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영화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만드는 문구가 있다. “XX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타이틀 앞에 이런 문구가 있으면 괜히 그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 어떤 이유로 상을 받았을까 궁금하기 때문이다. 거기엔 어쩐지 영화의 완성도가 높을 것만 같은 기대감도 섞여 있다.

개중에는 관객들의 투표로 수상작을 선정하는 영화제들이 있기는 하지만, 세계 3대 영화제인 칸, 베니스, 베를린 국제 영화제는 각 분야의 영화 전문가들의 심사를 거쳐 수상작을 선정한다. 여기서 선별된 영화들은 곧 그 해의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 그 기대감이 섣부른 것만은 아닐 수 있다. 국제 영화제 수상작은 영화인들이 먼저 인정한, 검증된 영화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재미와 감동, 그리고 흥행을 꼭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창작 예술 작품이 동업자들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점만큼은 틀림이 없다.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매년 열리는 국제 영화제의 수상 결과에 주목하는 이유다. 각 영화제가 주목한 영화마다 뚜렷한 특징과 색깔이 있는 만큼, 영화제별로 어떤 영화가 매력을 발산해 평단의 주목을 받았는지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다. 얼마 전 3대 국제 영화제 가운데 하나인 베를린 영화제가 일흔세 번째 여정을 마쳤다. 현장을 찾아 베를린 영화제에 담긴 여러 이야기들을 길어왔다.

베를린 영화제만의 색깔

다른 영화제에 비해 베를린 영화제는 외형적으로 매우 소탈하다. 레드카펫 행사도 굉장히 간소하며, 여름 전후로 휴양지에서 열리는 칸과 베니스 영화제와는 달리 추운 겨울,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 한 가운데서 열린다. 게다가 주 행사장인 베를리날레 팔라스트(Berlinale Palast)는 도시의 높은 건물 가운데 위치해 크게 이목을 끌기 어렵다.

 

그러나 영화제의 구성은 결코 초라하지 않다. 특히 베를린 영화제는 칸과 베니스와 비교했을 때, 프로그램의 구성이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다.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를 포함해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경쟁 부문, 인카운터스 부문, 파노라마 부문, 포럼 부문, 제너레이션 부문 등으로 나누어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예를 들면 포럼 부문에서는 젊은 감독들의 데뷔작이나 실험적인 영화들을 소개하고, 제너레이션 부문에서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주 관람객으로 삼는 영화들을 소개하는 등 세분하여 진행된다.

 

2020년에는 기존의 영화 문법과 비교했을 때 신선한 형식을 통해 새로운 관점과 구성을 지닌 영화를 소개하는 인카운터스 부문이 신설됐다. 사회 이슈를 부각하거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 또한 환영하는 편인데, 이는 독일이라는 국가가 지닌 역사적 배경과도 연관이 있다. 다른 영화제들에 비해 상업성을 배제한 실험적이고 예술성이 높은 작품들이 많이 소개된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심사를 거쳐 매해 400개 정도의 출품작들이 소개되며, 베를린 전역의 영화관뿐 아니라 많은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콘서트홀에서도 영화를 상영한다.

 

베를린국제영화제와 동시에 개최되는 유러피안 필름 마켓(European Film Market, EFM) 또한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다. 필름마켓은 영화 제작사, 배급사, 투자사, 그리고 전 세계의 바이어들이 한자리에 모여 영화를 사고파는 시장이다. 이미 만들어진 영화를 여러 사람에게 소개하고 판권을 판매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출시할 영화들에 대한 공동 투자나 공동 제작을 주선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3대 영화제 가운데 가장 늦게 출발한 까닭에 세계 최초이자 최대인 칸 필름 마켓에 비해 그 규모나 명성이 적은 편이지만, 영화제의 색깔과 비슷하게 다양한 예술영화 그리고 유럽에서 제작되거나 유럽 감독들의 영화들을 중점적으로 소개한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영화의 원작 도서와 같이 출품된 영화와 관련해, 엔터테인먼트 지식재산권(Entertainment Intellectual Property, E-IP) 판권 마켓을 조성하여 영화제의 외연을 넓히는 일에도 힘쓰고 있다.

베를린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 행사가 열리는 Berlinale Palast © 직접 촬영
베를린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 행사가 열리는 Berlinale Palast © 직접 촬영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영화제

다양한 지속가능성 개발 정책과 친환경 정책으로 유명한 독일답게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지속가능한 개발에 대해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특히 영화제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UN이 제시한 17개의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와 관련해 영화제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발표한다. 뿐만 아니라 초청된 영화들이 17가지 지속가능 발전 목표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를 명시하기도 한다.

 

2020년의 경우, 공식 홈페이지에 초청된 영화들의 시놉시스와 함께 어떤 내용이 지속가능 발전 목표와 연관이 있는지를 소개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베를린국제영화제가 단순히 많은 이들이 즐기다 돌아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화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행사로서 그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베를린국제영화제는 SDG 가운데 양질의 교육(4번), 성평등(5번), 산업-혁신과 인프라(9번), 지속가능한 소비-생산(12번) 등 4개의 목표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한다. 우선 영화제는 영화를 매개로 각 세대가 세상과 세계의 여러 모습을 고민해 볼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교육 수단이 되고자 한다(SDG 4). 영화제 프로그램 가운데 제너레이션(Generation) 부문의 경우 아동 및 청소년을 주 대상으로 삼는 영화들을 소개하는데, 이를 통해 성인뿐 아니라 아동과 청소년에게도 문화 예술을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힐 계기를 제공한다.

 

성평등에 관한 목표(SDG 5)의 경우, 1980년대부터 파노라마(Panorama) 부문에서 동성애 및 페미니즘을 핵심 주제로 다루는 영화들을 소개하면서 사회가 지닌 고민에 관한 공론의 장을 만드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또한 출품작 심사를 위한 심사위원을 구성할 때도 성비를 고려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산업, 혁신과 인프라 목표(SDG 9)의 경우 다양한 부대 프로그램을 통해 목표 달성을 꾀한다.

 

우선 매해 영화 제작과 관련한 여러 토론회와 워크숍을 진행해 미래의 감독과 영화 제작자를 꿈꾸는 이들이 영화 산업이 지향해야 할 지속가능한 발전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도록 돕는다. 또한 세계영화펀드(World Cinema Fund)를 만들어 남미, 아프리카와 같이 상대적으로 영화 제작 인프라가 부족한 국가들을 대상으로 영화 제작을 지원하는 기금을 조성한다. 특히 매해 필름 마켓에서 아프리카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소개하는 섹션을 별도로 개설해 그 방향성을 견고히 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소비-생산(SDG 12)의 경우 영화제 전반에서 쓰레기 줄이기를 목표로 삼고 있다. 모든 영화관에서 일회용 컵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으며, 행사장에 사용하는 레드카펫도 재활용 제품을 사용한다. 또한 독일 철도청과 협력해 관람객들이 영화제 티켓을 구입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영화제가 파생하는 추가적인 쓰레기 배출을 방지했다.

재활용을 통해 만들어진 베를린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 © Berlinale

한국 영화와의 인연

최근 시장 저변이 확대되고 여러 콘텐츠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 관객들에 소개됨에 따라 우리 영화도 상업 영화, 예술 영화 가릴 것 없이 영화계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 영화가 국제 영화제에 초청받았다는 소식이 흔하게 들릴 정도다. 베를린 영화제에서도 한국 영화를 꾸준히 초청하고 있다. 3대 영화제 중 분야를 막론하고 우리나라 영화가 가장 많이 수상한 곳이 베를린 영화제이기도 하다.

 

1961년 강대진 감독의 마부가 경쟁 부문에 처음 초청된 이후로,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홍상수 감독의 도망친 여자 등이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수상했다. 특히 홍상수 감독의 경우 최근 10년간 6번이나 초청받을 만큼 단골이 되었고 올해까지 4년 연속으로 초청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베를린 영화제의 방향성에 따라 다양한 장르의 한국 독립영화들이 소개되기도 한다. 2011년 박찬욱, 박찬경 감독의 파란만장 그리고 2015년 나영길 감독의 호산나는 단편 부문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받기도 했다.

 

2023년에는 총 네 편의 한국 영화들이 소개됐다. 베를리날레 스페셜 부문에 <길복순(변성현 감독)>, 포럼 부문에 <우리와 상관없이(유형준 감독)>, 인카운터스 부문에 <물 안에서(홍상수 감독)>, 그리고 비평가주간 부문에 <다섯 번째 흉추(박세영 감독)>까지 다양한 부문에서 이름을 올렸다. 이 가운데 <우리와 상관없이>의 경우 감독의 데뷔작이 베를린에 초청됨으로써 이목을 끌기도 했다. 또한 한국에서 투자를 담당했거나 한국인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 세 편도 초청이 되었는데, 이를 포함하면 총 일곱 편의 한국 및 한국 관련 영화가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셈이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에서는 베를린국제영화제 기간동안 한국 영화의 밤을 개최해 한국 영화를 세계 영화인들에게 소개하는 일에도 힘을 쏟는다. 올해는 국내외 영화인들과 영화 산업 관계자들 400명 정도를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는 감독과 배우들이 영화제에 초청받은 한국 영화를 직접 소개하며 함께 한국 음식을 나누기도 했다. 영화를 통해 한국 문화를 알리고 교류의 장을 만드는 것이다.

베를린국제영화제와 함께 열리는 유러피안 필름 마켓 © 직접 촬영

2023년 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는 프랑스 파리의 정신질환자 주간보호시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아다망에서(Sur L’Adamant)>가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감독 니콜라 필리베르는 수상 소감에서 자신의 다큐멘터리가 예술로서 인정받게 되어 감동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베를린 영화제는 3대 영화제 가운데 가장 더디게 시작한 덕분인지 몰라도 그 특유의 색깔과 방향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덕분에 우리는 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베를린 영화제의 출품작들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대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는 조금 덜 상업적이라 할지라도 자기 작품을 세상에 소개할 수 있는 좋은 창구가 되어줄 수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시간 동안 잠깐 다른 세계에 머무른다.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발견하며 재미와 감동 등 여러 아름다움을 누린다. 베를린 영화제뿐만 아니라 모든 영화제에는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는 갓 태어난 영화들이 즐비하다. 영화제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적어도 수십 편에서 수백 편의 영화가 소개된다. 심지어 심사를 통해 검증까지 받은 의미가 있는 작품들이다. 이 신선한 영화들 안에서 새로 길어 올리는 영감은 삶에 크고 작은 자극이 된다. 혹 지금 살고 있는 곳 주변에서 가까운 시일에 열리는 영화제가 있다면 그곳에 가서 하루 종일 영화만 보며 다양한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