젊은 예술가들이 참가하여 거대하고 긴 콘크리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국의 지원을 받아 시작된 이 공공 미술 프로젝트는 ‘독일 통일의 감격‘과 ‘희망‘을 주제로 높이 3.6미터, 길이 1316미터에 달하는 베를린 장벽을 가득 채웠다.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은 Dmitry Vrubel의 <주여!이 치명적인 애정에서 살아남도록 도와주소서>라는 작품이다. ‘형제의 입맞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한 이 작품은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동독의 당 서기장 호네커가 키스하고 있는 장면을 재현한 그림이다.

마우어파크(Mauer Park), 평화와 자유의 공간으로 거듭난 장벽 공원

독일어로 ‘장벽 공원’이라는 뜻의 마우어파크는 베를린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핫플레이스다. 매주 일요일마다 열리는 대규모의 벼룩시장은 독일의 빈티지 물품과 길거리 음식을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는 곳이기에 인기가 많다. 마우어 파크는 그 이름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 베를린 장벽이 가로질렀던 대표적인 장소다. 장벽을 넘으려 했던 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은 곳이기도 하고 이후에는 장벽 주변이 쓰레기 하치장으로 방치되어 버려졌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곳은 이제 현지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까지 사랑하는 주말 나들이 장소가 됐다. 베를린 최대의 벼룩시장이 열리는 한편, 옆에 위치한 드넓은 공원에서는 매주 자유롭게 버스킹 공연을 보러온 나들이객으로 가득하다. 일정을 잘 맞춰가면 마우어파크의 특별한 볼거리 ‘공개 노래방’을 볼 수도 있다. 엄청난 규모의 관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 행사는 인기가수의 콘서트 현장을 방불케한다.

 

참가자 중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 보다는 용기에 격려를 보내며 함께 노래를 부르고, 웃고 즐기는 시간을 보낸다.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공원에 앉거나 누워 평화로운 주말을 맞는다. 장벽이 붕괴되고 드러났던 드넓은 공간은 빈 공간 그 자체로 남아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포용의 공간이 됐다. 이곳을 채운 것은 새로운 건축물도, 박물관도 아닌 사람들이었다. 마우어파크를 찾는 사람들로 베를린 장벽은 자유와 포용의 분위기를 일상적으로 탈바꿈한 평화의 장소로 다시 거듭난 것이다.

베를린 장벽을 따라 걷는 베를린 장벽 트레일 (Berliner Mauerweg)

과거 서베를린을 둘러 쌓았던 베를린 장벽의 흔적을 그대로 따라가 보려면 Berliner Mauerweg (장벽길)을 찾으면 된다. 베를린시는 ‘Berliner Mauerweg’ 프로젝트를 통해 옛 장벽을 따라 도보 혹은 자전거로 이동할 수 있는 탐방로를 정비했다. 2002년에 시작하여 2006년에 완성된 이 프로젝트는 시내뿐만 아니라 베를린과 인접한 브란덴부르크주까지 아우르며 총 160키로미터의 달한다. 도심의 주요 관광지부터 외곽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까지 이 루트를 따라 걸으며 체험하는 문화 프로그램과 여행코스도 다양하다.

 

탐방객의 편의를 위해 14개의 탐방루트로 나뉘어져 있으며, 구간 내 29개 지역에 베를린 장벽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 장소가 위치해 있다. 탐방로 운영은 완공 이후의 관리가 중요한 프로젝트인데 베를린시는 2006년 프로젝트 종료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리와 보수로 탐방로를 운영하고 있다. 구간별로 나뉘어진 루트와 어플로 제공되는 트레일맵을 통해 사람들은 누구나 장벽이 있던 길을 따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안전한 관광길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를 그대로 재현하는 공공 예술 프로젝트

 

‘Kulturprojeckte Berlin’은 베를린 주정부 산하 비영리 기업으로, 베를린시의 위임을 받아 도시와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프로젝트를 총괄적으로 진행한다. 문화교육 프로그램, 문화 프로젝트 기획, 해외 문화단체와의 교류, 각 예술분야를 연계시킨 축제 등을 포함하는 크고 작은 베를린의 행사들을 전담하여 진행시키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베를린 장벽과 관련하여 인상적인 예술 행사를 개최하며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는데, 25주년 기념해 기획한 LICHTGRENZE와 20주년을 기념한 도미노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상징적인 예술행사. 25주년 ‘LICHTGRENZE’, 20주년 ‘도미노 프로젝트’

 

2014년 진행된 빛의 국경이라는 뜻의 LICHTGRENZE는 베를린 장벽이 있던 위치를 따라 장벽을 형상화한 하얀 빛의 풍선을 설치해두고, 하늘로 멀리 날려보내는 예술 행사였다. 이 행사에 설치되었던 LED 풍선을 하늘에서 바라보면 베를린 장벽이 복원된 듯 그대로 재현됐다. 마지막 날 장벽을 이룬 8000여개의 풍선을 하늘을 날려보냄으로써 1989년 베를린 시민들은 장벽을 허물었던 그날의 감격과 해방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2009년 장벽 붕괴 20주년으로 열린 도미노 장벽 프로젝트는 도미노 형태로 장벽 붕괴를 재현한 행사였다. 이날을 기념하여 2.5미터 높이에 넓이 1미터, 폭 40센티미터 크기의 거대한 도미노 스톤 1000여개가 2킬로미터에 걸쳐 설치됐다. 1000개의 도미도들은 20년전 베를린의 젊은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베를린의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으로 꾸며졌고, 그리고 마찬가지로 행사의 마지막 날 저녁 7시에 도미노 장벽을 무너뜨리는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이들의 행사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고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던 이유는 시민이 직접 참여하고 장벽 붕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형태로 결부시켰다는 점이다. LED 풍선, 도미노의 형태를 빌려와 장벽 붕괴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도 그날의 감정을 체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분단 극복의 의미를 되새기는 성찰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베를린이 장벽을 통해 자유와 평화를 이야기하는 방법은 과거의 모습을 충실히 보존하고 재현하는 일이었다. 이야기한다는 표현보다는 사람들이 직접 성찰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과거를 충실히 재현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통일 초기 장벽을 허문 공간을 섣불리 새 것으로 가득 쌓아 올렸던 초기의 행보를 반성하고 개발 계획을 다시 정비하여 지속적으로 더 나은 역사적 공간을 마련해 나갔다.

 

앞으로 한반도의 DMZ는 더 많은 이야기와 공간으로 채워 나가야 할 일만 남았다. 독일과는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환경도 상이하지만 분단과 상실의 아픔 그리고 통일의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오랜 시간 유지하고 공유하기 위한 접근 방향만큼은 충분히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