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3 Dots 

▪ 영국의 사운드 이머시브 극단, 다크필드 시어터는 오감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각을 차단한 채 소리에만 의지해 관객에게 전에 없던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 이들은 공간 제약이 적다는 점을 활용해 소규모 컨테이너를 넘어 앱을 활용한 이머시브 체험, VR을 통한 가상 공간 체험 등 활동 범위를 확장해 가는 중이다.

▪ 물리적 공간 확장 외에도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공익성 프로젝트, 참여형 게임 콘텐츠 등 주제 및 방식 면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꾀하고 있다.

 


 

승객 여러분, 기내 안전 방송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행 중 갑작스러운 기내 기압 하강 시, 대체 시나리오가 제공될 것입니다. 이후 친척에게 알릴 것이며 디저트가 추가로 제공될 것입니다. 여분의 베개도 드립니다. 트럼펫과 징 소리가 울릴 것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우리 비행기는 최종 목적지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에어버스 320의 이코노미 클래스 좌석. 승무원의 모습이 모니터에 나타나며 기내 방송이 울린다. 그러나 내용이 심상치 않다. 갑자기 모니터에 노이즈가 일다가 다른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이 번갈아 가며 화면에 등장한다. 그리고 암전. 30분가량 이어지는 비행은 헤드폰으로 전달되는 스산한 음성의 나레이션을 통해 승객들을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끈다.

 

다크필드 시어터(Darkfield)의 대표작 <플라이트(Flight)>는 사운드만으로 관객들을 두 개의 시간, 두 개의 공간 그리고 선택으로 가득한 양자역학의 다중우주로 이끈다. 짧은 러닝타임 동안 관객은 암전된 공간에서 헤드폰 소리에 의지해 작은 선박용 컨테이너에서 현실을 벗어난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

다크필드의 대표작 <플라이트(Flight)> 공연 장면 © 다크필드 페이스북
녹음 준비 현장, 바이노럴 사운드를 녹음하는 데에 필요한 더미헤드 마이크를 설치 중이다 © DARKFIELD

소리가 흐르고 막이 오르고

다크필드 시어터는 사운드를 중심으로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는 영국의 이머시브 극단이다. 다크필드의 두 창립자인 데이비드 로젠버그(David Rosenberg)와 글렌 니스(Glen Neath)는 1998년부터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이머시브 공연을 제작하며 협업해 온 이머시브 공연의 선두 주자다. 다양한 사운드 기반 다감각 이머시브 공연을 펼치고 있는 다크필드는 기존의 공연과는 달리 과감하게 시각을 차단하고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우며 공연에 따라 후각, 촉각 등을 통해 관객들에게 직접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다양한 감각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관객을 이야기 안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이들의 공연은 공연이라기보다 하나의 “경험”과 같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은 전통적인 형태의 극장이 아닌, 40피트 선박용 컨테이너 안에서 이루어진다.

 

관객들이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주변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게 하고 싶었습니다. (공연을 제작하며) 항상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지, 즉 이것이 현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우리가 만든 모든 공연에는 그런 요소가 있습니다. 각 공연이 관객 한 명 한 명과 연결된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다크필드 공동 창립자 글렌 니스(Glen Neath) 인터뷰 중에서(VML(2018.07.17), Ella Britton, Glen Neath, cofounder, Darkfield)

 

선박용 컨테이너 안에서 펼쳐지는 다크필드의 세계는 소리를 통해 관객을 어디로든 데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추락할지 혹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지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비행기에서부터 유령선의 내부, 혹은 80년대 오락실까지. 어딘지 스산하지만 낯설고 비현실적인 새로운 경험을 하게 만드는 다크필드의 공연들은 암전 이후, 시각이 차단된 공간에서 사운드를 중심으로 긴장감과 몰입감을 선사한다.

 

기존 공연에서는 부수적이었던 소리, 음향이 다크필드에서는 공간을 만들고 사건을 일으키며 극을 전개하는 주요 매개가 된다. 때로는 귀 가까이에서 속삭이기도 하고 멀리서 부스럭거리다 갑작스러운 굉음을 울리기도 하는 3, 40분 남짓의 러닝타임동안 입체적인 음향을 담아낸 360도 바이노럴 사운드를 통해 경험하는 감각의 세계는 시각이 중심이 되는 기존의 여타 공연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또 다른 차원의 감각을 연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거나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인기척처럼 다양한 소리가 어우러지며 공간감과 거리를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크필드가 연출하는 입체적 사운드는 제4의 벽을 허물고 관객에게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장치다.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공간을 가득 메우는 서라운드 음향과 달리 헤드폰을 통해 듣는 입체적인 바이노럴 사운드는 관객과 공연 사이의 거리를 좁히면서도 색다른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무한대로 확장되는 움직이는 공연장

이렇듯 다크필드의 공연은 암전 상태에서 시각을 차단한 채 소리만으로 공간감을 형성하고 극을 전개해 나가기 때문에 큰 공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의 공연장은 40피트짜리 선박용 컨테이너 한 칸이 전부이다. 그러나 그들의 공연이 벌어지는 장소는 광범위하다. 컨테이너를 활용하는 이들의 콘텐츠는 모든 공간에서 공연을 가능하게 만든다. 가변형 블랙박스 시어터에 들어갈 수도 있고 공터, 공원, 페스티벌 현장 등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이동이 간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컨테이너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사운드나 후각 등 감각 효과를 컨트롤하고 소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세밀한 타이밍 조절과 긴장감 조성이 필요한 극의 특성상, 공연장의 환경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제어하고 조작할 수 있어야 한다. 매번 세계 여러 도시를 돌며 공연을 하다 보면 이러한 환경을 유지하는 데는 자연히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공연에 최적화된 컨테이너 공간을 활용하면 모든 것을 새로 세팅하고 조율할 필요가 없다. 이동성과 공연 환경 조성의 면에서 컨테이너가 이들에게 최적의 공연 공간인 것이다.

 

또한 이들의 공연장은 오프라인 공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다크필드 라디오라는 애플리케이션은 모바일을 통해 관객을 다크필드의 세계로 안내한다. 조용한 공간에서 이어폰을 준비하고 관람 시간에 맞춰 애플리케이션에 입장하면 생생한 소리 경험이 가능하다. 다크필드 라디오 애플리케이션 속 공간이 그들의 공연장이 되며, 관객에게는 그들의 집, 부엌, 또는 침실이 되기도 한다. 팬데믹 시기에 만들어진 이 앱은 다크필드 시어터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안겨주었고, 그들의 공연이 특정 오프라인 공간에 한정되지 않고 더욱 다양한 창구로 뻗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이후 다크필드는 레거시 미디어인 BBC 라디오와의 합작을 통해서 자신들의 신작을 발표하기도 했다.

 

어디든 이동할 수 있고 설치할 수 있는 선박용 컨테이너에서 시작해 코로나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도했던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사운드 체험 공연, 그리고 라디오와 같은 레거시 미디어를 활용한 콘텐츠 제작까지 다크필드는 그들의 공연 공간을 점점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이후에는 2020년 개봉한 이비저블맨(The Invisible Man)의 프로모션 일환으로 제작되었던 인비저블(Invisible)을 확장해 VR을 접목한 체험 콘텐츠의 쇼케이스를 진행하며, 가상 공간으로의 확장 또한 시험해 보기도 했다. 다크필드의 콘텐츠의 중심 매개인 소리는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곳으로 퍼져나간다. 다크필드의 공연 공간은 특정 공간이 아닌 소리가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이다.

런던 카나리워프 몽고메리 광장에 설치된 다크필드의 컨테이너 공연장 © 다크필드 페이스북, Sean Pollock
런던 더 볼트 페스티벌에 설치된 다크필드의 컨테이너 공연장 © 다크필드 페이스북

시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

다크필드가 사운드를 통해 한계를 넘어 확장해 가는 영역은 공간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효과적으로 사운드를 활용하는 자신들의 강점을 십분 활용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주제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긴장과 불안, 공포 등 관객들을 자극해 온 기존의 키워드를 넘어 치유라는 새로운 키워드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북아메리카 마약 중독 실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제작된 이머시브 오디오 경험 콘텐츠인 <인트라빈(Intravene)>은 마약중독 방지 활동가와 다큐멘터리 전문가와의 협력을 통해 제작되었다. 실제 마약 중독자의 인터뷰와 에피소드를 활용하는 한편, 다크필드의 입체사운드를 통해 밴쿠버의 마약중독 실태를 관객에게 더욱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써 마약 남용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콘텐츠를 제작하고자 했다.

 

인트라빈보다도 더욱더 치유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콘텐츠는 부부, 연인 등 두 명의 커플을 대상으로 한 AI 기반 오디오 이머시브 공연 <파라다이스(Paradise)>이다. 20분가량의 러닝 타임 동안 두 이용자가 실제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시뮬레이션하고, 질문에 답하는 일종의 인터랙티브 게임이다. 음성 인식 소프트웨어와 AI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용자마다 답변에 따라 각자 다른 시나리오를 얻게 되는데 이를 통해 부부, 연인과의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의 자신의 행동과 감정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관계를 중단하거나 계속 함께해야 하는 이유를 탐구해 나가는 일종의 관계 테라피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운드의 힘은 마음을 움직인다는 데 있다. 때로 소리는 텍스트나 시각적 이미지보다도 감성적이고 추상적인 영역을 표현하는 힘이 더 세다. 또한 그만큼의 호소력을 지니며 관객에게 텍스트나 시각적 자극과는 다른 몰입감과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다크필드 시어터는 이러한 소리의 특성을 활용해 극도의 긴장감과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자신들의 특기를 치유라는 키워드에도 적용해 가는 중이다.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어디서나 다크필드의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다크필드 라디오 © 다크필드 페이스북
아케이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코인형 오락실기기를 활용하는 다크필드의 <아케이드> © DARKFIELD

이처럼 사운드 경험을 기반으로 한 이머시브 공연에서 독보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다크필드의 확장과 실험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그들이 최근 발표한 신작 <아케이드(Arcade)>에서는 소리가 중심이 된 기존의 방식에 더해 관객의 선택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는 게임적 요소를 강화했다. 1980년대 오락실을 연상케 하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아케이드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세계를 배경으로 삼는데, 오락기를 이용해 전쟁 상황에 놓인 아바타를 플레이어인 관객이 이끌며 지거나 이기거나 혹은 평화로운 루트 찾는 등 각자의 선택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이처럼 헤드폰과 애플리케이션 등을 기반으로 바이노럴 사운드를 통해 관객과 무대 사이의 거리를 좁혀 긴밀한 상호작용을 시작한 다크필드는 이제 관객이 더욱 능동적으로 자신들의 세계에 참여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와 상황, 독특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복잡하고 흥미로운 세계로 그들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요즘 들어 다양한 체험형 콘텐츠와 공간 등이 생겨나고 있지만 다크필드처럼 사운드에만 온전히 집중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경우는 드물다. 사운드가 지닌 공간과 콘텐츠의 확장 가능성은 새로운 경험을 원하는 대중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설 수 있다. 또한 한정된 공간과 길지 않은 러닝타임 또한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사운드 공연만의 강점이 되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창작살롱 나비꼬리의 <포비아 포비아>나 우란문화재단의 연극 <땅 밑에>와 같이 실험적인 소규모 사운드 공연 등을 통해 대한민국형 사운드 이머시브 공연 시장이 이제 막 태동 중이다. 아직 두드러진 고정 레퍼토리나 단체가 없지만 소리가 가진 확장성과 몰입감이 작품이 되고 세계를 빚는 대한민국형 사운드 이머시브를 만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