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개최된 ⟪런던디자인비엔날레 2021⟫은 코로나 이후 런던에서 열린 첫 대규모 오프라인 행사 중 하나였다. 그만큼 언론을 비롯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았는데, 개최 장소인 서머셋 하우스(Somerset House) 광장이 새롭게 바뀐 모습은 그들의 기대를 채우기에 충분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던 드넓은 광장에 400여 그루의 나무가 심긴 울창한 숲이 들어섰다.
서머셋 하우스가 지어질 당시 영국에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강조하는 건축 양식, 팔라디아니즘(Palladianism)이 유행했다. 서머셋 하우스 트러스트의 이사, 조나단 리키(Jonathan Reekie)에 따르면 서머셋 하우스가 계획되던 당시 광장 안뜰에 살아있는 나무를 심는 일이 계약에 의해 금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런던디자인비엔날레 2021⟫의 예술감독으로 참여한 에스 데블린(Es Devlin)은 역으로 그 점을 파고들어 안뜰에 작은 삼림 지역인 <변화를 위한 숲(Forest for Change)>을 세웠다.
⟪런던디자인비엔날레 2021⟫의 슬로건이었던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디자인할 수 있을까?(Can we design a better world?)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17가지의 글로벌 목표(17 Global Goals)를 함축하고 있다. 데블린은 숲의 중심부에 글로벌 목표가 하나씩 적힌 17개의 거울 기둥을 원형으로 배치하여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관람객들은 울창한 나무숲을 통과해 도착한 이 공간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의 의미와 비엔날레의 슬로건을 돌아보게 된다.
인류는 숲을 파괴하는 존재인 동시에 숲을 보존하려고 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바로 이 지점이 광장에 들어선 이 푸르른 작품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서머셋 하우스 광장은 몇백 년에 걸쳐 보수 공사와 재건축이 반복되어 왔다. 근본적으로 광장이 추구하는 미의 기준은 자연과의 조화보다 분수나 스케이트장처럼 인류가 가진 기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데 있었다. 관계자들은 인류 문명의 발전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요소들을 통해 인간이 자연을 지배함을 과시하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변화를 위한 숲>은 달랐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사람의 기술만이 두드러지던 광장에 나무로 그득한, 자연 그대로에 가까운 숲을 조성했다. 벽돌로 가득 찬 넓은 광장 바닥만을 보던 이들에게 꽤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변화를 위한 숲>은 자연을 능가할 만큼 멋진 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 인간이 다시금 마음먹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음을 되새기게 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서부터 환경 보호와 자연 절약에 대해 배워 왔다. 그러나 그 노력에 대한 성과를 가시적으로 목격할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자연 회복보다 도시 개발에 더 자주 노출되었기에 환경 보호를 외치는 여타 캠페인에 쉽게 동참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변화를 위한 숲>은 자연에 대해 지배적인 태도를 취했던 기존의 설치 공간 특성을 역으로 이용해 대중들에게 자연 보호의 필요성을 부각했다고 볼 수 있다.
물리적으로 특정 개체 내에서 울림(Resonance), 즉 공명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그 개체가 지닌 고유 진동수와 동일한 진동수를 가진 파동이 외부에서 주기적으로 유입되어야 한다. ⟪런던디자인비엔날레 2021⟫은 관람객들이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며 스스로 자신의 내면에서 그 울림을 느끼기를 바라며 기획되었다. 서머셋 하우스의 무채색 광장을 녹색으로 가득 채운 <변화를 위한 숲>을 포함한 다양한 작품들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자연을 향한 고유 진동수와 가장 근접한 경각심이라는 파동을 끊임없이 내뿜었다. 그중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독특하면서도 묵직한 파동을 내뿜는 세 작품을 소개한다.
From Green to Red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비티 울프(Beatie Wolfe)는 음악을 다르게 바라보는 가수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20년, 특수 영상을 제작하는 더 밀(The Mill) 스튜디오와 함께 <From Green to Red>란 작품을 음악과 영상으로 공개하였다.
영상 초반에는 마치 녹색 천을 모아 길쌈하는 듯한 그래픽이 등장한다. 이는 NASA(미항공우주국)가 보유하고 있는 데이터를 활용해 인류가 약 80만 년간 발생시킨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쁜 녹색 계열의 실들이 짜임새 있으면서도 부드럽게 휘날리다 1600년대를 기점으로 확 바뀐다. 갑작스레 녹색이 보이지 않더니 곧 칙칙한 색감의 누렇고 붉은 실들이 뒤엉키며 화면을 가득 채우다 이내 끊어져 버린다.
녹색은 피로를 풀어 주고 진정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만큼, 다른 색들에 비해 우리 눈에 익숙하고 편안한 색상이다. 그래서인지 영상 속 실이 조금씩 누렇게 변하다 울긋불긋하게 뒤바뀌는 모습은, 마치 식물이 시들어버린 듯 불편함을 유발하는 동시에 조금 전까지 아름답게 휘날리던 초록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게다가 2020년대 현재를 기점으로 끊어지는 실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기대감을 동시에 안겨 준다. 앞으로 인류가 어떻게 행동하고 실천하는지에 따라, 작품 속의 실이 까맣게 되어 영원히 끊어질 수도 있고 아름다운 녹색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이 작품은 2020년 4월에 공개된 이후 2년째 ⟪런던디자인비엔날레⟫에 등장했다. 그뿐 아니라 영국 글래스고에서 개최된 2021년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도 설치될 만큼 많은 사람에게 강력한 울림을 남겼다.
Spoon Archaeology
유럽연합은 2021년부터 플라스틱으로 만든 식기류, 빨대 등의 판매를 금지하고 재활용할 수 없는 플라스틱 폐기물에 세금을 부과하는 이른바 플라스틱세를 도입했다. 그만큼 플라스틱 폐기물 감소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러한 흐름대로라면 지금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이고 버려지던 일회용 숟가락 등이 먼 미래에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유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이를 예측이라도 한 듯 독일의 디자이너 카이 링케(Kai Linke)와 피터 에카트(Peter Eckart)는 수년간 수집해 온 일회용 플라스틱 식기류를 모은 작품을 ⟪런던디자인비엔날레 2021⟫에서 공개했다. 이 중에는 CJ제일제당에서 만든 햇반의 접이식 일회용 플라스틱 숟가락도 포함되어 있다.
프레임 속에 가지런히 놓인 일회용 플라스틱 식기류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각적으로는 아름다워 보이다가도 자연과는 약간 동떨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몇백 년이 지나도 부식되거나 녹지 않고 전시된 형태 그대로 남아있을 거라 생각하니, 최근 각국에서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는 플라스틱 식기류 규제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필자 역시 지금 글을 작성하며 종이 빨대로 커피를 마시고 있다. 당장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없더라도, 환경을 생각하는 기업과 정부의 움직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Tokens for Climate Care
오스트리아의 실험 디자인 스튜디오인 프로세스(Process)는 머신러닝을 이용해 토큰을 생성시키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현장 부스에 설치된 QR코드를 통해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기후 위기와 관련된 수많은 키워드 중 세 개를 선택할 수 있는 화면이 등장한다. 키워드를 선택한 다음 토큰 생성 버튼을 클릭하면 알고리즘이 이전에 학습했던 수많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고유한 토큰을 생성시킨 후, 부스 천장에 설치된 레이저 포인터로 토큰을 바닥에 투영시킨다. 그리고 출력된 토큰 모양은 웹사이트에 아카이빙되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어쩌면 이 <Tokens for Climate Care>란 작품은 위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기후변화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기후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며 사진이나 동영상 등으로 실태를 보여 주는 것만이 경각심을 일깨우는 방법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최근 급부상한 머신러닝 기술을 기후 변화 이슈에 접목하고, 독특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관람객의 선택에 따라 토큰 생성 과정과 결과를 제공하는 일련의 상호작용을 거치는 이 방식은 또 다른 신선한 양식으로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일깨운다.
앞서 소개한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디자인할 수 있을까?(Can we design a better world?)란 슬로건은 환경 문제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기아와 빈곤, 교육차별과 성차별 등 인류에게는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개중 환경 문제는 산업혁명 이후 전 세계에서 꾸준히 대두되어 왔으며 오염되어 가는 지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에, 17가지의 글로벌 목표 중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졌을 뿐이다.
성공한 디자인이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수단이기 이전에, 인류에게 그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런던디자인비엔날레 2021⟫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자신들의 역할을 충분히 달성했다. 이번 비엔날레가 인류에게 주는 메시지를 바탕으로,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가 책임을 회피하는 말잔치가 아닌 의미 있는 합의와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