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도, 배도 아닌 물 위에 떠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 바로 선상문화예술공간이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사실 선상문화예술공간은 세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시민들은 이 공간에서 여가 생활을 즐기는 동시에 문화예술을 자연스럽게 접한다. 국내외 선상문화예술공간의 이야기와 함께 공간의 위치가 주는 특별함이 문화예술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자.
EYE Film Museu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네덜란드에는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페리를 타고 강을 건너야만 닿을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 바로 영화 박물관인 아이필름뮤지엄(EYE Film Museum)이다. 영화 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세워진 이 박물관은 도시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다. 40,000편이 넘는 영화를 다루며, 고전 작품을 복원하여 상영하거나 새로운 독립영화를 선보인다. 또한 평소에 쉽게 접할 수 없는 다양한 장르 영화를 소개하는 특별 행사를 열기도 한다.
아이필름뮤지엄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닌, 다양하게 영화를 접하는 경험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먼저 박물관 1층에 들어서면 파노라마(Panorama) 전시를 만날 수 있다. 영화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각종 영상 장비들의 전시다. 초기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영화 장비의 발전 과정 등 영화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빌딩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아이익스플로러(Eye explore) 전시에서는 영화의 전신인 페나키스토스코프(Phenakistoscope)*,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 등 다양한 시각 장치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또한 뮤지엄 계단 중간에는 유명한 영화 창작자들의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를 헤드폰으로 듣는 아이리슨(Eye Listen)이라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계단의 끝에는 일곱 개의 모니터를 통해 영화 촬영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 95,000장을 볼 수 있는 ≪아이 온 셋(Eye on set)≫ 전시가 준비되어있다.
아이필름뮤지엄에서는 다양한 상설 전시뿐 아니라 특별 전시도 열린다. 2020년 8월 30일까지 열리는 샹탈 애커만 (Chantal Akerman)의 특별전 ≪Chantal Akerman – Passages≫는 그의 주요 작품을 다룬다. 벨기에 출신의 영화감독 애커만은 1970년대에 여성주의적 관점을 그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에 담아내며 아방가르드 영화의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관객은 전시를 통해 애커만의 초창기 작품부터 최근 작품을 두루 만나볼 수 있다.
아이필름뮤지엄에서는 학생을 위한 영화 교육 프로그램은 물론, 영화 전문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서비스와 레지던스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영화 프로그래머, 연구자, 영화감독, 영화 복구 전문가 등 다양한 영화계 종사자들이 뮤지엄의 지원 서비스와 풍부한 아카이빙 자료를 이용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또한 아이 인터내셔널(Eye International)이라는 자체 배급 시스템을 만들어 네덜란드 영화의 해외 진출을 돕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전시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아이필름뮤지엄의 백미는 건물 안에 위치한 카페 겸 레스토랑이다. 강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점에서 선상문화예술공간의 장점을 극대화한 곳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에 관심이 있고, 강의 한 가운데에 떠 있는 것 같은 레스토랑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싶다면 꼭 이곳을 방문해보길 바란다. 그곳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영화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페나키스토스코프(Phenakistoscope): 원판에 동작을 분할한 그림을 그려 넣고, 거울에 비춰 돌려보면 그 동작들이 이어져 하나의 움직임으로 보이는 시각 놀이기구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 회전 원통을 돌리면 안쪽의 그림이 연속된 움직임으로 보이게 하는 영사 기구. 반투명 재질에 그린 그림을 영사막에 투사하여 뒤편에 있는 관객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Elbphilharmonie, 독일 함부르크
독일 제2의 도시이자 최대 항구도시 함부르크(Hamburg)에도 선상문화예술공간이 있다. 바로 함부르크의 랜드마크인 엘프필하모니(Elbphilharmonie)다. 엘프필하모니는 원래 수 세기 동안 창고로 쓰인 공간이었다. 스위스의 유명한 건축 사무소 헤르초크&드 뫼롱(Herzog & De Meuron)에 의해 콘서트홀을 포함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고, 2017년 개관했다. 기존의 창고 건물에 돛과 파도를 형상화한 건축물을 올려 완성한 엘프필하모니의 독특한 외관은 그 웅장함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거대한 콘서트홀은 완공 전까지 끊임없는 잡음에 시달렸다. 준공 기간과 필요한 예산은 점점 늘어났다. 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높았으나, 모든 이들이 즐길 수 있는 예술문화공간을 만들겠다는 함부르크시의 확고한 목표가 있었기에 엘프필하모니가 탄생할 수 있었다. 현재 엘프필하모니는 함부르크 시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장소로 꼽힌다. 함부르크가 클래식 음악계의 중심 도시로 자리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역주민 뿐 아니라 수많은 관광객이 엘프필하모니를 방문하기 위해 도시를 찾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자랑한다.
엘프필하모니의 가장 큰 특징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꼭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보지 않아도 전망대를 방문하여 함부르크시의 항구 전경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건물에 위치한 숙박 시설, 카페와 레스토랑 등 다양한 문화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또한 다양성을 존중하며, 전통 클래식 음악을 넘어 재즈, 록, 힙합까지 다양한 음악 장르의 공연을 선보인다. 시민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도 기꺼이 무대를 내준다. 또한 지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다. 지역 주민을 위한 워크숍을 꾸준히 진행하며, 완성도 높은 공연을 무료 또는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해 모두가 문화예술을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이처럼 도시재생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재탄생한 선상문화예술공간이자, 모두가 차별 없이 문화예술을 누리는 지역의 주요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Seoul Wave Art Center, 한국 서울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도 선상문화예술공간이 있을까? 물론 그렇다. 잠원 한강공원에 위치한 서울웨이브아트센터(Seoul Wave Art Center)다. 아이필름뮤지엄이나 엘프필하모니처럼 이곳에서도 다양한 전시와 공연을 만날 수 있다. 서울웨이브아트센터는 일렁이는 한강 위의 색다른 경험이 있는 문화예술공간으로, 2020년 1월에 개관했다.
서울웨이브아트센터는 이름처럼 물결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다. 통유리창을 통해 한강과 서울N타워, 여의도63스퀘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1층과 2층, 그리고 야외 공간인 3층 모두 전시・행사・공연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선상문화예술공간에서만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경치로 SNS에서는 이미 풍경 맛집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유명 광고와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기존 카페의 영업 종료 후 스타벅스의 입점을 발표해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서울웨이브아트센터에서는 개관 기념전으로 2020년 5월까지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Maurits Conrnelis Escher)의 특별전인 ≪환상의 에셔展: EXIT-에셔의 방≫을 선보였다. 에셔의 기하학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작품을 물 위에 떠 있는 공간에 전시함으로써 작품의 특징과 공간의 특징을 절묘하게 합친 환상의 영역이 만들어진다. 또한, 브랜드・기업과의 협업 전시, 컨벤션, 이벤트를 꾸준히 진행해왔다. 선상복합문화공간이 담을 수 있는 콘텐츠를 폭넓게 보여줘, 공간의 가능성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앞서 살펴본 세 개의 공간과 일반적인 문화예술공간의 차별점은 무엇일까? 우선 위치가 주는 특별함이다. 선상 문화예술공간은 물 위에 있다는 그 자체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자연스럽게 그 공간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찾아보게 되고, 관심 있는 전시와 공연의 탐색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일상이 있는 육지를 잠시 벗어나, 선상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온전히 예술에 집중하는 경험이 더해진다. 선상 문화예술공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물 자체도 유의미하다. 물이라는 자연의 요소와 가까이 한 공간은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작가들에게 창의적인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공간을 찾은 관객에게도 새로운 감성을 일깨울 지 모른다. 공간 자체가 또 다른 예술의 영감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선상문화예술공간은 물리적인 특징만으로도 문화예술의 경험을 더욱더 특별하게 만든다. 아직 개관한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서울웨이브아트센터에는 이미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화제성과 영향력이 클수록, 아이필름뮤지엄이나 엘프필하모니의 사례처럼 열린 공간에서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양질의 전시와 공연 등을 제공하고, 지역 사회의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할 방향을 함께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공간의 특징은 그 공간의 장점이 되고, 장점은 가능성이 되며, 가능성은 더 많은 사람과 함께 할수록 더 커지고 넓어진다. 선상문화예술공간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이 문화예술계에 새로운 물보라를 일으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