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스테이케이션’, 비움에서 찾는 휴식의 미학

 

삶에도 다양성이 필요하다.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퇴보하는 것처럼, 매일 반복되는 삶을 살다 보면 말 그대로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어릴 때부터 ‘멈춤’은 곧 ‘도태’라는 공포로 이어졌던 한국인의 삶에도 쉼이 필요하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혜민 스님의 책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달리는 삶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속도를 늦추어 걸어보게 되면 보이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사실 멈춘다고 해서 우려하는 것처럼 삶이 당장 위기에 처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트랙에서 조금 벗어나면, 자신이 추구하던 삶과 목표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돈, 승진, 더 나은 커리어 맹목적으로 따라가던 삶의 목표가 나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관조적인 자세에서 생각해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지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그 쉼의 끝에, 결국 다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세속적인 삶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인생에는 다른 많은 길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하고, 무심코 지나갈 수 있었던 것들과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하기에, 쉼은 가장 인간이 쉽게 할 수 있는 철학적 실천이다.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돌아보다

 

JT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효리네 민박’을 보며, 사람들은 그런 ‘쉼’의 대리만족을 꿈꾼다. 사실 ‘효리네 민박’의 진짜 주인공은 집주인 이효리 부부도,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행운의 숙박권을 얻어낸 손님들도 아니다. 방송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설정이 있겠지만 이 프로그램의 진짜 주인공은 민박집 알바생 아이유와 윤아다.

 

아이유와 윤아는 국내 정상급 아이돌 가수이며, 둘 다 2010년대 초반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지금은 예전만큼 다양한 활동을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인기 연예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너무나 바쁜 10대 후반, 20대 초반을 보낸 나머지 그 나이에 어울리는 삶을 살지는 못했다. 민박집에 오는 손님 중 많은 수는 그녀들 나이 또래의 20대들이다. 아이유와 윤아는 제주에서의 자유 시간을 천진난만하게 즐기는 그네들의 모습에서 ‘연예인’으로서 삶을 살았던 자신의 고민을 되짚어보며, 스스로 치유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 둘에 앞서 비슷한 길을 걸었던 제주민 이효리가 있다.

 

대부분의 시간은 ‘효리네 민박’에서 일을 하지만, 아이유와 윤아는 자신들의 주 무대에서 떨어진 공간에서 휴식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제주에서 한 달 살아보기’가 유행어처럼 돌고 있는 지금, 그들은 진짜 제주에서 장기간 살아보며 낯선 공간에서 스스로 돌아보는 철학 여행을 하는 셈이다. 이러한 현상을 요즘 ‘스테이케이션’이라고 부른다.

‘효리네 민박' 방송 장면 캡처

왜 ‘스테이케이션’인가?

 

‘스테이케이션’은 ‘머문다’라는 뜻 ‘Stay’와 ‘휴가’를 의미하는 ‘Vacation’이 혼합된 신조어다. 과거 대부분 휴가의 모습은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을 떠나 이것저것 보고 오는 것이었다면, 이제 사람들은 무엇을 하지 않아도, 나를 규정하는 수많은 관계와 의무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에 집중한 휴식을 원한다.

 

지난날 우리네 여행을 생각해보자. 월화수목금 5일 주어지는 정기 휴가를 최대한 끌어 쓰려, 토요일 아침에 출발해 그다음 주 일요일에 돌아오는 항공권을 몇 달 전부터 예약해 놓고, 막상 여행지에서는 한 시간이 아까워 뭐라도 한 곳 더 가보고, 뭐라도 한 장 더 찍으며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휴식과 재충전은커녕 시차 적응도 하지 못한 채 귀국해 사무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지는 않았는가. 수 천장에 이르는 사진은 외장하드에 놓고 들춰보지도 않는데, 몇 달이 지나도 아련하게 생각나는 가슴 속 감동은 과연 얼마나 담아 왔는가. 남은 건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뿐 아니었는지 반성해 보게 한다.

트렌드 헌터가 지목한 ‘케렌시아’와 ‘소확행’

 

‘스테이케이션’은 그동안의 바쁜여행에 대한 회의로 등장한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이다. 일상만큼 몸도 마음도 분주한 여행에 지친 현대인들은 자신을 소모하는 모든 요소를 배제한 채,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 속에서 자유를 찾고 싶어 한다. 그것이 멀리 떨어진 곳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김난도 교수와 트렌드 헌터들은 신간 ‘트렌드 코리아 2018’에서 이러한 사람들의 심리를 ‘케렌시아를 찾는 현대인’이라며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케렌시아’는 투우장의 소가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홀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을 의미한다. 매일매일 삶의 현장에서 전쟁을 치르는 현대인들 역시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케렌시아’ 같은 공간을 필요로 한다. 실제로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근로시간이 긴 나라다.

 

이 책에서 트렌드 헌터들은 ‘케렌시아’의 기본 형태로 도심 속 패스트 힐링을 꼽았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피로를 빠르게 회복시켜주는 ‘수면 카페’와 취미와 결합한 ‘힐링 카페’가 최근 많이 생겨났는데, 이러한 장소는 바쁜 현대인에게 도심 속 급속충전소와 같은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내 집을 안락하고 편안한 휴식처로 꾸미는데 취미를 갖는다. 1인용 의자부터 빈티지 소품까지 케렌시아를 위한 다양한 제품이 시중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최근에 퍼지고 있는 ‘소확행’ 트렌드 역시 이러한 현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는다는 신조어인 ‘소확행’은 헬조선, N포 세대, 흙수저와 같이 부정적인 키워드가 범람하는 시대에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원대한 행복이 아닌, 소소하지만 자주 있을 수 있는 그런 가시적인 행복을 찾는 사람들의 심리를 가리킨다. “올해 돈을 모아 유럽으로 떠날 거야.”라는 미래의 큰 행복이 아닌, 가까운 곳에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여행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다. ‘미래가 아닌 현재’, ‘특별함이 아닌 ‘평범함’, ‘가끔이 아닌 ‘자주’,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소확행의 가치는 이러하다.

 

도심에서 즐기는 소소한 휴가: 호캉스

 

이러한 현상을 현실에 접목해보면, ‘호캉스’라는 새로운 휴가 트렌드로 이어진다. ‘호텔’과 ‘바캉스’의 합성어인 ‘호캉스’는 호텔의 안락함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휴가의 형태다. ‘호캉스’는 멀리 떠나지 않고도 호텔에서 제공해주는 서비스들을 이용하며 재충전하려는 현대인들의 니즈와 비수기에 유휴 객실을 활용하여 손님을 유치하려는 숙박 산업의 니즈가 부합하여 만들어진 여행 풍조다.

 

이러한 수요에 발맞추어 호텔은 기업 임직원에게 할인된 가격으로 다양한 호캉스 상품을 내놓고 있다. 호텔에 머물며 요가나 필라테스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는 패키지 상품이 있는가 하면, 하루 종일 호텔에만 머무르고 싶은 고객을 위해 체크인, 체크아웃 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하며 삼시 세끼를 모두 제공하는 상품도 등장했다. 또한, 아이가 있어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젊은 부부들에게는 호텔 수영장 시설을 즐기며 브런치를 받을 수 있는 상품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자주, 가깝게 찾을 수 있는 것에는 궤를 같이하지만, 조금은 낯선 사람들과 함께 휴가를 보낼 방법은 또 있다. 요즘 뜨고 있는 ‘게하’,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방법이다. 집 같은 안락한 분위기에, 가격도 저렴하고, 다른 지역이나 외국에서 온 여행자들과의 교류도 나눌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는 ‘호캉스’의 또 다른 형태다. 도심에서 다소 떨어진 서촌, 북촌의 게스트하우스에는 주말에 ‘소확행’을 누리고자 하는 도시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낯선 곳에 녹아들기: 한 달 살아보기

 

지금, 당장이라도 휴식 공간으로 뛰어들 수 있는 ‘소확행’ 스테이케이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오랜 시간 현지에 머무르며 녹아드는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효리네 민박’에서 윤아와 아이유가 그랬던 것처럼, 도심이 아닌 자연을 벗 삼아 여행이 아닌 살아보기를 시도하며 진정한 의미의 ‘스테이케이션’을 즐기는 것이다.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의 사이클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슬로우 리빙(slow living)’을 제안하며, “이렇게 살아가는 방법도 있어”라는 메시지를 설파한다.

 

실제로, 이러한 ‘살아보기’는 방학이 있는 대학생이나 군입대 전 휴학생, 그리고 장기근속 휴가를 얻은 직장인들 사이에 인기를 얻고 있다. 가장 인기를 얻는 목적지는 역시 제주도이고, 최근에는 저렴하게 장기 숙박을 구할 수 있는 동남아의 작은 휴양지도 많이 선호하는 추세다.

– 여행이 아닌 체류를 지원한다. 미스터멘션(Mr. Mention)

 

도심에서 묵은 때를 지우고, 로컬에 녹아들며 새로운 삶을 경험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살아보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잘 갖추어진 호텔보다 ‘게스트하우스’나 ‘에어비앤비’ 같은 민박을 선호한다. 미스터멘션(Mr. Mention)은 에어비앤비와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몇 주씩 타지에 체류하는 이들에게 주목받는 장기숙박 전문 플랫폼이다. 제주도에서 먼저 시작하여 지금은 부산, 태국의 방콕과 치앙마이까지 숙소를 연결해주고 있으며, 점차 그 대상 도시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넘칠 듯이 방대한 사색의 시간을 갖게 되면, 예술적인 영감이 피어오르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장편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집을 떠나 오랫동안 낯선 도시에 가서 새로운 경험을 하며 문학적 영감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누구나 오는 셰어하우스, 한량유치원

 

‘한량유치원’은 ‘살아보기’를 위한 하드웨어(숙박)를 제공할 뿐 아니라, ‘바쁜 삶’이 주는 피로와 무력감을 거부하고, 진짜 ‘한량’처럼 살아보자는 소프트웨어(철학)를 전파하는 ‘팝업 셰어하우스’ 프로젝트다. 이름이 말해주듯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무작정 찾아와 뒹굴뒹굴하다 돌아갈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다. 제주와 목포, 두 곳에 차려진 숙소에서 사람들은 ‘널브러질 자유’를 찾아 내키는 대로 시간을 보내다 돌아간다. 요리 하고, 사과 따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며 평소 일상 속에서는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고 돌아간다. 무위(無爲)가 하나의 낭만 트렌드가 되고, 추구하는 가치가 되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쩌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못하는 그런 사람들일지도 몰라요. 가만히 있지 못하잖아요. 어릴 때는 부모님이, 커서는 선생님이, 좀 더 커서는 사회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 이제 좀 쉬어가면 어때요. 그냥 쉬러만 와도 좋아요. 널브러져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한량유치원’ 홈페이지 인사말 中

스테이케이션 다음, 휘겔리케이션

 

‘스테이케이션’은 이제 점차 ‘휘겔리케이션’(‘편안함’을 뜻하는 덴마크어 hyggeligt와 vacation을 합한 신조어)로 진화하고 있다고 한다. 한 곳에 ‘머물며’ 느릿한 휴가를 보내는 것을 넘어, 점점 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욱 안으로 파고들며 나만의 ‘케렌시아’를 구축하고, ‘편안함’이라는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소확행’을 누린다.

 

굳이 무엇을 애써 발견하지 않아도, 휴식과 무위는 사색을 낳고, 낯섦은 ’나 자신’과 비교할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를 던져 준다. 제대로 느낄 틈도 없이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는 것보다, 낯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보고, 덩어리로 주어진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내면에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강박없는 상태에서 본연의 나에 집중하는 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새로운 여행 트렌드에 부여된 단 하나의 미션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