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이제는 일상에서 분리하기 어려워진 플랫폼, 유튜브에 이어 숏폼 콘텐츠가 대세가 된 요즘이다. 움직이는 영상 안에 짤막하고 위트 있는 콘텐츠를 담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숏폼 콘텐츠는 SNS를 타고 MZ세대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급격히 변화하는 소셜미디어 트렌드와 별개로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고요하고 묵직한 콘텐츠가 있다. 바로 정지된 한 화면 안에 깊은 울림과 여운을 담아내는 사진이다.

 

한 장의 사진 안에 담긴 이미지를 통해 풍성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두 명의 사진 대가들이 한국을 찾았다. 예술의전당에서 3월 30일까지 진행 예정인 알버트 왓슨의 사진전과 지난 2월 26일 종료된 마리아 스바르보바의 사진전이다. 연령대도, 작품 세계도, 스타일도 모두 다른 그들이지만 이들의 작품 안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정지된 순간을 거쳐 새로운 시선으로 나아가는 기묘한 여정이다.

Alfred Hitchcock – Albert Watson © Albert Watson
전시장 포토존 © 직접 촬영

보그가 사랑한 사진의 거장 : 알버트 왓슨

WATSON, THE MAESTRO-알버트 왓슨 사진전

“인물을 촬영할 때 지리학적 관점에서 얼굴을 들여다보세요. 얼굴은 언덕과 계곡의 풍경을 담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조명을 어떻게 활용할지 그리고 메이크업과 헤어는 어떻게 할지에 도움을 줄 겁니다. 머리를 묶을 것인지 풀 것인지, 약간의 바람을 활용해 보는 거 어떨까요? 머리카락은 지리학의 일부입니다.”

– 알버트 왓슨(Albert Watson) –

 

알프레도 히치콕, 스티브 잡스, 믹 재거, 케이트 모스 등 시대를 대표하는 셀럽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아온 거장, 알버트 왓슨(Albert Watson)의 사진 철학이 담긴 멘트다. 1942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출신으로 그래픽 디자인과 영화를 전공한 그는 1970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후 사진을 시작한 지 3년 만인 1973년,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의 크리스마스 특별호 표지에 실릴 영화감독 히치콕을 촬영하면서 패션 사진계에 이름을 알렸다.

 

히치콕과 함께 한 결과물은 사진작가로서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 당시 신인 작가였던 알버트는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무조건 따르지 않고 당돌하게 자신만의 철학이 담긴 새로운 콘셉트를 제안했다. 난감해하면서도 무엇인가를 호소하는 듯한 히치콕의 표정과 그의 손에 들린 거위는 단순히 화젯거리나 튀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다. 작가인 알버트가 피사체인 히치콕의 영화를 보며 그의 주요 이력과 연출 스타일 등을 꼼꼼히 살핀 뒤, 알프레도 히치콕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이미지를 오래 연구한 끝에 탄생한 것이었다.

 

완벽한 몰입감으로 시선을 끈 이 사진은 알버트에게 자신의 작업 방식에 대한 자신감과 패션 사진가로서의 성공적인 커리어를 둘 다 안겨 준 잊지 못할 작품이 됐다. 동시에 1977년부터 지금까지 패션잡지 <보그(VOGUE)>의 표지 사진 작업을 100회 이상 진행할 수 있는 근간이 되기도 했다.

 

히치콕의 사진이 사진가로서의 알버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만든 작품이라면, 스티브 잡스의 사진은 알버트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 됐다. 실제로 사진 촬영에 소요된 시간은 단 30분. 알버트는 꼼꼼한 사전 준비를 거쳐 짧은 시간 안에 잡스의 이미지를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해, 가장 스티브 잡스다운 표정과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증명사진처럼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면서도 강렬하고 또렷한 선, 날렵한 안광을 포착해 스티브 잡스만의 남다른 통찰력을 담아낸 것이다.

 

대중에게 비전 메이커로 각인된 스티브 잡스만의 캐릭터를 군더더기 없는 연출로 잡아낸 결과, 이 작품은 크리에이티브한 인물로서의 스티브 잡스를 기억하게 만드는 이미지이자 한 입 베어 문 애플의 로고처럼, 창의적인 리더로서의 스티브 잡스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잘 담아냈다는 평을 받았다.

 

이처럼 다양한 유명 인사와의 작업을 통해 패션 사진계의 리더로 불리는 왓슨이지만, 사실 그는 셀럽 외에도 여러 평범한 인물, 도시 풍경, 자연 등을 자신만의 스타일과 방법론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그중 5살 소년을 조각상처럼 보이도록 연출한 <골드 보이>는 그의 심미안이 두드러진 작품 중 하나다.

 

눈빛이 강렬한 어린 소년에게 청동빛 파우더를 뿌려 이미지를 연출한 뒤 흑백으로 촬영하고, 암실에서 프린트하는 과정 중 청동의 느낌을 일부 되살렸다. 빛을 활용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뿐 아니라 소년의 모발 질감을 살리고 얼굴의 골격을 부각한 콘트라스트 기법 또한 인상적이다. 그 덕에 정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이 단순하면서도 다차원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가장 몽환적인 현실 :  마리아 스바르보바

어제의 미래 : FUTURO RETRO – 마리아 스바르보바 사진전

알버트 왓슨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한가람미술관 한 층 위에서는 전혀 다른 느낌의 사진전이 작년 12월부터 지난 2월까지 진행되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슬로바키아 출신 사진작가 마리아 스바르보바(Maria Svarbova)의 《어제의 미래 : FUTURO RETRO》다. 알버트가 80세가 넘는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는 역사적인 거장의 느낌이라면 스바르보바는 이제 막 30대 중반에 들어선, 그야말로 요즘 가장 핫한 사진작가 중 하나다. 그의 사진에 담긴 환상적인 색감이 트레이드 마크가 되면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뷰파인더를 보면 평행세계가 보인다. 다른 시간에 작동하는 상상의 세계다”

– 마리아 스바르보바(Maria Svarbova) –

 

전시명 《어제의 미래》에서 드러나듯 그는 미래(Future)와 복고(Retro)가 융합돼 세계적으로 하나의 트렌드가 된 퓨트로(Futro) 사진을 선보인다. 오래되고 낡은 것에서 트렌디하고 현대적인 감각을 끌어내는 마리아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그가 과거와 미래의 아름다운 연결자로 불리며 스타 작가로 떠오른 이유이기도 하다.

 

우선 언뜻 들여다본 그의 작품의 첫인상은 정밀하게 그린 그림인지,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중 대표작 스위밍 풀 시리즈는 몽환적이고 독특한 색채, 절대적 균형미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공간과 인물의 구도, 절제된 형태로 배열된 다양한 오브제가 조화를 이룬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는 강렬한 시각적 아름다움 속에 고도로 계산된 팽팽한 긴장감이 내재되어 있다. 원색의 대비와 함께 특유의 파스텔톤이 절묘하게 녹아들어 차가우면서도 따뜻하고, 오래된 듯하면서도 미래적이고 초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이러한 특유의 긴장은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적 감각의 충돌뿐 아니라 생동하는 영화의 한 장면 같으면서도 정지된 그림 같은 독특한 이중성을 낳는다.

 

마리아 스바르보바 작품의 또 다른 스토리라인은 노스탤지어, 과거에 대한 향수다. 주로 냉전 시대인 1990년대, 마리아의 고향인 체코 슬로바키아를 연상시키는 공간과 소품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이 시리즈 속에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경험과 기억, 감정 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다른 작품들과 같이 미니멀한 공간이 주된 배경을 이루지만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조금 다르다. 도무지 표정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이다. 이러한 장치는 관람객의 상상을 자극하는 동시에 과거에서 소환된 아련한 그리움의 정서를 자아낸다.

 

이 외에도 마리아의 작품 중에는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를 비틀어 표현한 작품도 있다. 사회 비판적인 예리한 시선이 담긴 이 작품 속에는 단단하지만 깨지기 쉬운 콘크리트를 배경으로 두 남녀가 마주 서 있다. 그런데 가까운 물리적 거리와 달리 서로에게 고정된 시선은 여전히 멀다. 마리아는 이 작품을 통해 도시인들의 단절된 소통과 고립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뛰어난 색감과 대비로 인해 패션 화보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Chrumky – Maria Svarbova © Maria Svarbova
DEEP – Maria Svarbova © Maria Svarbova

세대가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좋은 예술 작품의 힘은 영원하다. 81세의 거장 알버트의 작품과 이제 막 30대 중반에 들어선 마리아의 작품은 한 장의 이미지 속에 담긴 깊고도 방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약 50년에 달하는 나이 차와 분야, 작품 세계 등 큰 갭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 모두 피사체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치밀한 연출을 통해 깊은 영감을 준다.

 

각자의 뷰파인더에 포착된 찰나의 순간을 통해 거대한 의미를 담아낸 이들의 작품은 온갖 트렌디한 콘텐츠와 플랫폼이 쏟아지는 이 시대 속에서도 예술로서의 사진의 자리가 여전히 건재함을 드러낸다. 본질을 꿰뚫고 시대를 관통하는 거장의 묵직함과 환상적이면서도 독특한 색감을 뽐내는 젊은 리더의 생생함. 이 부조화스러운 하모니가 만들어갈 예술로서의 사진의 내일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