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책 한 권을 골라 어디든 펼쳐보자. 출발 신호가 울리면 온 힘을 다해 뛰어나가는 선수들처럼 이미지와 텍스트 더미가 끊임없이 쏟아진다. 풍부한 정보를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다는 점은 종이 매체의 장점이지만, 고정된 정보가 일방통행으로 움직이는 점은 피할 수 없는 한계다. 요즘의 대중은 일방적인 정보 전달을 지루해한다. 그들은 영상을 보면서 코멘트를 달거나 함께 스트리밍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제작자에게 적극적인 피드백을 건네며 콘텐츠를 즐기기 때문이다. 그곳에 작고 빨간 하트까지 남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할 테고. 매력적인 콘텐츠가 쉴 새 없이 샘솟는 와중에 고정성이라는 특성은 종이 매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함정임이 틀림없다.

 

그 때문일까? 색소를 머금어 뻣뻣해진 종이의 질감을 고수하던 주류 매거진이 변하기 시작했다. 지면 콘텐츠를 웹 버전으로도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프라인에 공간을 마련해 독자와의 대면 만남을 기획하기도 한다. 책이라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만남을 추구하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 한국의 매거진이 기획하는 매력적인 페스티벌 세 가지를 소개한다.

더 뉴요커 페스티벌: The New Yorker Festival

미국의 해롤드 로스가 1925년 창간한 <뉴요커 THE NEW YORKER>는 그들만의 정체성을 오랫동안 고수해 온 미국 대표 매거진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현대의 잡지는 이미지와 타이포의 결합을 우선시한다. 빽빽한 타이포만으로는 독자의 흥미를 끌기 어렵기에, 적절한 촬영 이미지를 섞어 타이포의 압박감을 중화시킨다.

 

그러나 <뉴요커>는 여전히 사진보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선호한다. 창간호부터 최신 호까지 일러스트레이션을 표지로 사용했으며, 매거진 로고의 디자인도 바꾸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에세이나 단편소설, 미술비평 등 다양한 장르로 미국과 뉴욕의 문화를 소개하는 <뉴요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무라카미 하루키, 존 오하라 등 대작가들이 필자로 거쳐 간 역사까지 갖고 있다고.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고집스러움 때문에 향후 <뉴요커>가 어떤 변화를 시도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 틈에 더 뉴요커 페스티벌(The New Yorker Festival)이 개최됐다. 더 많은 교류를 꾀하기 위해 <뉴요커>가 새로운 이벤트를 기획한 것이다. 1999년에 개최 소식을 알리자마자 큰 주목을 받은 더 뉴요커 페스티벌은 예술과 정치,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과 관련된 인물들이 연사로 나서 페스티벌을 이끌었다. 코로나의 위협이 상당했던 작년에는 오프라인 만남이 아닌 화상 대화로 진행됐는데, 미국의 법무부 장관 메릭 갈런드뿐만 아니라 동물학자 제인 구달, 한국에서도 유명한 영화배우 에이미 슈머, 스탠리 투치 등이 각자의 테마에 맞춰 <뉴요커>의 에디터와 이야기를 나눴다. 대중은 버츄얼 티켓을 구매하여 그들의 심도 있는 대화를 실시간으로 스트리밍하고 인사이트도 얻었다고.

 

더 뉴요커 페스티벌만의 다이닝 인(Dining in) 서비스도 무척 매력적이다. <뉴요커>가 연사로 섭외한 요리사의 음식을 집에서 받아볼 수 있는 서비스인데, 배달 날짜와 메뉴를 고려하여 티켓을 구매하면, 해당 연사의 콘텐츠가 열리는 날에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음식이 배달된다. 가만히 앉아 매거진의 책장만 넘기던 과거의 독자와 달리 더 뉴요커 페스티벌에 참여한 독자들은 더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태도로 콘텐츠를 즐긴다.

더 모노클 퀄리티 오브 라이프 콘퍼런스: The Monocle Quality of Life Conference

외국 매거진에 흥미가 있다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모노클 THE MONOCLE>. 영국의 타일러 브륄레가 2007년에 시작한 <모노클>은 디자인과 트렌드, 비즈니스, 문화와 여행, 패션 등 많은 카테고리의 콘텐츠를 담아내는 종합 매거진이다.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마케팅 타깃층이 분명하다는 점인데, 모노클은 하이레벨 즉 일정 수준 이상의 지위를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콘텐츠를 기획한다. 따라서 읽는 이가 쉽게 씹고 소화할 수 있는 수준보다는 전문적인 내용을 담아 읽는 시간을 늘리고 보관 가치를 높이는 데 힘썼다.

 

<모노클>은 잡지 외에도 그들만의 브랜드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플랫폼을 기획했다. 오디오 콘텐츠에 대한 니즈를 파악하여 탄생한 모노클 24 라디오, 매거진을 홍보하고 관련 굿즈를 모아놓은 모노클 카페나 모노클 샵 등은 수준 높은 지식에 대한 관심과 의지를 가진 지역 주민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오프라인 공간들은 관광 명소로도 사랑받고 있다.

 

더 나아가 더 모노클 퀄리티 오브 라이프 콘퍼런스(The Monocle Quality of Life Conference)에서는 각국의 다양한 전문가와 함께 삶의 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모노클>의 타깃층이 그러하듯, 비즈니스와 문화, 디자인, 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이끌어가는 글로벌 리더들이 연사와 패널로 참여한다. 학구적인 모임인 만큼 3일 동안 촘촘한 스케줄이 이어지는데, 식사 및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는 25분 간격으로 연사가 바뀌며 깊이 있는 대화가 오간다. 아테네와 마드리드, 취리히 등 행사가 열리는 도시의 아름다운 풍경과 풍요로운 먹거리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도 빼놓지 않는다. 매거진뿐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모노클>은 독자와의 만남을 통해 그들만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있다.

오픈룸: open room 2nd

매거진이 오프라인 기획을 통해 만남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오직 외국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열린 지성을 중요한 가치로 꼽는 프럼에이(FromA)는 컬처와 아트, 테크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대중과 공유하는 데 힘써왔다. 프럼에이는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파악한 트렌드를 온라인 아티클 콘텐츠인 액티클(Acticle)로 제작해 오픈 소스로 공유한다. 돈을 지불하거나 가입을 해야만 정보를 내어주는 제한적 운영이 아니라, 누구든 접속만 하면 콘텐츠를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둔 것이다. 웹에 업로드된 액티클은 매년 <오픈북 OPEN BOOK>이라는 이름 아래 한 권의 책으로 재탄생한다.

 

공유 아티클 브랜드인 <오픈북>을 오프라인으로 꺼내 확장한 것이 바로 오픈룸(open room)이다. 오픈룸은 새로운 만남을 통해 열린 시야와 다양한 관점을 경험할 수 있는 프럼에이만의 open intelligence meet-up 프로그램이다. 문화와 예술, 기술 분야에서 주목받는 전문가들이 주어진 주제에 대해 오프라인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점은 앞서 소개한 예시들과 결이 같다. 다만 오픈룸에서는 상호 간 네트워킹이 두드러진다는 차별점이 있다. 하나의 콘텐츠가 오로지 전문가의 강연으로만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호스트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 나누고 싶은 것을 꺼내면 청중이 질문을 던지거나 답하며 생각의 밀도를 높인다.

 

하나의 세션이 마무리되면 네트워킹 시간이 주어지는데, 그때 다른 참여자들과도 만나 대화의 폭을 넓혀간다. 단순히 정보 전달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각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거대한 마인드맵을 그려나가기 위함이다. 작년에는 팬데믹에 직면한 현대인의 상황을 돌아보며 마스크의 시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면, 올해는 신선한 감각과 창의적인 에너지를 발견하기 위한 크리에이티브 주스(Creative Juice)를 주제로 진행된다. 언제나 유연한 자세로 대중과 시선을 맞추는 프럼에이가 우리에게 어떤 만남의 가치를 알려줄지 기대된다.

오픈룸 2nd 공식 배너 © 프럼에이 오픈룸 2nd
오픈북 vol.4 from a Mask Epoch © 프럼에이 오픈북
오픈북 vol.4 from a Mask Epoch © 프럼에이 오픈북

멈춰 있는 콘텐츠가 전부였던 매거진은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독자와 마주 섰다. 그 만남은 역동적인 대중을 만들었고, 브랜드의 전문성을 도모했으며, 독자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활약하며,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도 있다. 이렇듯 종이 매체의 고정성에서 비롯된 일방적인 정보 전달에서 벗어나, 만남과 소통의 가치를 깨우친 매거진은 끊임없는 변주를 만들어낸다. 새롭게 변화한 콘텐츠를 즐기는 대중들은 다시 종이 매체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힘이 되지 않을까. 앞으로도 우리는 한 권의 매거진에서 그 너머의 만남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