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인류는 지금 기후 위기와 생태계 파괴, 팬데믹 등 전 지구적 위기 상황에 마주해 있다. 그간 인류가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인간 외적인 존재들을 도구로 간주해 온 결과다. 이로 인해 이제는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이분법의 잣대에서 벗어나 서로가 공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다.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2021 아르코 융복합 예술 페스티벌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2021. 9. 7~12. 12)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았다.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인간과 기술과 환경이 서로 횡단하는 방식을 살피고, 인간, 동물, 기계를 동등하게 간주하면서 신체와 물질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했다.

최근 많이 논의되고 있는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을 중심으로 여기는 인본주의(휴머니즘)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위계를 해체하는 동시에 인간과 비인간 존재 사이의 관계를 재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생태문화이론가인 스테이시 엘러이모(Stacy Alaimo)는 이를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전시의 개념적인 출발이 된 횡단신체성에서 살로 된(corporeal)이라는 표현은 형태가 없고, 경계가 모호하며,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몸을 의미한다. 횡단신체성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기계들의 연결, 작용, 얽힘을 가정한다. 인간-기술-환경의 관계를 물질 사이의 유동성으로 재정립하려는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포스트휴머니즘을 주제로 시각 및 다원 예술가 35명(팀)이 참여하여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3D 프린팅, 로봇, 데이터, 렌더링, 사운드 인터랙션 등 다양한 기술을 적용한 50여 점의 작업을 선보였다. 이로써 코로나 팬데믹 시대 예술이 대변하는 가치들에 주목하고자 했다.

 

페스티벌은 미술관 내·외부에서 열리는 전시를 비롯해 스페이스 필룩스에서 진행되는 라이브 아트, 온라인 플랫폼(www.nothingmakesitself.art)에서 구현되는 온라인 전시, 외부 기획자 3인(팀)의 위성 프로젝트로 구성되었다. 전시의 물리적 경계를 와해시키고 장르를 융합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김윤철, <아르고스>, 2018, 가이거 뮐러 튜브, 유리, 알루미늄, 마이크로 컨트롤러, 48×40×40cm. © 김윤철 작가 웹사이트
구기정, <유명한 풍경>, 2021, 다채널 영상과 혼합 매체, 가변 설치. © 직접 촬영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관람객들이 VR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린 《가상 정거장》 전시를 비롯해 최근 들어 VR 기기를 표현의 매체로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데, 김아영의 〈수리솔: POVCR〉 또한 팬데믹 이후 가까운 미래의 상황을 VR로 시뮬레이션했다.

 

약 15분가량 재생되는 VR 영상에서는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해 자원이 고갈된 상황에서 바이오 연료가 세계의 주 에너지원으로 쓰이게 된 근미래를 상상한다. 바이오 연료를 관리하는 AI인 수리솔과의 대화를 통해 탄소배출권 문제, 에너지 이슈, 기후변화 징후 등을 다룬다. VR 작품인 만큼 관객의 눈은 곧 카메라가 되고, 관객의 신체가 가상공간을 누비는 과정에서 현실과 가상 사이의 횡단과 충돌이 일어난다.

 

전시장 1층 중앙에 위치한 김윤철의 <임펄스>(2021)와 2층에 위치한 <아르고스>(2018)는 독립적인 작품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샹들리에처럼 천장에 걸려 있는 <임펄스>는 27개의 가지에 달린 투명 실린더로 투명한 액체와 공기 방울을 흘려보낸다. <아르고스>는 우주의 입자를 검출했다는 신호로 플래시를 깜빡이는데, 그 신호를 <임펄스>로 보내면 <임펄스>의 박동이 변화한다. 설치미술가이자 전자음악가인 김윤철은 물질의 세계를 횡단하여 관람객으로 하여금 서로 얽히는 여러 사건을 경험하게 한다.

 

실제 풍경을 3D 렌더링을 이용해 디지털 이미지로 재현하고 이를 물리적 공간에 구현하는 작업을 주로 해 온 구기정 작가는 신작 <유명한 풍경>을 통해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 위치한 모호한 감각을 드러낸다. 그는 기술 발전에 의해 변화하는 풍경을 포착하고 이를 다양한 매체로 표현하는데, 자연에서 온 소재와 디지털로 증강된 자연의 모습을 병치함으로써 관객의 시각을 자극한다. 화면 속의 이미지는 계속 증식하도록 표현되어 실재와 비실재의 경계를 흐린다. 이를 통해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 아닌 인간의 관점이 뒤섞인 경험을 전달하고, 인류가 자연을 대하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 전시 전경 © 아르코미술관
장한나, <뉴 락 표본 2020 한국>, 2020, 수집된 플라스틱, 33.5x45.5cm ©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

이 밖에도 이 전시에서는 환경과 인간이 얽히고 소통하는 양상을 데이터 시각화 작업으로 보여준 한윤정의 <더 퓨처 이즈 레드>(2021), 해양 생태계를 탐구하면서 바닷속 존재들과 교감하는 우르술라 비에만(Ursula Biemann)의 <어쿠스틱 오션>(2018), 바다에서 수집한 미세플라스틱을 직접 자신의 몸에 주입하는 실험을 진행한 시셀 마리 톤(Sissel Marie Tonn)의 <감시종 되기>(2020~2021)와 같은 작품을 통해 공동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이질적인 것들의 접점을 확장해 나가며, 다양체들이 공존하는 토대를 구축한다.

 

이번 페스티벌에서는 오프라인 전시 이외에도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작업이 소개되었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소개된 작품들은 환경 이슈를 둘러싼 담론과 리서치 결과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장한나의 <뉴 락 연구>(2017~)는 암석화된 플라스틱을 채집하고 관찰하는 프로젝트다. 플라스틱은 인류세(Anthropocene)의 대표적 화석으로 불린다. 짧게는 450년, 길게는 영원히 지구에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땅에 묻히고 바다에 버려져 화석처럼 자연의 일부가 된 플라스틱인 뉴 락을 수집하고 관찰하며 지구의 미래에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소개된 이재욱의 <리듬.색.새소리 연구>(2020)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 중 한 명인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1992)을 인류세 시대의 사운드 환경론자로 재해석한다. 메시앙은 작곡가이면서 조류학자였으며 새소리를 연구하기 위해 전 세계를 여행했는데, 이재욱 작가는 이를 비(非)인간적 음악의 세계를 포용했다고 보았다. 이재욱 작가는 평소 융합적 매체를 통해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탐구해 온 만큼, 이번 작품 또한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보여주면서 주의를 환기한다.

 

전시와 연계한 온라인 국제 심포지엄도 열렸다. 지난 11월 30일과 12월 1일 양일간 진행된 심포지엄에서는 기후 위기 시대 기술을 통한 예술적 상상력과 지속가능한 미술관을 위한 실천과 액티비즘을 주제로 연구자, 활동가, 작가들이 모여 실시간 토론을 진행했다. 기술과 자연, 자연과 예술의 접점을 탐구하는 예술가들의 작업을 바탕으로 행동주의 움직임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아르코미술관 유튜브 계정에서 시청할 수 있다.

이번 페스티벌은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인간과 자연, 기술의 관계를 성찰하면서 동시대 환경 이슈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인간, 자연, 기술 사이를 잇는 가교로서의 예술 행위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미래의 대안적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기술 진보와 환경 보호는 때로 대립적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여러 예술가의 창작 행위 속에서 하나의 유기체로 관계 맺음으로써 기술과 자연이 공생하는 미래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팬데믹과 기후 위기 시대를 관통하는 대안적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다.